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터키 시위에 대한 외신 보도 분석 1/2 (WP, Economist, WSJ, NYT)에서는 이른바 지식인들이 좋아하는 몇몇 매체를 다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다소 특징 있는 폭스 뉴스(fox news : 수꼴), 알자지라(Al Jazeera : 중동 언론),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 외교 전문지)의 보도를 살펴 보겠습니다.
5. FOX News : 세계를 리드하는 수꼴 언론
폭스 뉴스는 자극적인 기사배치, 기독교 근본주의, 사실 왜곡 등으로 악명이 높은 언론입니다. 하지만 보수, 공화당 지지자들에게는 매우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상업적으로 성공적인 언론이기도 하지요. 다만 터키 시위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자들의 시위이다 보니 폭스에게도 동정이 가는 주제일 수 있겠습니다. 폭스는 수상과 대통령, 그리고 각국 지도자의 입장을 사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민중보다는 리더들의 입장에 집중한 모양새입니다.
Turkey’s Prime Minister Erdogan rejects ‘dictator’ claims
터키의 수상은 자신이 독재자나 권위주의적인 리더가 아니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을 ‘국민의 종’으로 까지 표현했습니다. 그는 그러면서도 시위자들을 ‘이데올로기 주의자’ ‘극단주의자’ ‘소수’ ‘SNS를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친구들’로 격하시키기도 했습니다. 자신은 나무를 집권 기간 동안 20억 그루나 심은 친 환경주의자라는 말까지 했고, 투표를 시위로 변화시키려는 대통령 하야 요구에 굴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리고 내외부의 시위를 조장하는 주동자들을 색출하겠다는 독재자스러운 발언까지 했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굉장히 감정적인 어조이고, 수많은 업적을 새운 자신이 이렇게까지 비난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억울함이 느껴집니다.
Turkey’s President, Prime Minister have differing views on protests, while 1 dies
이에 대해 여당의 이인자 격인 대통령의 입장 차이는 이미 다루었으니 넘어가겠습니다. 또한, 폭스 뉴스는 이라크 리더의 입장도 정리해 놓았습니다. 이라크는 지금 터키와 국경 분쟁으로 긴장 상태입니다. 이라크 대통령은 시리아 내전으로 가뜩이나 불안정한 주변국의 상황에서 빨리 터키가 안정을 찾도록 터키의 수상이 노력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너무 영미권의 시각만 본 것 같으니 조금 시야를 바꿔보겠습니다. 중동의 자유언론의 상징인 알자지라로 가보겠습니다. 저는 중동어를 전혀 못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알자지라는 BBC 지부국에서 출발한 언론이다 보니 충실한 영어 기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6. Al Jazeera :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중동 언론의 자존심
알자지라는 전제군주국이 대부분인 중동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대형 언론사입니다. 반미적인 이슈도 충분히 다루어 알카에다, 이라크 전쟁 등의 이슈에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만 전제군주국에 대항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언론사란 점에서 터키 시위를 지지하는 세력일 수밖에 없겠지요.
Workers strike in support of Turkey protests
역시 알자지라의 기사도 이전까지 본 다른 매체의 기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사상자와 부상자 등의 피해가 자세하게 묘사되었고, 파업에 대해서도 좀 더 크게, 경제적인 입장인 WSJ와는 대비되는 노동운동적 입장에서 묘사되었다는 세세한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혼란과 정부의 폭력이 ‘터키의 봄’으로 상징되는 중동의 모범적 민주주의 국가라는 터키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는 말도 전했습니다. 신문들을 많이 보다 보니 이제는 딱히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자, 그럼 꽤나 많은 매체들의 기사를 보았으니 이제 이를 한번 더 정리해 보죠. 방금 전에는 한국과 상황이 비슷한 점을 꼽아 봤으니 이번에는 한번 한국과 터키의 상황의 차이점을 살펴볼까 합니다. 그런 차이점을 꼽아볼 수 있을 정도로 정보를 좀 더 알았으니까요.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무엇이든 비슷해 보이는 법입니다. 외국에 가면 처음에는 사람들의 외모도 비슷해 보이고, 성격도 어디까지가 문화차이고 어디까지가 개인 차이인지 구별 못하지만 오랫동안 그 문화를 알다 보면 그 차이가 보는 것과 비슷하달까 할까요.
우선 가장 큰 차이는 북한이라는 공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터키 수상은 아쉽게도(?) 시위의 주동자를 애매하게 ‘외국’과 ‘내부의 극단주의자’로 몰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냉전적인 대립, 북한에 대한 좌우를 가리지 않는 정치적 남용이 흔한 한국에 있어서는 꽤나 부러운 일입니다.
또한, 냉전이 끝났기에 과거 냉전 당시의 서구국가들처럼 굳이 정치적 안정과 공산화를 막기 위해 서구국가들이 아시아의 보수 지도자들을 비호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또 하나의 차이점입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장제스, 심지어 오사마 빈 라덴까지 과거 서구세계는 공산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민주주의자라기에는 너무 극단적인 독재자들, 혹은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을 지원했습니다만 냉전이 끝난 지금 굳이 서구 국가들이 그런 리스크와 도덕적 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요. 따라서 상대적으로 서구 국가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보수 세력의 성격도 다릅니다. 한국에서 보수 진보를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산업화와 민주화지, 종교는 상대적으로 덜합니다. 교회는 물론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커뮤니티이지만 모든 보수주의자가 기독교인은 아니며 모든 진보주의자가 무교, 불교도, 천주교도 아닙니다. 그보다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것은 유교적, 권위주의적 리더쉽과 민주화를 미루고 이루는 산업화에 대한 호오입니다. 이슬람이라는 일신교적 근본주의와 그 도덕 강요와는 그 극단성이 다릅니다. 단일 종교국가가 아닌 한국이 오히려 더 해결이 쉬울 수도 있지요.
지리적 차이도 있습니다. 아시아에는 사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룬 국가가 극히 드뭅니다. 그나마 일본이 있겠지만 일본은 자민당의 장기집권을 보듯 일당 독재가 아닐까 걱정스러울 수도 있는 체제이고, 어쩌면 한국 정도면 굉장히 민주적인 나라입니다. 그와 달리 터키는 EU에 가입을 기대하는, 나름 유럽에 가까운 국가입니다. 주위에 중동도 있지만 민주주의가 이미 뿌리내린 많은 나라들도 있는 셈이지요. 꽤나 큰 차이입니다. 따져보면 많은 부분이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해외 외교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미국의 전문지인 Foreign Policy의 기사를 읽어보겠습니다.
7. Foreign Policy : 국제적인 외교 문제 전문지
포린 폴리시지는 이전 매체들보다 훨씬 전문적으로 해외의 외교만 다루는 미국의 전문지입니다. 터키 사태도 미국의 해외 외교 정책에 대한 분석을 하는 입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How Not To Win Friends Influence Turkish People Erdogan Majoritarian Democracy
첫 번째 기사는 터키가 얼마나 민주적인지에 대한 의문을 표시합니다. 서방에서 터키는 중동의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통했습니다. 현 총재는 NATO, EU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군대를 국민의 품으로 보내고, 사법부를 개혁시키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과 긴장관계였던 것에서 보듯, 인권이 무너지면 서방국가들과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는 인권을 중시했다는 서구 국가들의 평가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시위를 압박하다 보면 스스로 자신의 업적을 깎는 꼴이라는 기사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전문지답게 이렇게까지 되도록 터키를 중동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민주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친화전략만을 구사한 워싱턴 정계의 태도에도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기사는 터키 수상에 리더십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터키 수상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이전 매체에서도 나왔든 다수결주의입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계획을 밀어붙이고, 시위를 과격하게 진압, 폄하하고 보수적 도덕을 강요하면서 그가 내세우는 정당성은 바로 다수의 지지율입니다. 그리고 현 시위가 Erdogen 현 수상의 지지율에 큰 타격을 입히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년 선거에서도 또 이기고 그 지지율로 인한 다수의 소수에 대한 폭력이 계속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수상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더 이상 더할 것도 없이 매우 적확한 비판이라는 생각입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와 소수가 서로 존중하는 것이지 절반의 지지를 얻었다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은 아니지요. 대부분 매체가 수상에게 아주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던지라 매체들을 읽고 요약하는 것만으로도 그 논거가 충분하게 제시된 느낌입니다.
8. 정리 및 보론
그럼 글을 정리하면서, 균형감각을 맞추기 위해 시위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지, 그리고 현 터키 수상의 태도를 서구국가가 과연 비판만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제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우선 민주화에 대해서 말하자면, 서방 국가는 언제나 자신들과 같은 수준의 민주화를 요구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물론 간통을 했다고 돌로 쳐죽이는 이슬람 국가의 규율을 보면서 그런 정의감을 갖지 않기는 실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해서는 그들이 왜 그런 문화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연 민주화와 인권, 도덕의 강요에 대한 해방이라는 것이 외부에서의 강요, 압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민중의 의식 속에서 내부적으로 자기화되어 자신들이 스스로 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터키 수상의 지지율이나 한국의 현 대통령의 지지율에서 보듯, 대중은 언제나 엘리트의 기대보다는 의식의 변화가 느립니다. 그것을 그저 ‘옳다는’ 이유만으로 빨리 따라오라고 윽박지른다고 그것이 가능할까 의문입니다.
심지어 그 우월성조차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교육수준이 낮고 종교를 원론적으로 믿을수록 행복 지수가 높다는 것을 이미 수치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변화를 싫어하고 현 상태로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변화는 천천히, 대중들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지금의 터키 수상이 바로 그런 점진적 변화의 상징이고요.
또한, 불편한 현실이지만 민주화가 되기 전에만 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도시 계획이 바로 그렇습니다. 서울의 강남처럼 아예 텅텅 빈 상태에서 독재자가 개발하던가, 아니면 파리처럼 왕정 시절에 과격하게 부수면서 짓지 않는 한, 도시 계획이란 것을 깔끔하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멋대로 만든 강북보다 강남은 쾌적하고, 파리는 깔끔하고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의견을 제시하고 그에 대해 토론하고, 또 지도자는 계속 바뀌면서 천천히 진행되면서 도시 계획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적은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물론 민주적인 절차는 옳습니다만 도시 계획의 이득을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마지막으로, 민주화란 좋은 것을 모두에게 설득하기에 과연 정치적 집회, 시위가 유효한 수단인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현 터키 수상조차 민주주의가 뭔지, 인권이 뭔지,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문화 속에서 권위주의가 이미 자기화되어버린 것이죠.
진짜 민주화는 실생활에서의 작은 변화입니다. 강요하지 않는 부모, 학생을 때리지 않고 자존감 낮추는 비하를 하지 않고 설득하는 교사 같은 작은 곳에서의 변화가 선행되어야만 그런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이 민주화를 자기화해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자기 집안에서 남들은 토달지 않고 자기 말만 잘 듣기를 바라는 가부장적인 문화나, 사회 조직에서의 권위주의적 조직 문화, 설득보다는 남을 위압하고 자존감을 짓밟는 헐뜯는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큰 정치조직으로써의 변화도 어려운 것입니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리더 한 명이 바뀌어도 근본적인 사람들의 철학이 변하지 않는 한 바뀌지 않습니다. 가장 가부장적인 운동권 조직에 대한 비판이나, 민주화 투사였지만 정작 자신들의 통치 스타일은 보스정치, 권위주의 논란에 휩싸였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들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빠른 변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운동보다 자신의 상황에서 변화를 태도로써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키는 ‘혁명은 세금 징수인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라고 냉소했고 베르베르는 ‘많은 이들이 혁명에서 너무 급한 결과를 바랬다. 진짜 혁명은 개미처럼 천천히 일어난다.’ 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당장에 정치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연대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도 있을 겁니다. 민주주의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그것을 침해한 수상이 문제라는 것 또한 명약관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각자가 논리가 있고 나름의 정의가 있는 선과 선의 충돌이기에 정치란 것은 어렵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터키 시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여러 매체의 기사를 합쳐 보았습니다. 각자 모두의 나름의 논리, 정당성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해 보았고요. 기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다양한 시야를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모든 것이 오히려 흐릿해지고 불분명해지지만 그게 바로 진실일 겁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선명하게 선과 악으로 가르는 거짓 진실이 오히려 더 위험할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