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한국 만화는 진정으로 위기인가에 이어서 한국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처음에 한국 만화는 위기인가?’라는 화두를 꺼내두고, 비록 1980년대 말에 성립된 일본식 잡지 만화체제는 위기(혹은 몰락)이지만 웹툰과 같은 새로운 만화형식의 등장으로 한국 만화 전체로는 위기가 아니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렇다면 1990년대 중반까지 그렇게 전성기를 누리던 한국 잡지 만화체제는 왜 위기를 맞이했나? 다는 못 말하겠지만, 아마 일본 만화 생산 시스템을 통해 힌트 정도만 좀 꺼내볼 수는 있겠다.
1. 일본에서는 만화가 싸다! 박리다매다!!
필자는 1999년 겨울에 한국에서 만화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다가 한국 만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일본 만화의 실체를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본땅을 밟았다. 그때 오로지 만화작품과 간접적인 정보로만 경험하던 일본만화는, 선입견과는 너무 달랐다.
그 중 가장 선명하게 다가오던 인상은, 굉장히 저렴해서 그야말로 엄청난 양이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동네, 거리 어디를 가나 있는 중소규모 서점, 편의점, 전철역의 매점 가판에는 막대한 양의 만화 잡지가 쌓여있었다. 가장 충격 중 하나는 한국에서는 당시 어렵사리 구해보던 만화 잡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전철에서 읽고는 내리면서 쓰레기통에 버리던 광경과 이런 잡지들을 다시 주워서 100엔에 다시 되파는 홈리스들의 2차 시장을 목격하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 일본에서 만화는 그냥 아무 거리낌 없이 사서 소비하는 저렴한 매체였다. 그러니까,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부담 없이 보니 저변도 넓은 것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실제로 일본 만화는 얼마나 싸나? 일단 다른 문화상품들 비용을 한번 보자. 일본에서는…
영화 관람비용 1,800엔 : 2만 원! 영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가혹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한국보다 개봉도 무진장 늦다! 직배가 없어서다!
DVD 대여료 380엔 : 최신 영화기준 5천 원이 안 된다. 지나간 옛날 영화들은 일주일에 100엔정도에 빌릴 수 있다.
소설책 : 한국보다 월등히 비싸다!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는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자면 한 에피소드당 4,000엔 정도를 지불해야 살 수 있다. 한 에피소드를 상하 두권으로 나눠서 파는 악덕 상술이다!
음악 : 한국이 워낙 똥값이지만 훨씬 비싸다. 일본 아마존 등지에서 음악 한 곡을 다운 받으면 드는 비용이 한 곡에 250엔(3천 원)정도다! CD한장 분량 다운받으면? 2,000엔 정도 한다.
그런데 만화 잡지는 한 권에 얼마쯤 하나? 주간지를 기준으로 보통 300엔 정도이고, 소년만화 잡지에 연재된 만화를 묶어서 나온 160~180페이지 정도의 단행본은 400엔 정도, 청년지나 성인지(성인지라고 해서 야한 만화잡지 아니다…)에 연재된 만화들은 500엔 정도 가격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에 렌탈 시스템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이유도 된다. 렌탈 서비스는 저렴한 가격이 무기인데, 만화 자체가 싸니 만화 하나당 싸게 느껴지는 권당 30엔 ~40엔 으로는 도저히 이윤을 남길 수가 없다.
참고로 일본의 최저임금은 2010년 기준 도쿄지역이 시간당 821엔(8,500원), 서부지역이 642엔(7,000원정도) 정도다. 한국은 4,800원 정도다. 이것과 비교해도 상당히 싸다. 이렇게 싸다면, 상품을 통해서 이익을 내는 방법은 하나다. 싼 대신에 많이 파는 전략-박리다매 전략으로 가는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만화잡지는 저렴하니 원가를 못 맞추고 적자를 낼 수 밖에 없다. 보통 업계에서는 20편 정도 만화가 연재되는 월간지를 기준으로 약 5~7명의 편집자를 고용하여 만화를 만들 경우 한달에 1,000만 엔 정도의 적자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그럼에도 잡지를 유지하는 것은 이 잡지들이 만화 단행본을 알리는 광고탑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박리다매를 유지하려면, 항시 많은 숫자의 타이틀이 시장에 나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본 출판만화 시장에서 연간 발행되는 만화 타이틀 숫자는 보통 1만 타이틀 정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면 서점 직원이 엄청난 베테랑이라도 어떤 잡지사의 어떤 만화가 나오고 있는지 전부 파악을 하는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더더욱 많은 타이틀의 만화를 찍어내서 일본 전국에 1만 4천여 개 정도 있는 서점 판매대와 전국 5만 개 정도 있는 편의점 만화가판을 점령해 손님의 눈을 끌어야 한다. 실제로 각 만화 잡지 영업부원들은 가판을 조금이라도 많이 점령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지난 회 소개한 거대 메이저 3개사가 압도적인 가판 점유율을 자랑한다. 이러다보니, 중소출판사의 만화책은 납품이 되어도 아예 박스에서 나와 진열도 못되어보고 창고로 직행해버리는 경우도 속출한다.
2. 엄청나게 방대한 일본의 작가 예비군 인재 풀
이러다 보니, 일본의 잡지사에서는 항시 만화를 많이 만들어서 시장에 지속적으로 투입해야 한다. 그러니 항시 많은 숫자의 만화를 만들어줄 많은 숫자의 작가 예비군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앞서 말한대로 일본은 부담없는 가격과 넓은 유통망, 텔레비전을 통해서 항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서 방대한 잠재적 작가 예비군이 형성되어 있다. 게다가 50년 이상 지속된 잡지 만화체제의 만화들만 보고 컸으니, 잡지들이 요구하는 문법이나 분위기도 이미 숙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느 정도 인원들이 출판사를 찾아오는가? 필자가 일하는 ‘스퀘어 에닉스 출판부’의 경우, 연간 2번에 걸쳐서 ‘스퀘어 에닉스 만화대상’이라는 큰 규모의 공모전을 실시한다. 참고로 스퀘어 에닉스 출판부는 <강철의 연금술사>, <흑집사> 등의 만화를 히트시켜 업계4위정도의 매출을 보이는 회사다.
연간 여기에 응모되는 원고 숫자가 1,000편이 넘는다. 각 잡지는 또 별도로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공모전을 실시한다. 필자가 일하는 잡지의 경우는 여기에 20여편의 원고는 꾸준히 들어오는 편이다. 그리고 하루에 잡지당 2, 3명씩의 작가 지망생이 원고를 들고 찾아온다. 그 중 유명작가의 문하생으로 활동하다가 소개되는 경우도 있고 하니,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작가 지망생이 몰리는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많이 준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만화 잡지 편집자가 일본의 거대 일러스트레이터 사이트인 픽시브나 거대 동인지 시장인 코믹 마켓을 통해서 직접 작가와 접촉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냥 일본의 인적 풀이 방대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여러 루트를 통하여 모여든 이 방대한 작가 지망생(잠재적 작가예비군)들은 잡지당 1년에 많게는40~50명 정도가 배출된다. 그리고 이 중에 다시 1년에 4~5명 정도만이 연재에 들어간다. 물론, 연재에 들어갔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일본에서는 연재 첫 회 성적에 따라서 성패가 거의 갈린다고 본다. 연재 1회에 상위 8위 정도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 작품이 오래동안 살아남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단행본 성적이 초판 3만에서 5만부 이상을 기록하면 장기연재를 할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초판 3,000~5,000부 작품이 부지기수인 일본 만화업계 현실을 생각하면 이마저도 쉽지는 않다. 심지어 단행본도 출판되지 못하는 만화도 생긴다. 여하튼 일본에서 한국에 수출될 정도의 만화를 그린 이들은 정말 지독하게 가혹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이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 그런데 이들 작가들은 또 혼자서 만화를 이렇게 만드는가? 아니다. 대부분이 각 잡지에서 근무하는 ‘편집자(編集者)’들과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하고 그 잡지에서 요구하는 문법이나 스토리, 그림체를 연구하여 만화를 연재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기자라는 표현을 쓰는데, 일본에서는 ‘기자(記者)’는 신문기자나 방송 기자를 가리킨다. 편집자라는 의미 안에는 기획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 편집자들도 만화가들이나 마찬가지로 대규모로 투입되며, 만화 전쟁터에서 소모된다.
3. 만화 작가와 만화 편집자의 대량투입/소모 구조인 일본 만화계
이전 필자가 석사논문을 준비하면서 각 유명 잡지 편집부를 조사해본 적이 있다. 주간 잡지를 기준으로 가장 많은 편집자를 보유한 잡지는 <소년 매거진>으로 58명이었으며, 이 중 절반 정도의 인원이 단행본 제작 업무를 전담하고 있었다. 가장 적은 곳은 <소년 선데이>로 23명이었다.
대략 주간지는 평균적으로 약 20명 선에서 편집진이 구성되고, 비교적 업무량이 적은 월간지의 경우에는 5~6명 정도 선에서 인원이 결정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자가 일하는 <격주간 영간간(隔週刊ヤングガンガン)>은 12명의 인원으로 유지되고 있다.
편집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작가와 함께 만화를 만드는 출판사 쪽 사람이다. 크게 두 가지 업무를 수행하는데, 하나는 작가를 찾아내고 육성하는 것이고 둘째는 길러낸 작가를 안정적으로 만화를 만들도록 보조하고 도와주는 콘텐츠 제작업무다.
이들은 이전의 만화잡지 선배들로부터 만화 만들기에 대해서 많은 노하우를 전승받은 사람들이다. 이런 노하우를 입사하여 보조 편집자인1~2년차까지 흡수하고, 빠르게는 입사6개월, 보통은 1년정도 지난 시점에서 자신의 만화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 편집자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결과를 보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다른 부서로 이동되거나 편집부에 남더라도 서류처리 등의 잡무를 담당하게 된다.
이건 그나마 정사원 편집자의 경우고, 일본 만화 편집에서 굉장히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계약직 편집자들 은 성적이 좋지 않으면 바로 퇴출이거나 연봉이 깎인다. 이와 별개로 계약직이 히트작은 더 잘 만든다. <크게 휘두르며(大きくふりかぶって)>, <지뢰진(地雷震)> 등의 유명작은 계약직 편집자가 만든 만화다.
편집자가 진짜 힘든 건 수치로 모든 게 판명된다는 것이다. “이번에 출시한 만화책 단행본이 몇부가 팔렸다. 이익이 얼마다. 그런데 너에게 배정된 연간 판매목표는 00000부인데 모자란다.”, “너는 월급값을 했어/못했어” 어떤 부서는 이것을 회의 시간에 편집자를 일일이 일으켜세워서 다른 부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한다고도 한다. 작가만큼이나 가혹한 경쟁환경인 셈이다.
일단 편집자가 되면 평범한 사회 생활은 포기해야 한다.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는 베트맨 족이 태반인 작가들의 생활 패턴에 맞춰서 오후 1~2시에 출근해서 밤 12시가 넘는 시간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당연히 애인도 사귈 시간도 없고, 설령 결혼했어도 높은 확률로 이혼한다. 그러니 외롭고 그러다보니 밤의 꽃들과 사귀는 사람도 늘고… 과로사도 많고 정신적인 이유로 히트작을 만들고도 중도하차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일본의 모잡지 만화 <바쿠만> 있지 않은가? 거기에 나오는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를 보고 보통의 편집자들은 코웃음을 친다. “이런 좋은 작가와 환경이면 히트작 맨날 만들겠구먼” <바쿠만>은 가혹한 만화 환경 때문에 점차 만화가 지망생이 줄어드는 현실에서, 만화계에 대한 환상과 정보를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동기 부여용 만화다. 실제 모습과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물론 가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모 잡지의 모 편집자 같은 경우엔, 누계 수천만 부의 단행본을 팔았는데 연봉이 3,000만엔(약 3억 3000만원)에 달하는 보수를 받는다. 물론, 실적없는 계약직 신인 편집자는 20만 엔도 안되는 저임금에 시달리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어쨋든 이 산전수전 다 겪은 편집자들이 각각 많게는 10여명, 적게는 3,4명정도 작가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다. 보수적으로 생각해서 편집자 한명이 3명 정도만 작가 예비군을 가지고 있다고 보자. 그리고 이 잡지 편집자가 10명이라고 보자. 산술적으로는 이 잡지에만 작가 예비군이 30명은 대기를 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잔인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편집자가 이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관리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번회는 장황하게 길었다. 이제 문제의 핵심 중 하나를 말미에 말해보자. 그럼 한국 잡지 만화 편집부의 편집자는 대체 몇 명이었을까? 전성기때 편집장을 포함해서 3명에서 4명, 일반적으로 2~3명 정도였다.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다.
다음호에서 계속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