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의 최근 한 연구에 의하면 페이스북 친구 평균 3.75명을 거치면 16억 명의 페이스북 친구들은 모두 연결된다. 곧,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서너 사람만 거치면 나와 관련성을 갖는 사람이란 말이다.
어쩌면 이제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도 나와 전혀 무관하지 않을 사람일지도 모른다. 너와 나를 구분하고 서로를 외면하며 내일부턴 절대 안 볼 사람처럼 막말하고 헤어져 버리지만, 이처럼 사람은 나와 나, 우리와 그들로 엄격히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 개인과 개별 단위의 ‘고유성’을 부정하는 내가 아니지만, 그 고유성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건강한 내부만이 외부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연관되어 있듯이, 조직과 조직도 연관되어 있다. 내가 거주하며 생활하는 내 가정이 내 직장은 물론 국가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경제학을 또다시 들이밀어 죄송하긴 하지만, 이 모든 연관성을 부정하고 개인과 조직을 외부세계와 단절된 ‘독립적이고 폐쇄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경제학을 가르치는 신고전학파경제학을 보고 있으면 억장이 무너진다.
블로그 이웃들은 좀 덜하지만 페이스북 친구들은 대부분 정치적이다. 정치는 설득과 비판으로 실행되는데, 우리 페친들의 모든 글들에서는 설득보다 비판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비판의 대상은 주로 ‘외부’로 향한다.
나는 비판의 방향이 외부로 향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 정치에서 양아치들이 워낙 많으니 남 욕할 게 정말 많다. 특히 21세기 과학혁명의 시대, ‘계몽’의 시대착오성을 공언하는 이 문명의 시대에 ‘전관예우’라는 단어가 공식적 언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은 정말 욕 나온다. 그런 ‘법률사회의 언어’로 ‘정의’가 판가름 나는 사회는 야만을 넘어 깡패들의 사회다. ‘너 자신을 알라’며 비판의 화살을 내부로 돌린 소크라테스가 부활해도 이 상황에선 남 욕하지 않곤 못 배길 것이다.
하지만 남 욕할 땐 항상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물론 그래야 남에 대한 나의 비판이 호소력을 가짐은 물론 타인의 자발적 동의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불통과 독재를 비판하는 사람이 집안 단속도 못 하며, 스스로 비민주적인 가장임이 드러날 때 비웃음을 사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나와 타인이 연관되어 있듯이 ‘내부’와 ‘외부’도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외부환경을 개선하지 않고 내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세계를 보는 방법론이다. 하지만 외부환경은 저절로 개선되지 않는다. 존재하지도 않는 ‘역사법칙’이 외부환경을 바꿔줄 리 없다. 내부가 썩고, 주체성을 잃었는데 어떻게 외부가 ‘개선’될까?
건강한 내부만이 외부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내부의 노력이 외부에 작은 변화를 일으키면, 그렇게 개선된 외부환경이 다시 내부의 개선역량을 도와주는 것이다. 내부와 외부는 독립적으로 외면하며 존재하지 않고, 상호 관련되어 있으며, 그 관련성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교수로서 대학에 대해 비판한다는 것
모든 것이 이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듯이, 내가 비판하는 외부는 내가 밥을 먹고 있는 내부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직장인 대학은 내가 비판하고 있는 정부의 정책과 대단히 큰 관련성을 갖는다.
예컨대,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학교의 경영철학이 좀 더 민주적으로 되지만, 독재적 권위주의적 정부가 들어서면 학교도 그렇게 변한다. 독재적 정부의 정책과 사법당국이 그런 행태를 정책적, 행정적, 사법적으로 묵인해주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모든 대학이 비민주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총장직선제가 폐지되고, 비리로 얼룩진 사학 관계자들이 속속 복귀하고 있다. 교육은 오로지 시장의 요구와 기업의 이윤논리에 맞춰진다. 우리 대학도 그와 비슷한 색깔을 입고 있는 중이다.
의사결정과정이 상식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고 권위주의적으로 이루어진다. 들어보니 다른 대학에서는 더 심하다고 하지만, 상식을 벗어나는 점에선 엇비슷하다. 이런 문화가 강화되자 우리 대학에서 교수협의회가 며칠 전 교수재임용과 관련된 성명서를 발표했다. 별로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느 교수의 재임용이 불허된 것이다.
내가 평소 국내 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많이 올린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나는 남 욕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외면하는 사람이긴 해도 우리 ‘학내’ 문제에만은 그나마 비판을 많이 하는 편이다. 숨어서 욕하지 않고, 총장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학교정책을 비판한다. 처자식 딸려 있고, 자리 없으면 월급은 물론 눈길도 안 주는 이 사회의 비정함에 대해 난들 두렵지 않겠나.
하지만 나는 교수(professor)는 불의와 비상식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Professor란 전문가라는 뜻이 있지만, ‘공언(公言)’하는 사람, 곧 여러 사람 앞에서 명백히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가졌다. 공언하는 것은 교수의 사명이다! 외부에 대한 공언뿐 아니라 내부에 대한 공언도 교수의 임무다. 모든 대학에서 내부에 대한 교수들의 ‘공언’적 사명이 충실히 수행될 때, 외부환경도 비로소 변화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교수의 사명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다. 외부는 물론 내부에 대해서까지 입을 놀리니 ‘욕쟁이’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만은 아닌데, 그런 말 들으면 좀 섭섭하다. 내 욕의 혜택을 입은 자들이 그런 말을 할 땐 솔직히 세상 살맛 안 난다.
나아가 나는 안팎으로 문제를 제기할 정도로 능력이 출중한 사람도 아니다. 잘릴까 겁도 잘 잘 먹고, 잘리면 대책 없긴 마찬가지인 사람일 뿐이다. 서울대 출신도 아니라 위기에 처했을 때 나를 구해줄 강력한 ‘사회적 자본’을 축적해 놓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요즘 난 좀 조용히 보내며 쉬고 싶다.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오늘 다시 입을 놀리고 말았다. 학내 인트라넷 게시판에 올라온 교수협의회 성명을 읽고 또다시 댓글을 달고 만 것이다. 서너 명 교수님들만 응원을 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잘못된 재임용절차에 비판을 가하면서 침묵하는 교수들에게 ‘공언’하는 사명감을 가질 것을 촉구하면서 말이다. 총장 비판하고 교수들마저 나무랐으니 내일부터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것 같다.
어차피 인생은 덧없고 사회적 관계란 허무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는 내가 요즘 자꾸 원망스럽다. 이제 나도 나잇값 좀 하고 싶다!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
대학 시절 친구들과 자주 불렀던 이태원의 ‘솔개’라는 노래 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