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한국 경제사’에 입문해보자」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넷째, 한반도의 고대는 노예제 사회였을까?
우선 한반도 역사에서 있었던 것은 노비(奴婢)다. 남자 노비가 노(奴), 여자 노비가 비(婢)다. 고대 그리스는 ‘노예제 사회’였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노예제에 기반한 전사(戰士) 민주주의였다. 그리스의 ‘시민’은 정치적 주체이자 동시에 전쟁의 주체였다.
고대 한반도는 어땠을까? 고대 한반도가 노예제 사회였는지 여부를 따지려면, 노예의 개념과 노예제 사회의 개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노예는 두 가지로 정의된다. ① 다른 사람의 ‘재산’이 된 사람(처분의 대상), ② 친족으로부터 단절된 사람(주인 뜻대로 처분이 가능하기에)이다(54–55쪽).
소유권 개념의 핵심은 처분권이다. 노비가 소유물이 되었다는 것은 판매=처분의 대상이 됐음을 의미한다. 특히 조선 시대 노비는 때려도 되고, (아무 이유 없이) 죽여도 된다. 노비는 부당함에 그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었다.
노예의 존재 여부와 그 사회를 ‘노예제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노예제 사회’의 개념 규정은 어떻게 봐야 할까? 노예제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영국의 역사학자 모제스 핀리(Moses Finley, 1912–1986)는 노예제 사회의 요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 노예가 생산활동의 주요 원천이어야 하며
- 노예제가 생산은 물론 법-정치-도덕에 이르기까지 사회 모든 측면을 규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노예제가 그 사회 전체에 ‘지배적인’ 제도여야 한다(57쪽). 결론부터 말해 고대 한반도는 ‘노예제 사회’가 아니었다. 노비가 있었던 것 자체는 팩트다. 그러나 그 규모가 많지 않았다. 1933년 일본 동대사의 정창원이라는 곳에서 「신라 촌락 문서」가 발견된다.
전체 인구 460명 중 노비는 28명(6.1%)이었다. (문서의 작성 연대는 695년, 755년, 815년으로 견해가 나뉜다. 참고로 ‘삼국 통일’은 676년이고, ‘고려 건국’은 918년이다.) 통상적으로 고대 그리스와 남북전쟁 이전 미국 흑인 노예의 경우, 노예 비중이 약 30–40%였다. 6.1%는 노예제 사회라고 하기에는 너무 낮은 비중이다(59쪽).
다섯째, 서양은 분권적 봉건제였는데 동양은 중앙 집권 국가가 된 이유
서양 중세의 경우, 봉건제, 장원제, 농노제를 특징으로 한다. 서양의 봉건제는 왕과 영주의 군사적 계약 관계다. 왕은 영주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영주는 충성 서약과 군사적인 봉사 의무를 이행한다. 봉건제는 속성상 분권적 안보체제의 성격을 갖는다. 서양의 ‘봉건제’에서 키워드는 3개다.
- 분권적 봉건제
- 군사적 계약 관계
- 토지 수여
(반면 농노제 개념은 노동 및 생산 관계를 둘러싼 개념이다. 마르크스주의적 맥락에서 서양 중세는 ‘농노제 사회’였다.)
동양 및 한국의 중세는 서양과 달랐다. ① 한국은 ‘중앙집권 국가’였다. ② 한국은 ‘관료제’가 발달했다. ③ 토지 자체를 수요한 게 아니라, 수확물을 걷을 수 있는 권리인 수조권(收租權)을 지급했다. 이데올로기적 명분 수준에 불과했지만, 토지는 모두 ‘왕의 소유’였다(왕토 사상).
김재호 교수는 197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존 힉스(John Hicks, 1904–1989)의 『경제사 이론』에 언급되는, 서양과 동양이 ‘갈라진’ 이유를 소개한다. 존 힉스 왈, 최초에는 군사적 전제주의에 기반한 명령 경제가 있었다.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가 일단락되고 ‘평시 체제’로 전환되면서, 봉건제와 관료제는 갈라진다.
군대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각 지역에서 자체 조달하는 경우에는 분권적인 봉건제가 성립한다. 반면 국가가 군사 재정을 관리하는 경우에는 관료제 사회가 성립한다. 이후 과거제 등 관료를 충원하기 위한 관리 선발 제도, 지방 관리의 토호화를 방지하기 위한 승진 제도, 관리의 부정을 감시하기 위한 감사 제도를 갖추게 된다(71–72쪽).
즉 봉건제의 가장 큰 특징은 군대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각 지역에서 자체 조달하는 것이다. 봉건제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성격은 ‘자본주의 이후’(=산업화/근대화 이후)에도 중요한 함의를 준다. 분권적 봉건제의 전통이 있는 나라들은 지방자치와 연방제를 발전시키기에 유리해진다. 재원의 자체 조달에 필요한 경제적=정치적 토대를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오늘날, 독일, 일본과 같은 나라들이 지방자치제, 연방제, 강한 중소기업이 발달한 이유와도 연결된다. 반면 한국이 지방자지체, 연방제, 강한 중소기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와도 연결된다. 서양은 ‘분권적 봉건제’로 인해, 중앙집권적인 국가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국가가 ‘경제통합’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이는 17세기 절대주의 국가(=절대왕정) 이후에나 가능했다.
서양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부재로 인해 ‘경제 통합’은 시장, 도시, 상인들의 몫이 된다. 원격지 무역을 중심으로 도시 상인들이 발달하게 되고, 그들은 봉건영주에게 ‘자치권’을 얻어낸다(72–75쪽). 봉건영주로부터 독립적인 도시 자치권의 획득. 바로 이 지점이 오늘날, 유럽에서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시민사회가 존재하게 된 역사적 기원이다.
도시 자치권의 실체는 도시 상업-공업 지역 조합(길드)이었다. 베네치아, 벨기에, 네덜란드 등 유럽을 여행하면,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넓은 광장을 만나게 된다. 사방을 메꾼 주변 건물은 대부분 15–17세기 길드=조합, 사무실이다. 15–17세기에 넓은 길드 광장의 존재는 그 지역이 도시 자치권이 강했고, ‘상공업’이 발달했음은 말해준다.
드넓은 길드 광장, 도시 자치권, 상공업 발달, 시민사회 발달은 사실상 동의어다. 즉,
- 서양은 ① 분권적 봉건제 실시 + ② 국가 발달의 지체 + ③ 시장+도시+상인+자치권 발달의 경로를 거치게 된다.
- 동양(한국)은 ① 중앙집권 국가 + ② 엘리트 관료제 + ③ 시장+도시+상인+자치권의 발달이 모두 지체된다.
오늘날 한국이 여전히 국가 주도 경향이 강하고, (유럽과 일본의 경우와 달리) 사업자 협회의 ‘자율적 통치’가 취약한 이유는 ‘역사적-체험적-경제적 토대’가 모두 취약하기 때문이다. 박근혜의 국정농단 사건 때를 복기해보면 심지어 자율성을 표방하는 ‘문화예술 단체’의 대부분도 정부의 재정 지원과 인사권 개입과 연결되어 있었다.
여섯째, 조선왕조의 건국: 단절과 연속
먼저 고려와 조선은 중앙집권 수준에서 달랐다(96–101쪽). 전국을 몇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해 통치하는 방식을 군현제(郡縣制)라고 한다. 고려와 조선은 모두 군현제를 실시했다.
고려와 조선은 군현제의 수준이 달랐다. 고려 왕조는 520여 개의 군현 중에서 지방관을 파견한 곳이 130개에 불과했다. 920여 개의 ‘별도’ 부곡제 영역이 산재했다. 고려의 중앙집권 수준은 제한적이었다. 조선 왕조는 전국을 330여 개 군현으로 나눴고, 이곳 모두에 지방관을 파견했다. 부곡제 영역은 폐지했고, 전국적-전일적인 군현제를 통해 지방을 통치했다.
고려 시대 문벌귀족과 조선을 개국한 신흥 사대부는 ‘단절’(차이점)과 ‘연속’(공통점)의 성격을 갖는다. 먼저 ‘단절(차이점)’을 살펴보자. 고려 시대 문벌귀족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수도(개경)에 거주.
- 과거에 급제하지 않아도, 음서제를 통해 자식에게 신분 세습 가능.
- 농민을 사민(私民)으로 활용하는 ‘대토지 소유자’.
- 유학보다는 ‘문장’에 관심이 많았고,
- 불교에 친화적.
반면, 조선 개국을 주도한 신흥 사대부의 특징은 달랐다.
- 지방 향촌이 주요 근거지.
- 과거제 합격해서 관리가 되어야만 ‘양반’ 진입 가능(음서제 축소, 능력 중심 과거제 실시).
- 직접적 토지 소유가 아닌, 국가로부터 수조권을 위임받음.
- 사상적으로 불교에 비판적이고, 유학(주자학)에 심취.
다음은 고려와 조선의 ‘연속성’(공통점)이다. 대표적인 연구는 존 던컨의 『조선왕조의 기원』인데, 매우 흥미롭다. (조선에 대한 놀라운 연구는 외국인의 것이 많다는 것도 놀랍다.)
- 건국 직후 태조가 책봉한 1등 공신 18명을 조사했더니, 그중 3명만 신흥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다. 나머지 15명은 ‘고려 양반 가문’이었다. 안동 권 씨, 황려 민 씨, 파평 윤 씨, 문화 유 씨 등이 ‘고려 왕조’의 주요 가문이었는데, 조선 왕조에서도 여전히 중요 가문으로 건재했다.
- 1392–1405년, (고급 관료에 해당하는) 관원 및 재추 중에 신흥 가문 비율은 10% 미만에 불과했다. (조선의 건국은 1392년이다.)
- 1430–1432년 기간, 293명의 관료 중에서 182명(62%), 48명의 재추 중에서 40명(83%)이 세습적인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 1455–1457년 기간, 337명의 관료 중에서 246명(73%), 재추 46명 중에서 44명(95.6%)이 유명한 세습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요컨대 조선 왕조의 개국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의 지배 엘리트는 강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 99–100쪽
또한 신흥 가문 비율은 10% 미만, 세습 양반 가문 비율은 62–95% 수준에 달했다.
일곱째, 양반 계급: 자격 조건, 규모, 작동 구조
우리가 현재 누리는 법 앞의 평등, 누구나 공무원 시험이 가능한 점, 누구나 선거권/피선거권을 갖는 것은 근대, 시민혁명의 산물이다. 조선 시대에는 모두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조선 시대는 신분제 사회였다. 조선의 신분제는 양반/상민/노비로 구분된다.
양반 개념의 유래를 정확히 알게 됐다. 궁중에서 조회를 할 때 국왕은 남쪽을 보고 앉았다. 국왕을 바라봤을 때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도열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양반 개념의 핵심은 국가의 현직 관료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현직 관료에 국한되지는 않았다(116–117쪽). 미야지마 히로시는 『양반』에서 양반의 자격 조건으로 4가지를 제시한다.
- 과거 합격자가 없더라도 고명한 학자를 선조로 가지고, 계보가 명확할 것.
- 수 대에 걸쳐 동일한 촌락에 집단적으로 거주해,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할 것.
- 조상 제사, 손님 접대, 학문과 자기 수양에 힘쓰는 ‘양반적’ 생활양식을 지킬 것.
- 대대로 결혼 상대를, 앞의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집단에서 선택할 것
요약하면 ① 과거 합격자 또는 고명한 학자 집단, ② 수 대에 걸친 동일 촌락 거주=세거지 형성, ③ 양반적 생활 양식, ④ 양반 집안과 결혼이라는 4가지 자격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양반’에 해당했다.
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사 1』에 의하면 조선은 정기적으로 4대조의 호구조사를 실시했던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였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어르신이 ‘조상이 누군지’ 따지고 조상 중 ‘관료 출신 여부’를 따지는 문화는 그 자체가 양반의 자격 조건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양반 신분의 특징은 3가지로 집약된다.
- ‘과거 시험 응시’가 가능했다. 다만 ‘관리 임명’은 별개의 문제였다.
- 양반은 ‘군역’을 면제받았다. 이영훈의 『한국경제사 1』에 의하면 조선의 모든 구성원은 역(役)을 부여받았다. 양반의 경우 ‘학문’의 역을 부여받았다.
- 양반은 노비를 소유할 수 있었다. ‘육체노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한국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적은데, 양반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반의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 대구에서 발견된 자료(1690년)에 의하면,
- 양반의 비율은 호(戶, 가구 수) 기준으로 9.2%, 구(口, 사람 수) 기준으로 7.4%였다.
- 상민의 비율은 호 기준으로 53.7%, 구 기준으로 49.5%였다.
- 노비의 비율은 호 기준으로 37.1%, 구 기준으로 43.1%였다.
117–119쪽은 문과 합격자 비율을 소개한다. 조선 시대 518년을 통틀어서, 문과 합격자는 1만 4,600명에 불과했다. 당시 전체 관직수는 약 5,000–6,000여 직이었다. 핵심 요직은 100여 개의 당상관을 포함해서 300개였다. 그중 가장 인정을 받았던, 지금으로 치면 행시 5급쯤에 해당하는 조선 시대 문과 합격자는 연평균 29명에 불과했다.
‘에드워드 와그너’는 문과 합격자 1만 4,600명의 가문을 조사했다. 조선 시대 후기로 갈수록 소수 가문에 문과 합격자가 집중됐다.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은 총 650개였다. 36개 가문이 합격자의 53%를 차지했다. 과거 제도 그 자체는 모든 양반에게 개방되었고, ‘능력 중심 인재 채용’을 표방했다. 실제로는 과거제도 그 자체가 기존의 양반 신분을 유지하고, 신규 진입을 막는 진입 장벽 역할을 했다(119쪽).
지방에서는 오랫동안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했지만, 양반적 생활 양식, 토지와 노비 소유 등을 통해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가문도 많아졌다. 양반은 능력으로 선발된 관료적 성격과 혈연에 기초한 귀족적 성격을 동시에 갖게 된다. 1858년 대구 호적을 기준으로, 양반의 90%가 노비를 소유했다. 같은 자료의 경우 노비 인구는 전체 31.3% 비중이다(120–121쪽).
여덟째, 조선 시대 노비: 규모, 지위, 증가 요인, 종류, 변화
조선은 ‘양반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노비의 나라’였다. 특히 세종 이후부터 병자호란(1636년) 시기까지는 노비제의 전성기였다.
1. 조선 시대 노비의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
15–17세기, 조선 시대 전체 인구의 30–40%가 노비였다. 영남, 호남의 남부 지방은 그 비율이 더 높았다. 노비 규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 대량으로 발굴되는 호적 자료들 덕분이다. (‘호적’은 군역[軍役]을 부담시키기 위해 국가가 취합한 자료다.)
1609년 울산의 호적 자료에 의하면, 47%가 노비였다. 1606년 단성(경남 산청?)은 무려 64%가 노비였다. 노비 규모는 한반도 전역으로 보면 30–40% 규모였고, 남쪽(남한) 지역만 보면 50% 규모였다(123쪽). 현재까지 전하는 상속 문서 중에서 가장 많은 노비를 상속한 사람은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이맹현(1494년)이다. 노비 757명을 자녀에게 상속했다(124쪽). 퇴계 이황도 다섯 자녀에게 모두 367명의 노비를 상속했다.
2. 노비의 지위는 어땠을까?
노비는 ‘노예’와 같았다. 노비는 토지와 마찬가지로 상속 및 매매의 대상이었다. 노비는 상속 및 매매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자식이 생겨도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노비는 주인이 마음대로 죽여도 되고, 때려도 되고, 팔아도 되는 대상이다. ‘재산’에 불과한 존재였다. 노비에게 일체의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3. 어떤 제도적 차이가 노비제의 급증을 초래했을까?
이영훈의 『한국경제사 1』에 의하면, 고려 시대까지 노비 규모는 5% 내외였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40% 규모로 급증하게 된다. 어떤 제도적 차이가 노비제의 급증을 초래했을까? 3가지 이유 때문이다.
- 첫째, 고려 시대에는 노비와 양민의 결혼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결혼하면 강제로 분리했다. ‘노비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 둘째, 고려 시대에는 노비와 양민 사이에 낳은 자식은 ‘양민’으로 인정했다. 노비 확산은 억제되었다.
- 셋째, 고려 시대에는 ‘주인의 불법행위에 대해’ 노비가 신고를 할 수 있었다. ‘불교의 평등주의’ 사상이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조선 초기 세종 때를 기점으로 3가지 모두 바뀌게 된다. 노비와 양민의 결혼을 허용했다. 그 자식은 모두 노비가 됐다. 주인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신고가 금지됐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강화됐다.
4. 노비의 유형은 어땠을까?
노비 유형은 크게 두 종류이다. 집 근처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노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물을 납부하는’ 노비가 있었다. 전자(前者)를 솔거노비+입역노비라고 했다. 후자(後者)를 외거노비+납공노비라고 했다. 솔거/외거는 ‘공간’에 따른 구분이고, 입역/납공 노비는 ‘역할’에 따른 구분이다.
집 내부 입역노비는 통상 30명 내외였다. 나머지는 전부 납공노비였다. 예컨대, 위에서 언급한 이맹현의 상속 노비가 757명이고, 퇴계 이황의 상속 노비가 367명이었는데, 이들 역시 30명 내외가 ‘솔거노비/입역노비’였고, 나머지 330–740명 내외는 ‘외거노비/납공노비’였다.
5. 조선 시대, 노비 신분을 벗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경국대전』(1485년)에 노비의 공정 가격을 정해놨다. (행정적 편의를 위해 도입한) 저화(楮貨) 기준 4,000장이었다. 이는 쌀 20석=면포 40필=100냥=말 1마리=660일의 노동일과 같은 가치였다. 1년에 365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660일’의 가치를 환산할 수는 없었다.
노비 신분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도망가는 것이었다. 세조 시대, 한명회(1415–1487)에 따르면 도망 노비가 100만 명 규모였다고 한다.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는 570–940만 명(중간값 75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당시 전체 노비 인구는 (40% 적용시) 300만 명이었다.
즉 전체 인구 중 13%가 도망 노비였고, 노비 인구 중 33%가 도망노 비였다. 즉, 노비 3명 중 1명은 도망 노비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다. 〈추노(追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도망 노비를 추적하는 자들이었다. 이영훈 교수는 노비 확산에 기여한 세종을 비판하고, 추노(追奴)를 금지했던 영조를 높이 평가한다.
6. 18세기가 되면서 노비는 줄어든다.
제도 변화와 함께, 수요-공급의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노비 가격은 폭락하여 공정가격의 1/10에 불과한 10냥 전후가 된다. 18세기 노비제 감소의 원인은 첫째, 노비에게도 군역이 부과된다. 둘째, ‘영조’에 의해 추노(追奴) 행위가 제한된다. 셋째, ‘노비제’를 대체하는 소농경영에 기초한, 지주-소작제가 확대된다. 넷째, 1730년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 어머니 쪽 신분을 따르도록 노비법이 완화된다. 이 역시 ‘영조’의 업적이다.
이러한 노비 감소는 호적 자료에서도 실증적으로 확인된다. 대구의 경우, 1690년 (전체 인구 대비) 43.1%였던 노비 숫자가 1789년 15.9%로 줄어든다(128쪽). 조선 후기 김득신(1754–1822)의 풍속화인 〈노상알현도〉를 보면, 양반이 지나갈 때 120도 각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한다. 허리를 꺾어 인사하는 사람은 ‘노비’이다.
비록 노비의 비중은 줄었어도, 18세기 말–19세기 초반까지 ‘노비제’와 ‘신분제’가 굳건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
「③ 조선, ‘인구의 25%가 굶어 죽는’ 나라」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