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이 글을 쓴 Sujin 님은 트랜스젠더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개신교에 던지는 글'(링크)을 쓴 필자입니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누군가와 차별금지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분은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주장을 했어요. 그럴 수 없는 저는 대화를 시작했어요. 그러다 말꼬투리를 하나 잡혔네요. 제가 사용하는 ‘개독’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어요.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는 제가 ‘개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럴싸하네요. 전 과연 그 단어를 쓸 수 없을까요?
당시에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내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그들에게 사용하는 단어인만큼 달리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고민했어요. 과연 내 단어 사용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았을까?
‘개독’의 의미
‘개독’은 신조어죠. 왜 그런지는 몰라도 위키피디아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아요. 엔하위키에는 관련 항목이 있네요. 뭐, 위키가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믿음은 허상이니 그냥 정의 부분만 참고할게요. ‘기독교계의 대다수를 차지한 복음주의, 근본주의, 배타주의, 문자주의 기독교 사상’이라네요.
저 말고도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가 봐요. 그들은 공격적인 전도를 하며 타인의 종교를 무시하죠. 기복신앙적인 요소도 많이 갖추었고, 정치에 개입도 한답니다. 목사의 ‘오다’에 따라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특성도 보인답니다.
이런 ‘개독’의 행태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눈살 찌푸려질 행위일 뿐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게는 직접적인 위협이에요. 그들은 소수자에 대한 증오를 설파해요. 그들의 주장은 이렇죠.
[quote style=”1″]동성애와 트랜스젠더는 성경 말씀에 따라 죄악이다. 우리는 그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치료할 수 있다. 어서 복음의 품으로 와 죄사함 받으라.[/quote]
말로는 차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들은 분명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어요. 저는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에요. 당신이 당신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전 저로 살아갈 뿐이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차별 받아요. 많은 트랜스젠더들은 교육과 노동에서 배제되어 있어요.
여성처럼 행동하는 남성을 대하는 청소년 사회의 태도를 생각해봐요. 배제와 폭력이에요. 그건 그 청소년들이 애초부터 가진 성향일까요? 아니에요. 그렇게 길러지는 거에요. 그 분위기를 만드는데, 최소한 그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개독’이 깊이 관여하고 있어요. 그렇게 우리들은 교육에서 배제돼요. 누구나 공평하게 다닐 수 있어야 할 학교가 우리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어요.
어쨌건, 그렇게 자라난 청소년들은 어른이 되겠죠. 당신이 회사의 인사 담당자라 생각해보세요. 면접을 보러온 사람이 남성처럼 보이는데 서류상 여성이거나, 여성처럼 보이는데 남성이라면 당신은 흔쾌히 그를 채용할까요? 아무리 당신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해도 이유 없는 찝찝함을 가지게 될 거에요. 그를 그의 능력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우리는 노동에서 배제돼요. 겉모습과 서류상의 성별이 다른 트랜스젠더는 이렇게 부당한 처우를 받을 수밖에 없어요. 애당초 능력을 기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요.
저와 같은 성향을 가진 집단은 그렇게 당신들의 사회에서 변두리로 밀려나요. 교육과 노동에서 배제되니 더 나은 삶은 점점 더 어려워져요. 사실 그럴 기회조차 없어요. 모든 트랜스젠더가 그런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상당수가 그런 것은 맞을 거에요.
흔히 트랜스젠더의 수명은 짧다고 알려져 있죠. 의학적으로는 근거가 없어요. 호르몬 변화에 따른 위험은 있지만 다른 사람도 나이에 따라 호르몬 변화를 겪어요. 호르몬 변화가 생명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사춘기가 없으면 오래오래 잘 살겠네요? 잘 관리만 해주면 건강에 이상이 있을 리가 없어요. 트랜스젠더는 일찍 죽임을 당하는 것이랍니다. 우리를 죽이는 것은 앞서 설명한 사회 분위기에요. 그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들 때문이죠. 그들의 상당수는 ‘개독’이에요.
그들의 차별법
그들은 우리를 공격해요. 사실 트랜스젠더를 대놓고 공격하는 건 많이 줄었어요. 하리수씨의 공로일 거예요. 쟤들은 저렇게 태어났으니 인정해야 한다는 얘기가 공론화되었죠. 그럼 동성애자들은 어떨까요? 희한하게 여성 동성애자를 대놓고 공격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남성 동성애자들은 무참히 공격받아요. 이건 매우 중요한 지점이에요.
많은 성적소수자들이 남성 동성애자를 공격하는 사람들에 의해 덩달아 배척을 받죠. 덩달아 배척을 받아서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왜 남성 동성애자를 공격하는 건지, 그들의 논점을 보자는 거죠. 그들은 공격할 이유가 있다고 해요. 성병을 옮기고 문란하고 아무 남자나 보면 막 달려든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요.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해서 조종하죠.
왜 남성 동성애자가 이런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트랜스젠더는 사람들의 동정심(쳇) 때문에 공격이 힘들고, 레즈비언은 무성애자 다음으로 성병에 안전한 집단이니 혐오를 조장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모든 성적소수자를 한데 묶어버리죠. 이건 매우 효과적이에요. 사람들은 그 헛소리를 듣고 조종당하죠. 트위터 이반봇(@iban_bot)의 한마디는 이 문제를 잘 짚어내고 있어요.
[quote style=”1″]남성이 여성에게 성범죄를 저지르면 그 남성이 죽일 놈이고, 남성이 남성에게 성범죄를 저지르면 남성 동성애자가 죽일 놈입니까? 아니 그런 논리가 어딨어?[/quote]
조금만 큰 도시에 가도 붉은 간판들이 거리를 물들여요. 단란주점, 안마방, 노래궁, 키스방, 대딸방(글로 쓰기도 참…), 이발소 표시만 뱅글뱅글 도는 수상한 업소들… 사람 좀 모인다 하는 곳은 모두 이성애자들의 환락가에요. 반면 우리의 공간은 매우 한정적이죠.
남성 동성애자들이 그렇게 문란해 보여요? 남성 동성애자 중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왜 소수자인, 그래서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남성 동성애자들의 성범죄가 충격적으로 보일까요? 그건 이성애자들의 성범죄는 이미 흔하디흔하기 때문이에요. 반면 우리는 특수한 집단이기 때문이죠. 궁금하면 지금 밖에 나가 성희롱을 해보세요. 뉴스에 안 나와요. 목사님이 성범죄를 저지르면 뉴스에 나올 수도 있지만요.
저들이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에 대한 언급을 상대적으로 덜 하는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하기 적당한 대상이 아니니까요. 남성 동성애자들만 집중 공격해도 대중의 혐오를 생산해서 우리 모두를 공격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그들이 원하는 건 공포심이라 생각해요. 그것만 이루면 미션 컴플리트, 게임 오버죠.
성 소수자를 존중한다고 아이들이 막 성소수자가 될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몰라요. 사회가 변하면 커밍아웃도 늘 거에요. 그건 성 소수자의 수가 늘어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자신이 성 소수자임을 선언하는 사람이 늘 뿐이죠. 우리를 배척하면 여러분의 게이 아들은 아마 평생 이성애자 코스프레를 하며 괴롭게 살 거에요. 그건 그 자신에게도, 함께 사는 배우자와 또 그 자녀들에게도, 그리고 그의 부모님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트랜스젠더들의 토크쇼 ‘XY 그녀’를 방송한다고 막 아이들이 성별을 바꾸려 할까요? 웃기지도 않아요. 전우치나 홍길동도 아니고 겉모습 바꾸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요? 그게 방송 좀 보고 흥미 생겨서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이성애자가 동성을 사랑하는 게 가능해요? 그럼 그 사람은 이미 이성애자가 아닌 거에요. 전염되는 거 아니에요. 하고 싶어도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뉴스는 권력과 흥미에 따라 선별되죠. 그리고 ‘개독’은 그것을 확대재생산하고 일반화시키죠. 우리 집단의 일반적 속성으로 만들어요. 저희는 구분되고 배척당해요.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지하로 숨게 되었죠. 그렇게 우리는 서브컬쳐를 형성하고, 집단에 대한 외부의 편견은 심해지는 악순환에 빠지죠. 그런데, 우리 중 외관만으로 구분되는 자들은 숨어 살 수도 없어요. 물론 그렇다고 사회에 녹아들 수도 없어요. 그게 저에요.
조금씩 조금씩 죽이는 좋은 예
‘개독’은 어떤 사람에겐 조금 기분 나쁜 정도의 존재일 수도 있겠죠. 그냥 그들의 말을 안 들으면 그만이겠죠. 하지만 제게는 저를 바라보며 칼 들고 서 있는 도적 떼와 같은 실체에요. 제 성 소수자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은 분명 우리를 살해하고 있어요.
매주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설교로 죽이죠. 신문에 광고를 내서 죽여요. TV에 나와서 얼굴 빳빳이 들고 악마 같은 단어를 내뱉으며 죽어요. 이백몇십 개나 되는 조직을 만들어 죽여요. 카톡을 돌리고 문자를 돌려서 죽여요.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의원실에 전화와 팩스를 넣어 죽여요. 조금씩 조금씩 한 명 한 명.
내일 그것이 제 차례가 될 수도 있어요.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지인을 만나면 내심 안심해요. 휴, 아직 무사하시구나. 그냥 내버려둬도 힘든 우리를 달달 볶고 괴롭히는 저들이 전 싫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그들을 증오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러지는 않을래요. 잘못을 지적한다고 증오하는 것은 아니에요. 판검사들이 다 제소자들을 증오하겠어요? 그저 사실을 이야기할 뿐이에요. 그건 그들의 인권과는 관계가 없어요. 그들은 분명 잘못을 저지르고 있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있어요. 그 행위는 막아야 해요. 이천 년 전 쓴 책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죽어가는 건 막아야 해요. 일부 광신도 집단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는 건 막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 지적하는 거에요.
좀 웃겼던 게, 레미제라블이 개봉했을 때 얘기에요. ‘개독’마저 이것이 기독교의 사랑과 관용과 용서를 잘 보여주는 기독교영화라며 극찬을 했어요. 생각해봐요.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기독교인이에요. 주인공도, 악역도요. ‘개독’들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미리엘 주교일까요, 죄인은 심판 받아 마땅하다며 평생 스토킹으로 장발장을 괴롭히는 자베르 경감일까요?
저와 같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필요해요. 그것이 트랜스젠더죠. 저희를 비트랜스젠더들과 구분하기 위한 이름이 필요해요. 마찬가지로 저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필요해요. 선량한 기독교인들과 구분하기 위해서요. 흔히 통용되는 단어가 ‘개독’인 것이죠. 그러나 ‘개’라는 접두사가 가진 부정적이고 비하적인 뉘앙스는 저도 인정해요. 부정적인 건 그러려니 하는데, 비하적인 건 좀 걸리긴 해요.
하지만 이 부분을 딱히 고칠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만일 독일에 새로운 파시스트 정당이 출연해서 머리 빡빡 깎고 하켄크로이츠를 온몸에 문신한 사람들이 국회의원에 나왔다고 가정해봐요. 독일인들은 그들을 무어라 부를까요? 파시스트? 네오나치? 뭐라 부르든 매우 공격적이고 비하적인 표현일 거에요. 그들에게도 명칭은 필요해요. 그리고 그 공격적이고 비하적인 명칭은 아마 딱 어울릴거예요. 제게 있어 ‘개독’들은 ‘개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하지만 소제목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그게 마음에 걸리시는 분이 있다면, 고치려는 노력 정도는 해볼께요.
뭐라고 부를까요?
사실 개독이라는 명칭을 쓰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 다른 이유도 있어요. 한국교회 언론회의라는 곳에서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에 개독교, 먹사 등 기독교 폄하 단어에 대한 사용 금지를 요청했는데, ‘해당없음’으로 결정되기도 했어요. (관련 페이지) 그래도 비하적인 단어는 좀 고쳐보도록 할게요. 아… 나 노력한다. 쓰담쓰담.
‘한국 보수 기독교계 일부 인사들’이라는 표현은…. 트윗의 글자 수 제한이 아까워서 기각!
그럼 이제 호칭에 대해 고민해볼게요. 힘드네요. 호개호독을 못하다니요. 일단 기독교의 뉘앙스를 배제한 맘몬교도라는 명칭을 생각해봤는데요. 어렵죠? 기독교나 개신교를 빼면 참 힘드네요.
선량한 많은 기독교인마저 비하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기독교 혹은 개신교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이름을 찾기는 힘들어요. 그들은 실제로 기독교인의 부분집합이니까요. 그 점은 정말 죄송해요. 싫으면 자정하세요.
괴독교는 어떨까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듣보잡 괴종교단체니까요. 괴신교도 괜찮겠네요. 아님 개신교의 일부 세력이니 세 글자 중 한 글자만 써서 개라고 할까요? 동음이의어 때문에 그건 좀 곤란하겠네요.
그럼… 두두두두두! 여기에 투표에 붙입니다! 지금 바로 댓글 다세요! 투표율 0%면 그냥 개독교로 가겠습니다.
개독교의 이름을 정해주세요!
1. 개독교 유지
2. 맘몬교
3. 괴독교
4. 괴신교
5. 개 (동음이의어 방지를 위해 스타카토로 발음한다)
6. 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