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근혜 인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핫이슈다.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 김종훈,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내정자, 김학의 법무차관, 국방부 김병관 장관 내정자까지 줄줄이 자진사퇴했다. 보통 인선은 ‘버티면 이긴다’라는 자세로 들어간다. 그러니 말이 자진사퇴지, “버틸 수가 없다.”에 가깝다.
인선은 냉정해야 한다. ‘겉보기를 넘어선 실제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알고 보니 훌륭한 놈, 알고 보니 못 써먹을 놈 등을 판별하는 것 말이다. 그런 판별의 과정에는 온갖 왜곡과 착시가 끼어든다. 그 착시를 지배하는 자가 우뚝 서고 그것에 놀아나는 자가 깔개가 된다. 그런 착시 중 가장 보편적인 것 한가지가 바로… “자이언 효과“다.
자이언 효과의 자이언은, ‘자이언트’의 줄임말로, 도라에몽의 등장인물이다. 미래에서 온 둥그런 로봇 고양이 도라에몽의 도움을 받는 주인공 노비타(진구)를 괴롭히는 덩치 크고 힘세고 성격 나쁜 조연 다케시(퉁퉁이)의 별명이다.
자이언 효과, 평소에 나쁘게 사는 게 유리하다?
이 녀석이 바로 그 유명한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것” 격언의 주인공이다. 이 녀석은 원래 만화책에서나 TV 시리즈에서는 못돼쳐먹은 캐릭터의 대명사인데, 어째서인지 유독 극장판 도라에몽에서는 알고보니 진구에게 속깊은 우정을 느끼는, 즉 외관은 심술맞지만 근본적으로는 선한 녀석으로 나온다.
그러자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원래 무척 나쁜 놈인데, 그런 식으로 한번 착한 구석을 살짝 보여주니까 어째서인지 굉장히 착한 놈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걸 보고 나면 심지어 TV판을 다시 볼 때도 ‘저 자식이 나쁜 짓을 하는 게 사실은 다 속 깊은 선의가 있겠지’라는 식으로 재해석까지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이언 효과는 여기에서 착안한 심리효과다. 항상 글러 먹었다가 반짝 좋은 일 하나 하면 매우 근본적으로 좋은 녀석으로 보이고, 반대로 항상 착하다가 삐끗 한 가지 잘못하면 매우 근본적으로 못된 놈으로 보인다는 현상. 심리학의 귀인 이론에서 당연히 이미 더 학술적 설명과 용어를 만들어놨겠다 싶지만, 이미 케로로, 은혼, 크로마티고교 등 걸출한 개그만화들에서 인용되곤 할 정도로 꽤 대중문화적으로 보편화된 이 용어가 딱 좋다.
진보세력, 억울하겠으나 초연해야 한다
이름을 워낙 많이 바꿔서 헷갈릴지도 모르겠지만 새누리당의 삽질은 한두 해가 아니다. 이 정도로 열심히 ‘글러 먹은 놈’ 밑밥을 깔아두면, 길 가다가 깡통 하나 주워서 휴지통에만 넣어도 성자의 후광이 느껴질 만한 상황이다. 자이언 효과에 아주 악성으로 빠져들어 갈 분들, 즉 현 정권이 삽질을 잠시라도 그만두기만 해도 만세 외치며 지지자가 되어줄 분들이 최소 2천만이라는 말이다.
이에 반해 어제 모 인권운동가는 성희롱으로 완전히 이미지를 망치고 사실상 논객계에서 퇴출되다시피 했다. 그는 이전까지 사람들에게 너무나 훌륭한 이미지로 보였다. 교수라는 지적인 이미지에, 오랜 시간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며 청렴함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사적으로 행한 성희롱이 드러났고, 우리 앞에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그의 복귀는 매우 힘들어 보인다.
진보진영에게 이 자이언 효과는 보통 억울하게 작용한다. 예로 진보에서 5만큼 비난받을 행위를 하고, 이전에 표방한 이미지와 불일치함에 따른 실망을 5만큼 주는 경우가 있다. 이에 반해 보수 측에서, 9만큼 비난받을 행위를 했는데, 불일치로 인한 실망은 주지 않는다고 쳐보자. 짜잔, 잘못의 크기가 더 작은데도 더 욕을 먹는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보통 진보는 행위에 비해 훨씬 욕을 많이 얻어먹는다. 그럼에도 자이언 효과를 들먹이며 실드를 쳐서는 곤란하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공을 봐야 한다고 하거나, 그가 저지른 잘못 이상으로 큰 욕을 먹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평소에 표방한 이야기와 행위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비판은 당연하다. 불일치 자체가 큰 죄냐고 묻는다면, 말과 행동이 다르면 당연히 행위자에게 신뢰를 가지기 힘들지 않겠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객관화된 행위 판단에 의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행위 비판’ + ‘불일치 비판’ + ‘(막연한 반감을 포함한)진영 판단’의 총합이다. 여기에서 ‘행위 비판’에만 초점을 맞추면 도리어 대중에서 멀어지는 결과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우리부터 자이언 효과에 속지 말자
새누리당이 뭐 하나 잘하면 정말 좋아 보인다. 박근혜가 한 명이라도 인선에 제대로 성공하면 좋은 인선을 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미 시작이 윤창중 아니었나?
이럴 때일수록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 안 하던 짓을 해서 좋은 쪽으로 깜짝 놀랄 때, 그 사건이나 행위 자체를 환영해주는 것은 좋다. 다만 그걸 “상황 끝 개과천선 완료”라고 결론짓지 말고 더욱 냉정하게 계속 관심 기울여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순간 잘한 일이 있으면 단호하게 칭찬해서 매듭짓고, 다시 원래의 압도적인 삽질들에 대한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식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이유다.
–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비리백화점 인사라도 끝까지 밀어붙이곤 하던 각하가, 어느 날 반짝하고 문제적 장관 후보 한 명을 낙마시킨다든지.
– 부유층 대기업 지역유지들 등 기득권 편들어주기에 올인하고 그들에게 불리한 법이란 법은 죄다 파토냄으로써 권력을 누려온 S당이, 어느 날 반짝하고 부유층 증세 관련 떡밥을 던져본다든지.
– 날치기와 직권상정으로 토론과 견제과정을 건너뛰는 것이 일상인 S당 국회의장이, 어느 날 반짝하고 여야가 법을 합의했으면 좋겠다… 라고 언론보도에서 간지나게 한마디 던진다든지.
– 자기들의 장사질에 유리한 가부장적 수구 공안 사회를 위해서라면 저널리즘의 비판적 품격 따위는 깨끗하게 시궁창에 흘려보내는 조선일보가, 어느 날 반짝하고 비리요소 넘치는 검찰총장 후보를 반대한다든지.
– 한화가 우승한다든지…
(*주: 지난 정권에 대해 수년 전에 썼던 http://capcold.net/blog/4071 내용의 재활용인데, 위화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