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한국 만화는 진정으로 위기인가?”를 통해 한국 만화 위기론은 일본식 잡지 만화체제에 국한된 이야기며, 웹툰 등의 디지털 만화는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또 “왜 일본 만화는 훌륭한가?”에서는 일본에서 만화가 가지는 위상과 엄청나게 많은 인적자원 규모, 그리고 그것을 양성하는 편집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한국과 일본의 만화 시장의 차이
두 번째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일본식 잡지 만화 체제의 핵심은 인력풀의 대규모 운용과 인원의 대규모/축차 투입 구조라는 점이다. 필자는 평소 이 부분에 주목해 왔다. 한국과 일본의 만화 시스템의 가장 큰 차이는 인력풀을 대대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그들을 만화산업에 투입할 수 있는 체제의 유무이다.
이에 사람들은 이렇게 많이 묻는다.
- 패턴 1: 그렇다면, 우리도 편집자를 많이 준비해서 작가들을 많이 육성해서 투입하고 경쟁시키는 일본식 만화 체제를 갖추어서 경쟁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 패턴 2: 지금은 그저 (편집자가 아닌) 관리자에 가까운 포털 웹툰체제에 일본식 편집, 육성 체제가 갖춰져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아니다. 10년간 일본의 편집부 최전선에서 작가 소개, 스케줄 관리, 콘티 제작, 애니메이션 제작과 홍보, 잡지의 창간과 판매, 단행본 홍보와 판매 등등의 일에 참여해보고, 일선 영업사원부터 거대 출판사의 이사들에까지 인터뷰해본 결론은 이렇다. 아주 안정적인 시장에 기반을 둔 일본 체제는 아주 유동적인 한국시장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좀 뒤로 미루고 자주 듣는 3번째 패턴의 질문을 좀 말해보자. 여기서 풀어나가는 게 좀 재미있어 보인다.
- 패턴 3: 그렇게 여건이 틀린데,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기의 한국에서 일본식 잡지 만화가 그렇게 번성했던 이유가 뭡니까? 인적자원 풀 자체가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일본식 잡지 자체를 꾸릴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던 게 아닌가요?
이런 수준 높은 질문에 “그때야 『드래곤 볼』이나 『슬램덩크』 같은 일본 킬러 콘텐츠가 있었으니 가능했지” 이렇게 단순한 답을 내던지는 건 좀 아쉽다. 일단 한국에 잡지체제가 등장할 때 상황을 좀 보자.
만화방을 토대로 한 만화공장의 성업
필자는 한국에서 일본식의 주간 만화잡지 체제가 본격적으로 들어서는 때를 1989년 『서울 문화사』가 『아이큐 점프』를 창간했을 때로 본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텔레비전에 당대 유명 개그맨인 전유성 씨의 광고가 방영되고 엄청난 액수의 경품이 걸리는 등으로 꽤 공격적인 창간이었다.
이전 1980년대의 한국 만화계에는 이른바 ‘일판 만화’로 대변되는 만화방용 공장만화 체제가 주력체제로 들어서 있었다. 지금 젊은 세대분들은 좀 낯설지 모르겠는데, 10여 평 안팎의 가게에 들어가면 벽면에 만화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고 비치된 소파에 앉아서 시간당 혹은 권당 얼마씩의 요금을 지불하고 만화책을 열람하는 형태였다.[1]
만화 가게 운영주 입장에서는 손님들이 끊임없이 가게에 오기를 원했다. 가장 좋은 상품은 빠른 손님 회전율을 위해서 다음 권이 나오는 텀이 짧은 만화, 수십 권을 찍어낼 수 있는 장편 만화였다. 예로 고 박봉성 선생의 만화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는 무려 140권(더구나 아직 완결이 아니다!!!)에 달한다. 어떤 모 작가분은 당시 정부에 심의를 요청한 만화 권수가 1년에 400권을 넘기기도 했다. 즉 하루에 한 권 이상의 만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제작 속도를 내는 게 가능했던 것은 만화 생산에서 철저한 분업체제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명 만화가의 밑에는 ABCD… 순으로 다수의 제작팀이 존재했다. 개중에는 80여 명의 인력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2] 스토리도 당연히 스토리 제작팀에게 외주를 주고받아 제작, 운영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생성된 인원을 수직 형태의 보수적인 구조에서 다 만화가로 받아들여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이더라도, 유명 작가의 밑에서 오랜 시간 데생맨[3] 등 팀장으로 활동하지 않으면 독립해 작가가 되기 어려웠다.
만화잡지 체제를 뒷받침한 두 신흥 작가군
이 시스템에서 만화적인 테크닉은 이미 갖추었으나, 다른 활로를 찾던 사람들이 새로 만들어진 잡지 체제에 몰렸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작가분이 『소마신화 전기』로 한국 만화 잡지의 스타로 등장하는 양경일, 『검빵맨』으로 개그만화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최미르 씨다.
그리고 또 하나, 당시 잡지 만화 초창기에는 세력 중에는 1980년대부터 한국에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비디오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직접 접했거나,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이나 중국 대사관 앞 외국어 서점들, 부산의 보수동 일본어 서점들을 통해서 유통되는 일본 만화 원서들을 통해서 일본 만화를 학습한 사람들[4]이 등장했다.
제5공화국 정권의 무역자율화 등의 사회 분위기를 타고 여러 루트로 건너온 이 문화 상품들은, 만화방 만화나 보물섬과 같은 월간 만화잡지의 한국 만화들보다 한층 높은 성적/폭력표현과 수준 높은 작화, 심층적 스토리로 무장하고 있었다.[5]
이런 작품들이 어린 시절부터 컬러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청과 만화 소비에 익숙한 상태에서 성장해, 사춘기에 이전에 본 것과는 또 다른 작품들을 원하던 청소년층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이들은 막 보급되기 시작한 PC 통신 등을 통해 정보를 교류하며 서울의 ‘그래피티’ ‘해오름’, 대구의 ‘한울타리’, 부산의 ‘태극’과 같은 아마추어 만화 동아리[6]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주된 활동은 애니메이션 상영회, 일러스트레이션/동인지 전시 판매전, 아마추어 서클지 제작이었다.
특히 이들이 만드는 아마추어 서클 동인지는 지금의 동인지와는 성격이 달라, 데뷔하기 전의 작가 아마추어 지망생들이 본격적인 스토리물 만화 제작을 연습하기에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아마추어 만화 동인지 시장(?)에서 등장한 유명작가로는 한국 만화계에 신세대 작가군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린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의 이명진 씨, 약관 중학생의 나이로 데뷔한 『배틀 하이랜더』의 손희준 씨, 판타지 만화라는 새로운 비주얼 방향과 캐릭터 구현에 일대 충격 가하는 『8용신 전설』의 작가 박성우 씨가 있다.
대본소를 위한 만화공장 시스템의 어시, 일찍부터 일본 만화를 받아들이고 동아리 문화를 형성한 이들. 이런 두 가지 루트를 통해 일본식의 작가 대량 육성 체제가 미처 갖춰지지 않았는데도, 초기 작가군이 충원될 수 있었다.
한국의 만화잡지가 처음부터 3~4명의 적은 인원으로 출발하면서도, 2개 정도의 일본만화를 제외한 지면 대부분을 한국의 작가로 충원할 수 있었던 것은 자발적으로 새로운 경향의 만화를 학습한 이들 두 가지 세력 작가군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만화잡지 황금기 시대의 도래
1990년대 초기 《아이큐 점프》(서울문화사), 《소년 챔프》(대원), 《찬스》(학산 문화사) 이 세 잡지는 이렇게 이미 존재하던 작가 예비군 인력을 흡수해 1990년대 중반까지 순조롭게 잡지를 꾸려갈 수 있었다. 여기에 1990년대 초반의 『드래곤 볼』, 『슬램덩크』와 같은 일본 직수입만화의 대대적 히트는 《영 챔프》, 《영 점프》 같은 일본의 청년잡지를 모델로 한 고연령층 잡지를 속속 내놓는 것으로 이어졌고 한국 잡지 만화는 전성기를 누렸다.
1990년대 초 잡지 전성기 시절의 만화잡지사들의 호경기는 대단한 것이었다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모 대형 출판사는 호텔 큰 홀을 빌리고 연예인을 게스트로 불러서 작가 사은회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기도 했다. 또 한국의 유명 출판사들은 이런 만화잡지 호황에 뒤늦게 동참하려고 검토에 들어갔고, 실제로 몇몇 회사는 뛰어들어서 잡지를 내놓기도 했다.
이 시기는 단순히 만화잡지만 잘되는 시기만은 아니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에서 헌신했던 386세대는 이제 경제주체가 되었고, 이들의 높은 문화 욕구는 문화산업 전반에 거대한 수요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영화 주간지 《씨네21》까지 탄생시키는 지경에 이른다.
필자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대목은 ‘이 타이밍을 살렸다면…’ 하는 것이다. 만일, 각 출판사의 재정적 이익이 극대화되는 이 순간에, 창간 초기의 소수 인적구조를 갖춘 편집진을 6~10명이라도 규모를 갖춘 일본식 편집체제를 구축하면 어땠을까? 한국의 신인 작가진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초창기의 경험 있는 중견들을 속속 간부진으로 승격시켜 이미 스타로 부상한 중견 작가들에게 좀 더 심도 있는 만화를 연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일본 만화구조에 대항할 수 있는 한국 나름의 장르 구조 등을 창출하고 시장개방 이후에도 어느 정도는 대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 입장으로서는 자본 논리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에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 막대한 성공을 했으니, 당연히 인건비를 더 늘리지 않고 이익을 증대시키거나 유지하는 방안을 당연히 생각했다. 따라서 한국의 편집부 인원은 그다지 늘어나지 않았고, 적은 인원으로 여러 작품을 연재하는 볼륨 있는 잡지를 유지해야 했다. 일본의 편집진처럼 한두 개의 작품을 담당하면서 캐릭터 구조나 스토리를 심도 있게 작가들과 논의할 정신적/육체적인 여유는 찾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후 잡지의 창간 붐이 벌어지면서 노하우를 어느 정도 갖춘 중견 편집자들이 다른 잡지로 빠져나가거나 하며 노하우의 전승도 깊이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 한국 만화잡지를 이끌던 최상부 수뇌진은 자신들이 모델로 삼고 있고 킬러 콘텐츠를 수입하던 일본 만화 출판사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적어도 이 관계를 좀 더 잘 활용했다면 일본 출판만화의 제작에 대한 노하우를 흡수해 한국에 적용하는데 좀 더 유연한 전략을 세울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 만화잡지가 무너진 이유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한국의 만화잡지를 기반 둔 출판만화 시스템이 199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면 급격한 쇠퇴기로 접어든다. 잡지는 안 팔리고 이전 만화시장에서 명성을 쌓은 작가의 신작을 투입해도 인기와 판매는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초기와는 다르게 그렇게 명성을 누리는 새로운 작가진도 별다르게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이 찾아온다. 이때 한국 출판만화 업계에 치명타를 가하는 사건이 몇 가지 벌어진다.
- 청소년보호법 제정
- 외환위기-IMF 사태 발생
- 외환위기 탈출을 위해 마련된 IT산업 육성으로 인한 문화산업 전반의 급격한 중심이동
첫 번째는 한국에서 출판만화 종사자들이라면 듣기만 해도 이를 박박 가는 부분이다. 이 법의 발효는 실질적으로 만화의 전시와 판매에 큰 족쇄를 채웠고, 특히 사후 검열 때문에 작가들이 표현이나 연출, 소재 선택에 있어서 큰 정신적인 부담을 안고 작업하는 결과를 안겼다.
두 번째는 만화책을 만드는 원가 자체가 급속하게 상승하는 효과를 낳아서 출판사에 금전적인 큰 타격을 안겼다. 만화책을 만드는 잉크, 종이를 만드는 펄프 모두 수입을 해야 하는데 이들 가격이 크게 올라 원가 대비 이익률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 일본 만화를 수입해서 파는 것이 이들 출판사의 큰 캐쉬카우였는데, 환율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일본에 수입금액을 결제할 때는 예상보다 훨씬 큰 금액으로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사태를 낳았다.
그리고 가장 큰 재앙이 된 것이 바로 세 번째다. “나라가 망했습니다”라는 텔레비전 뉴스 앵커의 일성과 함께 국가 전체엔 위기가 찾아왔고, 그 영향으로 탄생한 김대중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한 새로운 산업 아이템으로 IT산업을 내세웠다. 아시다시피 전 가정에서 인터넷으로 무료로 문화 콘텐츠를 향유하는 게 당연하다는 풍조가 급격하게 퍼지고 이는 한국의 음반산업을 초토화한다. 그리고 이어서 불어닥치는 PC방 열기와 스타크래프트 광풍이 전국을 휩쓸고 이런 굉장히 저렴하게 제공되는 놀 거리로, 기존 만화 소비층이 속속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도서대여점이 등장하면 어떨까?
이렇게 출판만화 업계는 갑자기 엄청난 위기를 맞이했다. 내외적으로 말이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헌데, 이때 한가지 구세주가 등장한다. 바로, ‘도서대여점’의 등장이다.
솔직히 필자는 이 단어 자체도 글에서 꺼내기 싫다. 필자가, 도서대여점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이 이야기를 꺼내면 순식간에 달라붙는 ‘도서대여점 신자’들 때문이다. 신자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뭐든지 도서 대여점이 나쁘다는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기 쉬운데, 한국 출판만화 불황은 길게 서술했듯이 내외적인 복합적인 요인이 뭉쳐서 나온 결과다.
경제 위기로 많은 실업자가 생겨난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이다. 명퇴니 오륙도니 사오정이니, 저주받은 세대 92학번이니… 비정한 별명들과 유행어가 양산되던 때였다. 이렇게 명퇴를 당한 사무직 노동자층이 받은 퇴직금과 어렵사리 융자를 받아서 만든 조그만 목돈으로 할 수 있는 유력한 자영업. 그래 그게 도서 대여점이었다.
이 업태는 1998년 1만 1,223개에 달했고, 한때 비공식적으로는 전국 2만여 개에 육박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갑자기 전국에 만화책을 소비해줄 소매점이 2만 개 가까이 갑자기 생긴 것이다. 급락하던 매출에 허덕이던 한국 만화출판사의 눈이 번뜩 뜨일만하다. 생각해보자, 여기에 만화책을 한 권씩만 넣어도 2만 부가 팔린다는 결론이다. 이건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이 도서 대여점은 아시다시피, 권당 300원이나 400원을 주고 책을 대여해서 며칠 동안 유료열람하는 업태다. 그러니, 손님이 계속 찾아오게 해서 돈을 쓰게 하려면 작품의 회전율이 빨라야 한다. 박리다매이니 숫자와 속도를 확보해야 했다. 그러니 빨리 후속권이 나오고 권수가 많은 만화가 좋다.
눈치채신 분이 있겠지만, 이게 한국 만화 출판업계 체질이 별안간 만화방 체제로 급속히 변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이미 작가 중엔 1980년대의 공장체제를 가진 사람이 그다지 없었다. 물론 살아남은 몇몇 작가들이 도서대여점에 발 빠르게 양산형 만화들을 마구 공급하기 시작하기는 했고, 유명 출판사들은 작가들을 모아서 도서 대여점용 양산형 만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1997년 만화 종수(타이틀 수)는 6,297종이었던 것이 1998년에는 8,122종이 되고 1999년에는 9,134종 2000년에는 9,329종으로 늘어난다. 이 정도면 일본만화의 70%에 육박하는 엄청난 양이다. 하지만 이걸로 물량이 턱도 없었다. 사실, 필자의 만화가 데뷔도 이때 이뤄졌다. 나는 『강호용병전』이라는 무협만화의 스토리 작가로 이때 데뷔했고, 이 만화의 레이블은 도서 대여점 전용 레이블이었다. 자아, 이때 각 만화 출판사는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최악의 악수를 둔다. 바로 일본만화의 대규모 무차별 수입이다.
일본만화의 무차별 수입과 그 부작용
2000년 한 해에만 외국만화가 3,948종 번역 출간됐다. 이중 상당수가 당연히 일본 만화였다. 장기간 긴 호흡으로 유지되는 일본 만화 플롯과 서사 구조를 생각하면 엄청난 물량의 일본 만화가 한국으로 유입되었음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2000년부터 일본에서 유학생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 모 거대 만화 출판사로부터 꾸준히 수입할 일본만화의 샘플을 구입해서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점이 되자 슈에이샤나, 고단샤, 쇼가쿠칸 등의 유명 3사 이외의 중소규모 출판사의 B급 이하 만화들도 구입을 해달라는 요청을 심심치 않게 받게 됐다. 이전에는 작품성과 완성도가 어느 정도 보장된 작품이 신중하게 수입이 결정되었는데 이때부터는 일단 물량 확보가 중요해졌다. 사실상, 파칭코 만화나 경마, 마작, 일부 극단적 섹스만화, BL 등 소수 장르 이외의 모든 만화가 수입대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당시 만화 출판사 간부로 있었던 분 이야기는 이랬다.
“이전에 1만 부 팔리던 물건이 이제 5,000부 팔려. 그러면 타이틀을 두 개로 늘려서 5,000부 팔면 1만 부가 되잖아?”
이런 논리는 당연히 엄청난 부작용을 불러일으킨다. 그중 가장 큰 부작용으로 필자가 꼽고 싶은 것은 “시장개방 효과”다. 솔직히 이 정도 물량이 일본에서 한국 시장으로 유입된다는 것은 대문의 빗장이 풀리면서 대문이 완전히 열렸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렇게 수입되는 만화들에 대해서 한국 만화는 경쟁력을 가지기 어려웠다.
일반 대중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일본 만화 콘텐츠는 몇몇 유명타이틀을 제외하고는 굉장히 저렴한 가격으로 수입된다. 또 굉장히 저렴한 가격으로 번역되고 제작된다. 특히 번역은 10권짜리 한 질에 100만 원을 좀 넘는 번역비가 책정되거나 했다. 이러니 역자가 SF나 우주공학 계열에 관한 전문지식이 없어서 아예 무슨 의민지 알아보기 힘들게 번역되어버린 『문라이트 마일』 한국어판이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같은 만화에서는 ‘블레이드’라는 주인공의 코드명을 ‘브레드’라고 오번역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발번역이 난무하는 큰 이유를 제공하기도 했다.
일본만화에의 의존과 일본만화의 불황에 따른 연쇄적 타격
어쨌든 일본 만화를 수입해서 내어놓는 게, 한국인 작가 한 명을 육성해 시장에 내보내는 비용보다 압도적으로 쌌다! 그러니, 단순한 시장 논리로만 봐도 더더욱 한국 만화가 육성보다는 싸게 비용이 들고, 당장 퀄리티가 보장되는 일본 만화를 들여놓는 데 혈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인재발굴과 육성 시스템은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일본은 연간 수백 명의 엘리트 신인을 육성해서 링에 막 올려보내는 여건이 되는 종합 격투기 그룹인데, 우리는 이제 막 번화가에 좋은 건물 빌려서 선수를 어렵사리 길러서 ‘막 챔피언 키워볼까…’ 하던 차에 같은 링에서 싸우게 된 상황이 된 거다.
당연히 진다. 우리가 무슨 솔방울로 수류탄 만들어서 미제와 싸우는 마법사 부대도 아니고, 당연히 냉정한 자본 논리로 지는 게임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엘리트 교육에 정신력이라고 해도, 엄청난 질적 차이가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선 물량전에선 이길 수가 없다.
이렇게 우리 손으로 시장을 열어버려서 일본 만화가 한국 만화를 완전히 잠식해도, 만일 잘 팔리고 있었다면 출판만화 위기론도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종속 이론적인 측면이나, 문화 연구적인 관점, 혹은 미디어 제국주의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문화가 밟히고 있다…” 이런 논의가 집중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한국 만화만 위기가 찾아온 게 아니다. 일본도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체 만화잡지가 이전보다 팔리지 않는 잡지 불황기가 찾아온다. 이를 『주간 소년점프』의 연재만화 『슬램덩크』가 연재 종료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해 ‘슬램덩크 쇼크’로 부른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부해야 할 아이들을 망치는 유해업소 중 하나로 손꼽혔다. 사실 환경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고, 또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들이 흡연을 하거나 가게 한 켠의 골방에서 틀어주는 음란/폭력비디오를 몰래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
- 이런 상황이었으니, 만화의 질은 담보하기 어려웠다. 물론, 『공포의 외인구단』과 같이 한국 만화역사에 남을 걸작도 배출되지만, 일본의 작품을 그대로 베껴오거나, 조악한 스토리와 그림으로 만들어진 작품도 엄청나게 많이 유통되었다. 결국, 이후에 일본 만화를 직접 접하는 청소년이 늘어나면서 외면을 받게된다. ↩
- 만화 그림에서 밑그림을 의미한다. 뎃생은 펜터치와 더불어 만화 제작 공정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 중 하나이고, 굉장히 숙련된 요원이 맡는다. 이들이 유명 작가 밑의 팀장역할을 맡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당시 이런 뎃생맨 팀장들의 월급은 1천만 원을 넘는 경우도 흔했다고 한다. 이런 뎃생맨 생활을 오래 해야지만, 자기의 독립된 스튜디오를 차리는 게 가능한 것이 당시 관례였다고 한다. ↩
- 이들이 사실 오타쿠 제 0세대를 형성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
- 당시 일본은 버블경제의 최전성기로, 지금은 도저히 만들기 어려워보이는 난해한 장르의 애니메이션이나, 실험적인 작품들도 마구 만들어져 상품화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
- 사실 이것도 1980년대 일본만화 잡지 업계가, 1970년대까지의 대성공을 등에 업고 『영 매거진』과 『영 점프』를 창간해 새로이 주간 800만부에 달하는 청년지 시장을 열어제친 것을 참고로 한 전략이기는 하다. 이런 청년지 시장이 내놓은 걸작이 바로 『아키라』와 『비밥 하이스쿨』, 『서전 아이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