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비극에 애도를 표한다. 부디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
세월호 사건으로 평소보다 더 빠르게 흘러가는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눈에 띈 위근우(@guevara_99)님의 트윗이다.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비약적으로 많아졌는데, 왜 진실에 대한 접근은 더 어려워지는 기분일까.
이번 참사와 관련해서 내가 느끼는 것도 같다. 뉴스가 정말 많지만,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쉽게 믿을 수 있었던 뉴스들이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고, 뉴스와 배치되는 소셜 네트워크의 정보들이 추가되면서 무엇이 진실인지 알기가 정말 힘들다. 결국 뉴스라는 것도 누군가 전해주는 이야기일 뿐인데, 그동안 어떻게 뉴스를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걸까?
외신의 힘: 매체를 믿고 보기
나는 소스의 신뢰도를 기반으로 뉴스를 믿는다. 신뢰도의 기준으로는 기사의 근거가 되는 정보원이 될 수도 있고, 뉴스를 소개하는 매체 자체가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두 가지 모두가 적절하게 믿을만할 때 뉴스를 신뢰한다. 정보원의 신뢰도는 그 사람이 어떤 경력을 가지고 있는지, 전문분야가 무엇인지 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보원의 신뢰도를 개인이 확인하고 판단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래서 정보원이 믿을만한 사람인지는 매체에 위임해버린다. 결국 뉴스를 소비할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매체의 신뢰도다. 물론 이 역시 한계가 있어서 기자를 살펴보는 게 좋지만, 대다수의 독자에게 이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매체의 신뢰도는 평소 그 매체에서 보도한 뉴스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오보가 거의 없거나, 정정보도를 확실히 하고, 기사의 사실관계가 분명한 경우가 많으면 그 매체의 신뢰도는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외신의 경우 뉴욕타임즈, 월스트리트저널, 파이낸셜 타임즈, 이코노미스트 같은 매체들이 대표적인 믿을만한 매체들이다.객관적인 사실을 원한다면 통신사인 AP도 괜찮다.
이 매체들에서 나오는 모든 기사를 믿을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 매체를 통해 나오는 기사들은 꽤나 높은 확률로 신뢰할 수 있다.
반면 국내 언론에서 믿을만한 매체는 많지 않다. 종이 신문이라면 다르겠지만, 주요 일간지 닷컴 언론과 인터넷 매체의 신뢰도를 비교할 때, 어느쪽이 더 믿을만하다고 자신있게 말하기 힘들다. 트래픽을 위해 기사를 올렸다가 내리는 일을 일삼는 몇몇 인터넷 신문과 다른 언론사의 기사를 그대로 베껴쓰는 주요 일간지의 신뢰도를 사람들이 크게 다르게 생각할리 없다.
세월호 참사의 혼란을 키운 국내 언론사
국내 언론에서는 신뢰할 매체가 없다는 것은 특히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해 더 극적으로 나타났다.
MBN의 홍가혜 인터뷰는 이런 문제를 잘 보여준다.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홍가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신뢰할만한 정보원이라는 것을 MBN이라는 매체가 보장한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뉴스를 믿는다. 이 경우 부족한 정보원의 신뢰도를 매체가 채워줘야 하지만, MBN은 아주 잘못된 인터뷰이를 선정했고, 덕분에 매체 자체의 신뢰도가 인터뷰이 수준으로 떨어졌다.
또한 선정적으로 비극을 소비하는 언론들을 보며 대중은 더욱 뉴스를 믿기 힘들게 됐다. 국가적인 참사 앞에서 사실 관계를 확실히 해 혼란을 줄이려고 하기보다는 트래픽만을 쫓는데, 그 모습을 보고 ’신뢰’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는 힘들다.
언론이 믿을만한 사실 전달이라는 기본적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제보지만, 사실 이는 더욱 믿기 힘든 정보다. 정보를 제공하는 개인을 믿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는 ‘카더라’ 수준 이상이 될 수 없으며, 홍가혜 인터뷰와 신뢰도 측면에서 크게 다를바가 없다. 실제로 카카오톡을 통해 생존자에게 받았다는 메시지는 허위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카더라’ 수준의 소셜 네트워크 정보를 그대로 보도하고 거기에 매체의 신뢰도를 덧씌우는 짓을 한 언론사들은 스스로의 신뢰도를 이미 ‘카더라’ 수준으로 격하시킨 셈이다.
불신의 시대: 한국 언론의 비극
이렇게 믿을만한 매체가 없는 상황에서 떠오른 것이 디스패치의 “불신은 어떻게 시작됐나?”…실종자 가족의 48시간이라는 기사다. 이 기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믿을만한 기사로 평가됐지만, 사실 이 기사를 믿어야 한다는 것부터가 얼마나 국내에 믿을만한 언론이 없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타블로이드 연예 전문지에서 탐사보도라고 쓴 기사를 믿어야 하는 게, 한국 언론의 현주소다. (물론 이는 그간 선정적일지언정 팩트를 지켜 온 브랜딩의 힘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내가 언론 매체를 믿는건 기사를 쓰는 기자의 자부심을 신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기자가 아니지만, 기자의 자부심은 가치 있는 일을 올바르게 보도했을 때 채워지지 않을까 싶다. 아래는 저널리스트에게 최고의 영예인 퓰리쳐 상과 관련해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된 글이다. 저널리스트로서 워싱턴 포스트에서 1963년부터 올해 2월까지 근무한 Robert G. Kaiser가 썼다. (요약 번역: 뉴스페퍼민트)
신문 저널리즘은 특별히 보수를 잘 주진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들이 읽는 기사의 꼭대기에 있는 바이라인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보도를 하고 기사를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기자의 소명이다. 너무 자주 현직 저널리스트들이 정당하지 않은 보수를 받으며 숭고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에 굴복해버리는 것 같다. 대부분의 저널리스트들은 그들 자신의 허영심을 무시하고 잊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널리즘은 커다란 자기 도취의 직업이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사촌이나 이웃이 인상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사랑한다. 대부분의 직업들은, 심지어 어마어마한 봉급을 받는 직업일지라도, 명성이나 악명을 주진 않는다. 저널리스트들이 그것에 대해서 많이 말하진 않지만, 저널리스트들은 그들이 하는 일 때문에 받는 관심 위에서 보람을 느낀다. (원문)
아마 이번 세월호 사건이 일단락되면 다시 한번 언론계에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21년 전 서해 훼리호 사건에서 그랬던것처럼, 말뿐인 반성이 되지 않아야한다. 반성을 통해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사람들은 자부심을 갖고 정확한 사실을 보도해 줄 저널리스트를 원한다. 그리고 그런 저널리스트들을 보면서 매체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뉴스를 믿을 것이다.
valentino shoesDIY your best whites for Memorial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