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칼 맑스 책을 매우 재밌게 봤다. 맑스의 저작 대부분은 ‘경제적 변화’에 입각해서, 사회-정치-이데올로기적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맑스 방법론의 핵심인 역사 유물론의 특징이기도 하다. 내가 경제사를 좋아하게 된 계기다. 그러나 한국 경제사에 관해서는 공부했던 것이 없었다.
서양의 봉건제, 장원제, 농노제의 작동방식을 알고 도시경제와 길드가 사업자 협회와 노동조합의 모태가 된 것을 아는 상태에서 한국에서는 어땠는지 다양한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맑스를 통해 경제사를 공부한 이래, 의문은 있었지만, ‘적당한 교재’를 몰라 미뤄뒀던 과제였다. (‘한국 경제사’에 관해 볼만한 책이 있으면 추천 부탁드린다.)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를 통해 드디어 ‘의문’의 상당 부분을 풀게 됐다.
맑스주의가 사회과학에서 오랜 세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유 중 하나는 ‘현실의 제도’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국가, 노사관계, 계급-계층, 기업, 법, 관료, 가족 등이다. 반면 교과서 경제학은 시장/가격기구를 중심으로 설명할 뿐이었다. 그러나 제도주의 경제학이 등장하면서 이런 흐름은 바뀐다.
1991년 거래비용 개념과 소유권 획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로널드 코즈, 1992년 사회학에 경제이론을 적용한 게리 베커, 1993년 경제학적 분석으로 경제사를 설명한 더글라스 노스가 노벨경제학상을 탄다. 1991–1993년에 수상한 3명 모두 넓게 보면 제도주의 경제학의 테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 경제학은 정보, 공공재, 인센티브, 재산권, 거래비용 등의 ‘미시적인’ 개념들로 재무장하고, ‘거시적인’ 제도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전통적으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이 다루던 이슈들을 다루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경쟁’에 뛰어든다. (*나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퇴조에는 ‘제도주의 경제학’의 부상이 큰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간의 맥락을 고려할 때, 우리가 ‘한국 경제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축은 ‘서양’과 ‘한국’을 비교해야 하고, 다른 한 축은 경제사의 전통적 쟁점들을 어떻게 이해할지의 문제이다. 전통적 쟁점이라면, 농업, 국가, 소유권, 상업, 농노, 노예, 도시, 시장, 생산, 지배 엘리트 등이다.
그런데 한국 경제사도 알고, 정치경제학도 알고, 제도주의 경제학의 흐름도 꾸준히 추적했던 그룹이 있었다. ‘낙성대경제연구소’이다. 이영훈 교수, 김낙년 교수가 가장 많이 알려졌지만,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의 저자 김재호 교수도 낙성대경제연구소의 멤버다.
한국 경제사와 관련해 차명수 교수의 『기아와 기적의 기원: 한국 경제사 1700–2010』(해남)와 한국 경제사 3000년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영훈 교수의 『한국 경제사 1, 2』(일조각) 역시 아주 좋은 책이다. 두 권 모두 감탄하며 봤다. 그러나 분량이 만만치 않다. 차명수 교수 책은 500쪽, 이영훈 교수 책은 두 권 합계 1,270쪽이다. (『한국 경제사 1, 2』는 틈틈이 보는 중이다.)
반면 김재호 교수의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는 한국 경제신문에 ‘청소년용’으로 연재했던 글을 엮었다. 제목은 ‘한국사’이지만, 내용은 ‘한국 경제사’다. ① 서양과 한국의 비교, ② 전통적인 쟁점을 다루되, 제도주의 경제학의 최근 성과물 ③ 한국 경제사에 관한 ‘새로운 팩트’가 곳곳에 녹아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국 경제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낯선 용어에 ‘해설’을 붙여주고 ‘중심 주제’를 두고 선택과 집중을 더욱 분명하게 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양안(量案)’은 토지대장으로 설명을 붙여주고, 군현제(郡縣制)의 뜻은 무엇인지, 봉건제(封建制)의 뜻은 무엇인지, 많이 중요하게 사용되는 용어는 죄다 설명을 붙여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대중서’ 취지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친절한 ‘용어 설명’과 중심주제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보완하는 수정 증보판을 낸다면, 한국 경제사에 대한 대표적인 대중 교양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량은 에필로그 포함 380쪽이다. 총 4부, 36편의 글로 구성되었다. 1개당 분량은 짧은 편이다. A4 용지로 3–4쪽 내외다. 서론을 제외하면 ① 고대–고려 8편, ② 조선 시대 13편, ③ 개항(강화도 조약)–일제시대 10편 (+해방 이후 2편)의 체계로 이뤄졌다. 제도주의 경제학의 성과물을 반영하되 맑스주의 경제사학과 대결하는 통사(通史) 수준의 경제사는 처음 본 셈이다. 정말, 정말 흥미롭게 봤다.
내용이 흥미로운 것들이 많아서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요점정리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뽑아본 ‘관전 포인트’는 21개이다. 분량이 많아질 것이기에, 6회에 걸쳐 나눠서 올릴 예정이다. 지금 이 글은 ①–③까지를 다룰 예정이다.
첫째, 맬서스 트랩과 근대적 경제성장 개념의 이해
맬서스의 『인구론』은 1798년에 출간됐다. 맬서스는 식량 증가는 산술적인데 인구증가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인구 증가는 ‘빈곤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영국에서 시행되던 구빈법 등을 반대했다. 맬서스 주장은 ‘비윤리적’ 느낌마저 준다. 불행하게도 경제사에서 맬서스 주장은 ‘팩트’로 인정된다. 실제의 경제사에서 인구증가와 경제성장 증가는 동시에 나타나지 못하고 ‘반비례’ 관계로 작동했다.
이를 ‘맬서스 트랩’(맬서스 함정)이라고 한다. 맬서스 함정 개념의 핵심은 “인구증가와 지속적 경제성장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근대적 경제성장 개념은 “맬서스 함정을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근대적 경제성장’은 GDP 개념을 발명한 사이먼 쿠즈네츠가 사용한 개념으로 “인구 증가와 경제성장이 장기간에 걸쳐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맬서스 함정과 근대적 경제성장의 특징을 하나의 그래프로 보여주는 게 아래 그래프다.
근대 이전 사회의 통계 만들기에 평생을 바친 앙구스 메디슨(Angus Maddison)의 조사에 의하면, 1990년 달러 가치 기준, 전 세계 1인당 GDP는 •서기 1년 467달러 •1000년 450달러 •1500년 567달러였다. 서기(AD) 1년(467달러) 소득 수준과 1500년 때(=567달러) 소득수준이 비슷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바뀌기 시작한다. •1820년 667달러 •1870년 873달러 •1913년 1,526달러가 된다(26–27쪽). 인구증가율은 어땠을까? 매디슨의 추계에 의하면, 1000년–1500년 세계 전체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0.1%였다. 산업화 이후 1950년–1973년 기간 1.93%로 급증했다.
인구 대비 성장률을 의미하는 1인당 GDP는 1000–1820년까지는 연평균 0.05%에 불과했다. 산업화 이후인 1870–1913년에는 1.3%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인구는 19배 증가했고, 1인당 GDP는 26배 증가했다.
사이먼 쿠즈네츠가 말한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이 동시에 나타나는 근대적 경제성장이 본격화되었다(34쪽). 근대적 경제성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면사 1파운드’ 생산하는 데 걸린 시간의 단축을 보여주는 대목이 흥미롭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생산성 혁신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보여준다.
‘면사 1파운드’를 생산하는 시간은, 산업혁명 이전(1770년대 이전) 500시간 → 뮬 방적기 발명 이후 20시간(1779년) → 1785년 10시간 → 1795년 3시간 → 1825년 1시간 23분 →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 20분으로 단축됐다. 1770년대 500시간 걸렸는데, 약 140년이 지난 1914년에는 20분으로 단축됐다. 생산력 수준이 25배로 향상됐다. 근대적 경제성장의 파워이다.
둘째, ‘농업’이 ‘수렵채집’에 비해 대세(大勢)가 된 이유
이 부분도 참으로 재미있었다. 경제사에서 시기 구분을 할 경우, 경계가 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농업의 시작과 산업혁명이다. 시기 구분은 ① 수렵 채집 사회, ② 농업 사회, ③ 산업화 사회가 된다.
인류 역사에서 ‘농업’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기원전 8,000년)에 출현한다. 이 시기를 신석기 혁명이라 한다. 농업 혁명=신석기 혁명은 사실상 같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3,000년 전에 조, 기장, 피와 같은 잡곡을 재배했고, 기원전 1,000년 전부터 벼농사가 시작됐다. 흥미로운 부분은 수렵-채집 사회가 농업 사회로 바뀌는 과정이다. 신석기 시대가 청동기 시대로 바뀌는 것과 같고, 빗살무늬 토기인이 몰락하고 민무늬 토기인으로 바뀌는 것과 같다.
신석기=빗살무늬 토기인=수렵채집 생활인들은 하천이나 해안 주변에서 물고기 및 조개를 잡거나, 식물의 열매를 채취했다. 청동기=민무늬 토기인=농업 생활인들은 내륙에 위치한 구릉 지대에서 거주했다.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서 빗살무늬 토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민무늬 토기로 대체된다. 빗살무늬 토기를 쓰던 사람들이 ‘몰락’했음을 암시한다(41쪽).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농업 기술이 수렵 채집 사회에 비해, 왜 대세가 됐는지이다. 농업은 수렵채집에 비해 노동투입량 대비 칼로리가 높다고 보기 어렵다. 수렵-채집인들이 농경인에 비해 ‘더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는 증거도 많다. 그럼에도 농업이 ‘대세’가 됐다. 왜? 결론부터 말해 전쟁 때문이었다.
농업이 전쟁에 더 유리한 산업이었다. ‘농업사회’의 등장 이후, 최초의 순간부터, 산업의 특성, 전쟁(폭력 수단), 소유권, 인구 규모는 서로 맞물려 작동됐다. 수렵-채집은 소규모 가족이 무리를 이루고, 이동하는 경제였다. 돌봄이 필요한 ‘어린아이’를 부양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인구 제약이 작동했다. 수렵-채집, 이동경제에서는 인구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지 않았다.
농업은 달랐다. 정착 경제였다. 재배한 토지와 수확물을 외부의 약탈로부터 지킬 필요성이 생겼다. 외부인의 접근을 배제하는 배타적 공동소유의 재산권이 발달한다. 정착이 오래되면 경지 개간 등이 이뤄져 토지에 대한 투자와 기술진보가 발생한다. 토지생산성-농업생산성이 향상된다.
생산 증가로 ‘잉여’가 생기면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의 부양이 가능해진다. 분업이 확대되고, 전문화가 가능해진다. 무기 제작과 군사 기술에도 유리해진다. 폭력의 결사체인 국가의 탄생이 가능해진다. 수렵-채집 공동체와 농업 공동체가 서로 전쟁을 할 경우 인구 규모와 군사력 등에서 농업 공동체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즉 농업은 ‘경제적 합리성’ 때문에 수렵-채집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게 아니었다. 농업의 승리는 ‘군사적 합리성’ 때문이었다(39–45쪽). 개인적으로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농업의 주류화, 인구 규모 확대, 공동체끼리의 전쟁, 소유권 관념의 발달, 국가의 탄생이 동시에 발생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사에서도 유적을 통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책 내용을 인용해보자.
실제로 청동기 시대에 전쟁이 많았음은 유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청동기 시대 유적인 충남 부여 송국리 취락유적은 주변에 하천이 흐르는 높이 30미터 전후의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신석시 시대 취락과는 달리 여러 채의 움집을 도랑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태세를 갖췄다. 농기구 외에 청동이나 돌로 된 칼, 돌도끼, 화살 등의 무기가 함께 출토됐으며 불탄 흔적도 발견되어 전쟁이 빈번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 44–45쪽
흔히 국가의 중요 임무를 안보와 경제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안보와 경제가 한 덩어리였던 것은 1만 년 전 ‘농업의 탄생’ 때도 같은 원리였다. 심지어, 산업(농업)=공동체=국가는 ‘함께’ 탄생했다.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라, ‘군사적 합리성’에 의해 좌우됐다.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됐다.
이후 농업사회는 ‘토지이용/휴경 방식’을 기준으로 발전 단계를 달리했다. 구분의 변별점은 경작지를 ‘몇 년 쉬게’ 하는지이다. ① 장기 휴경(15–25년/신석기 시대) → ② 중기 휴경(5–10년/청동기 시대) → ③ 단기 휴경(1–2년/철기 시대/삼국 시대 이후) → ④ 연작(고려 말 이후/현재까지) 발전 과정을 거친다.
셋째, 고대사에서 국가의 탄생 및 역할: 한국 버전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발명’은 국가이다.
- 46쪽
흥미로운 표현이다. 국가 탄생의 필요성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농업의 시작 이후, 토지와 물 이용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한다. 수리 시설의 건설과 관리와 같은 소규모 집단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공공재적 사안이 발생한다.
- 대외적 공격으로부터 공동체를 방어할 필요가 생긴다(=전쟁=안보=폭력 독점).
- 사회 구성원 간의 사적인 폭력 행사를 제한해서 질서를 수립할 필요성.
이러한 정리에 의하면, 시대를 초월한 국가의 기본 임무는 3가지가 된다.
- 군사적 폭력 독점
- 조세 납부의 강제
- 사회적 분쟁 조정 및 질서 유지
한반도에서 국가의 탄생 및 발전 과정은 어땠을까? 한반도에서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인데 기원전 8세기에 세워졌다. 한반도 중남부의 경우, 기원전 2세기에 진국(辰國)이 세워졌다. 그 뒤를 이어 기원후 1세기 초, 삼한이 세워졌다. 삼한은 78개 소국이었는데,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이다.
소국(小國)의 규모가 흥미롭다. 소국은 큰 경우 1만 호, 평균 2,000–3,000호 정도의 주민을 지배했다. 2,000호에서 1만 호면 지금 기준으로 구의원(기초의원)의 관할 범위보다 작았다. 소국의 형태적 특징에 주목해 성읍국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성읍국가끼리 연맹체를 이루고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성립된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한반도에서 ‘삼국시대의 등장’은 중국에 있던, 주변 국가의 정치지형 변화와 연결됐다.
(한반도에서 삼국시대의 등장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군현을 설치했던 한(漢) 제국이 기원후 220년에 망하고, 위진남북조(220–581)의 대분열 시대로 접어듦에 따라, 중국 영향력이 약화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 48쪽
한(漢) 제국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직접 통치를 위해 군현을 설치했다. 그런데 오래가지 못하고 기원후 220년에 망해버렸다. 중국의 대분열이 있었기에 한반도의 삼국시대가 가능했다. 국가 간 잦은 전쟁을 겪던, 초기 국가는 권리/의무 관계가 지역마다 달랐다. 통일성이 떨어졌다. 국가는 전쟁, 왕권, 관료제를 통해 균등한 권리/의무 관계가 적용되는 체제를 만들어낸다.
그 지표가 삼국의 율령 반포다. 고구려 373년(소수림왕 3년), 신라 520년(법흥왕 7년), 백제는 3–4세기 경이다. 예전에 국사 교과서를 공부할 때, 삼국의 윤령 반포가 시험문제에 출제됐던 이유다. 이를테면 (통일적·균질적 지배라는 의미에서) ‘국가다운 국가’의 기준점이 율령 반포였다. 통일 신라는 전국을 9주(州)로 나누고, 약 420개소의 군-현을 설치함으로서(685년, 신문왕 5년) ‘중앙집권 국가’의 형태를 갖춘다(48–49쪽).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
「② 조선, ‘인구의 30–40%’가 노비인 사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