※ 「③ 조선, ‘인구의 25%가 굶어 죽는’ 나라」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열네 번째, ‘대분기의 세계사’와 조선 버전: 자본주의 맹아론의 허무맹랑함
‘자본주의 맹아론’의 허무맹랑함은 이제는 많이 알려져서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의미 있게 다가왔던 부분은 역사의 보편성=법칙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역사는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문제해결 과정이다.
- 181쪽
참으로 멋있는 표현, 멋있는 정리이다. 역사는 필연적인 법칙이 아니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문제해결 과정이라는 깨달음은 ‘영국의 산업혁명’ 사례를 통해서도 알게 된다. 1760–1830년대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서양과 동양은 ‘대분기’(Great Divergence)를 한다. 영국은 왜 공업 부문에서 엄청난 기술변화를 겪게 되는가? 그 동력은 무엇이었는가?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는 영국의 산업혁명 요인으로, ①영국의 높은 임금 ②석탄산업 발달의 필요성 ③중상주의 이후 고정자본 투자 여력의 축적 ④미국 등 식민지 무역의 증가 & 도시화 진전을 꼽는다. ‘산업혁명의 원인’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깔끔한 정리는 홍춘욱 박사의 『잡학다식한 경제학자의 프랑스 탐방기』(에이지21)에 잘 나와 있다. 핵심은 3가지다(87–98쪽).
1. 지리
유럽은 강과 산맥이 많아 대규모, 중앙집권 국가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고만고만한 규모의 국가들이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다.
2. 제도
영국의 명예혁명은 ‘재산권 보호’ 수준을 높였다. 국가에 대한 신뢰와 경제주체의 인센티브를 끌어올렸다. ‘저금리’ 자본조달과 ‘특허권 보호’가 가능해졌다. 아래는 두 표는 오카자키 데쓰지의 『제도와 조직의 경제사』(한울)에 수록된 표다.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영국의 장기국채 이자율과 당좌예금 증가를 보여준다.
명예혁명은 ‘재산권 보호’ 제도에 해당한다. 명예혁명 이후 영국의 장기국채 이자율은 1693년 14.0%였다. 1739년에는 3.0%로 하락한다. 명예혁명으로 인해 ‘재산권’을 왕이 함부로 침해-약탈할 수 없게 되자, 신뢰가 높아져 이자율이 낮아졌다.
당좌예금 규모를 보면 1698년 10만 파운드였는데, 1740년에는 290만 파운드로 늘어난다. 29배 규모로 증가한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출간은 1776년이다. 거대한 수렴의 리처드 볼드윈은 경제사학자의 말을 빌려 영국 산업혁명의 시작 시점을 ‘1776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1739년 3.0% 수준의 이자율과 1740년 290만 파운드의 당좌예금은 영국이 산업혁명을 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자본조달 능력’은 이후 영국 해군의 전투력으로도 연결된다. 영국이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팍스-브리태니카’ 시대를 열게 되는 동력이다.
3. 농업
동양은 벼농사를 했고, 서양은 밀농사를 했다. 벼농사는 수확량이 월등해서 단위면적당 인구가 많았다. 밀농사를 하는 서양은 사람이 부족했고, 벼농사를 하는 동양은 사람이 많았다. 1760년대 산업혁명 직전, 당시 영국 인구는 1,200만 명이었고 청나라 인구는 3억 명이었다.
인구가 적은 영국은 ‘노동 절약적’ 기술 도입이 중요했고, 인구가 많은 동양은 ‘노동 집약적’ 기술이 합리적이었다. 영국은 ‘노동을 절약하는’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을 했지만, 일본과 중국은 ‘노동을 극대화하는’ 근면 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을 한다.
서양과 동양이 달라진 이유 중 ① 지리, ③ 농업에 관해서는 특히 몰랐던 부분이다. 매우 흥미로운 정리였다. 김재호 교수 역시, 유럽과 조선의 인구밀도를 비교하면서, 벼농사와 밀농사의 차이점을 말한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조선의) 인구밀도는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1600년경의 인구밀도(1㎢당 인구)는 영국 22명, 일본 32명, 조선은 50명이었다. 인구 밀도가 높다는 것은 […] 면적 대비 농업의 토지생산성이 높았다는 의미이다.
논의 생산성은 밭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다. 중세 유럽에는 밀 한 알을 뿌려서 네 알을 수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18세기 『택리지』는 볍씨 한 말을 파종하여 40–50말을 거두는 것이 보통이라고 했다. 논의 비중은 15세기 초 20% 전후에서 18세기 초 30% 정도로 늘어난다. […]
인구밀도가 높아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에 노동을 절약하기 위해 농기구나 기계의 도입을 촉진할 인센티브는 매우 약했다. 토지생산성이 높은 대신에 인구밀도가 높고 노동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에 1인당 소득, 생활 수준은 낮아지기 쉬웠다.
- 87–88쪽
중세 유럽의 인풋 대비 아웃풋을 보면, 밀 1알을 뿌리면 4알을 수확한다. 4배다. 벼는 1말을 파종하면 40–50말을 수확한다. 와우, 밀농사는 4배를 수확하는데, 벼농사는 40–50배를 수확한다. 오늘날에도 한국, 일본, 중국 사람이 ‘근면한’ 것은 유교 문화권이어서가 아니라 논농사 문화권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모두 논농사에서 파생된 높은 인구밀도+노동 집약적+근면 문화가 영향을 미쳤다.
(‘유교문화’는 결국 양반문화인데, 양반문화는 오히려 한국의 남성 가사노동이 세계에서 가장 적은 것으로 계승된다. 유교문화-양반문화는 ‘정치’에 대한 관심은 높되, ‘주리론’의 전통에 의해 현학적인 담론을 즐기고, ‘노동’과는 떨어져 있는 것으로 계승된다. 한국 엘리트 지식인이 오히려 이들의 계승자로 보인다.)
한때 조선에서도 ‘자본주의 맹아’가 있었다는 주장이 유행했다. 이후 학문적으로 영국 산업혁명의 발생에 관한 원인 분석, 서양과 동양의 비교, 같은 동양에서도 일본-중국-한국의 차이점 분석이 풍부해졌다. 새로운 연구가 풍부해지면서, 한두 가지 요인에 의해 역사의 법칙이 작동하고 조선 역시 자본주의화 되었을 것이라는 발상은 설득력을 잃는다.
설령 조선 후기에 (실제로는 아니었지만) ‘경영형 부농’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왜? ‘다른 요인’도 그만큼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김재호 교수는 조선 후기 농업과 시장경제의 발전이 갖는 의미에 ‘새로운 의미부여’를 제안한다. 매우 적절한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조선 후기의 농업과 시장경제의 발달은 자생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조건이 아니라 후발국의 공업화에 필요한 학습 역량의 축적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181쪽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맹아’와 ‘경영형 부농’은 없었다. 다만 노비제가 쇠퇴하고 소농 경영의 성장은 있었다.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온 국민 양반 되기 운동도 있었다. 이후 후발국 공업화 & 학습역량 축적의 에너지로 작용한다. 식민지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자생적’ 자본주의에 대한 허무맹랑한 미련을 버리고, 역사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은 이미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다.
역사는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문제해결 과정이다.
거듭 참으로 멋있는 표현이다.
열다섯 번째, 19세기: 위기의 시대, 민란의 시대
조선왕조의 19세기는 위기의 시대였다.
- 182쪽
위기의 원인은 ① 인구 증가와 ② 농업 생산성 하락이었다. 근본 원인은 ‘맬서스 트랩’의 작동이었다.
25대 왕이었던 철종(재위 기간 1849–1863년), 26대 왕이었던 고종(재위 기간 1863–1907년)에 이르면, 정치변란이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민란은 1811년 홍경래의 난, 1862년 진주민란, 1894년 동학농민봉기(갑오농민전쟁)이다(182–183쪽). 인구 압력이 농업 생산성 하락과 체제 위기로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인구압력 → 난방 및 화전 개간으로 나무 남벌 → 경지 부족으로 인해 저수지 안에서 농사 → 수리 시설, 산림 황폐화(공공재 파괴) → 홍수 피해 증가(+재산권 제도 미비, 관리 부실) → 토지 생산성, 농업 생산성 하락 → 국가재정 엉망진창(군사력 약화) → 환곡제도 왜곡(백성들에게 삥 뜯기)+지배층 관리들의 횡포(삼정의 문란) → 기근의 시대+민란의 시대
열여섯 번째, 개항 이후 국제-국내를 가르는 복합적 정치 구도의 전개
그동안 잘 몰랐던 부분이다. 특히 ‘러시아’와 ‘청나라’의 개입이 구한말의 주요 사건과 연결되는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됐다. 서양 대표주자와 동양 대표주자가 한판 붙은 게 1840–1842년 ‘아편전쟁’이었다. 1차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난징조약이 체결된다.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방하고, 홍콩을 영국에 넘겨준다. 1856–1860년 2차 아편전쟁이 발생한다. 1858년 톈진조약과 1860년 베이징조약이 체결된다. 이때 러시아는 베이징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는다.
이후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마주한다.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다툼에 러시아 역시 ‘무대 위에’ 등장한다.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이 중요했다. 반대로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게 중요했다. 이후 일본이 영국과 ‘반(反)러,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일본이 ‘미국’과도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이유가 된다. “적의 적은 언제나 친구”다.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은 강화도조약의 제1조였다.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됐다.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표현은 청나라를 자극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 조선은 조공-책봉 관계로 지냈다. 다만, ‘상징적’ 성격이 강했다
아편전쟁으로 얻어터진 청나라는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려는 생각을 한다. 명분만 호시탐탐 노렸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청나라는 ‘군대’를 보내 잽싸게 임오군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위안스카이가 진두지휘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부당한’ 내정간섭에 분개하여 일으킨 사건이 1884년 갑신정변이다.
일본 정부와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의 지식인들이 김옥균, 서재필 등의 ‘갑신정변 세력’을 지지했던 이유는, 갑신정변 자체가 ‘청나라를 반대하는’ 성격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19세기 말 조선의 위기 요인은 상당히 복합적-중층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소한 아래와 같은 4개의 전선이 동시에 작동했다.
- 국내적으로는 인구 압력, 생산성 하락(농업 생산성), 국가 재정 부실, 관리들의 폭정, 민란의 시대를 겪었다. 이는 1811년 홍경래의 난과 1862년 진주민란에서도 알 수 있듯 강화도조약 이전에도 발생했다. 1884년 갑오농민전쟁도 같은 맥락이다.
- 1876년 강화도 조약과 1882년 임오군란 진압 이후 중국이 강제한 불평등 조약 이후 영국, 미국, 러시아 등의 열강은 경쟁적으로 조선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다. 조선은 관세자주권의 개념이 희박했다. 외국인의 통행 범위는 최대 100리(40km)까지 인정해줬다.
- ‘상징적’ 조공-책봉 관계였던 중국이 조선에 대한, 실질적 지배를 시도하게 되었다. 이는 1884년 갑신정변과 1904–1905년 청일전쟁으로 연결된다.
- 베이징조약 이후 연해주를 할양받은 러시아의 남하(南下)로 인해, 러시아 VS. 영국의 국제적 대립 구도가 조선에서 전개된다. 일본이 영일 동맹, 미일 동맹을 맺은 이유다.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을 통해 러시아의 힘을 안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인다. 1895년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킨 이유다. 1896년 고종은 ‘위험하게도’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로 도망간다. 러시아를 선택한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인해, 영국-미국은 ‘일본’과 가까워진다. 일본은 러일 전쟁을 앞두고 1902년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는다. 영국-미국은 조선과 더더욱 멀어진다.
①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키고, ② 열강은 불평등한 개항을 요구하고, ③ 중국은 실질적 지배를 위해 정치적 내정간섭을 본격화하고, ④ 민비와 고종은 러시아와 손을 잡아 영국과 미국을 일본과 더욱 가깝도록 만들어준다. 우리가 다시 이 시기로 돌아간다면 가장 현명한 대응은 무엇이었을까? 현재까지 내가 알기로 가장 현명한 대응은 1896년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의 움직임이다.
서재필은 20살의 나이로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한다. ‘반역죄’로 몰려온 가족이 고문을 당하거나, 목을 매고 죽거나, 굶어 죽는 등 처참하게 몰살당한다. 이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서 1885–1896년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한다. 그리고 갑오개혁 이후 조선으로 돌아온다.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했던 가장 중요한 실천은 의회 설립 요구다. 당시 조선이 식민지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왕권과 의회제’가 공존하는, 입헌 군주제로 체제를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후 ‘징병제’를 도입해서 외세에 맞서기 위한, 국가 체계를 정비했어야 한다(이영훈의 『한국경제사 2』 8장에서 언급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에 가장 부합하는 실천을 했던 집단이 서재필 박사가 주도한 ‘독립협회’였다.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도 같은 문제의식의 연장이었다. 다만 입헌군주제가 성공하려면, ‘독립협회’와 ‘고종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서재필 박사도, 고종도 그럴 생각이 별로 없었다.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자’ 자격으로 갑오개혁 정권의 ‘고문’을 맡았다.
그러나 서재필은 가족을 처참하게 몰살했던 ‘고종에 대한 증오심’이 높았고,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고종과 만났을 때 철저하게 ‘미국인’ 신분으로 활동했다. 영어로만 말하고, (당시 불경스럽게 간주하던) 안경을 끼고, 짝다리를 짚고, 담배를 피우며,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한 손으로 악수했다. 고종도, 대신들도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
‘입헌군주제’는 왕권과 의회의 타협체제인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고종의 정치연합을 의미했다. 정치도, 개혁도, 혁명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서재필과 고종의 악연은 원래 어려운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17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대분기의 세계사’는 1840년 중국의 아편전쟁, 1868년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거쳐 태평양 끄트머리의 조선을 몰락시킨다. 1905년과 1910년에 고종은 자신의 목숨, 왕실에 대한 제사, 국호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게 나라를 넘겨준다.
1910년 이후 조선 왕조(이씨 왕조)는 ‘일본의 귀족’이 되어 1945년 일제의 패망 때까지, 일본 귀족이 받는 급여의 10배 이상을 받으며, 호의호식하며 ‘일본 왕실’의 일원으로 살게 된다. 1945년까지…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
「⑤ ‘제국주의적 지배’와 ‘경제 성장’의 공존」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