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집에 처음으로 컴퓨터라는 것이 들어온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로 오락기를 집에 들일 수가 없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컴퓨터를 사달라고 떼쓰는 필자의 청을 부모님께서 갑자기 순순히 들어주셨던 생각이 잠깐 난다. 대체 왜 사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486 CPU에 8MB RAM이면 그리 나쁘지 않은 사양이었다. 심지어 CD-ROM은 2배속이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리 없었다! 아마 지금은 486 컴퓨터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겠지만… (물론 좀 더 잘 사는 집에는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펜티엄’ 컴퓨터가 있었다.) 처음 컴퓨터를 켰을 때 화면에는 알듯 모를듯한 화면 하나가 떠 있었다. 처음에는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서야 그게 Mdir이라는 응용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아, 이제는 Mdir을 모르는 독자들도 꽤 있을 것 같아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냥 DOS시절에 유행했던 탐색기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화면은 아래와 같이 생겼다.
착한 아이의 순수한 마음에 불을 당긴 남자의 게임 DOOM
아무튼 감격적인 첫 부팅 후 아래위로 화살표 키를 눌러보다가, ‘DOOM2’ 라는 이름을 가진 디렉토리(지금으로 말하면 폴더)를 정말로 운명처럼 발견하였다. 당시 필자는 오락실이나 가정용 오락기 게임만 해봤던지라 그 폴더의 정체가 뭔지, 그리고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당연히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어렸던 필자는 용감하게 그 디렉토리로 들어가서 녹색으로 빛나는 DOOM2.EXE를 운명처럼 실행시키고 말았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화면이 뜨는 것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순진했던(!) 필자는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화면을 보고 매우 당황해했다. 갑자기 내장을 다 드러낸 괴물같은…아니 괴물이 눈앞에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앞에는 이상한 총 같은 걸 든 머리가 좀 벗겨진 아저씨도 있고…당시에는 이게 게임이라는 것조차 몰랐었다. 아무튼 뭐가 뭔지 잘은 몰랐지만-대개 사람들이 그러하듯-엔터를 마구 쳤더니 게임이 시작되었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바로 그 화면이 필자의 눈앞에 펼쳐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조작법이고 뭐고 아무것도 몰랐기에 이 키, 저 키 아무거나 마구 눌러 보았다. 우연히 Ctrl 키도 눌러서 권총 몇 발 쏴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더 이상 게임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곧 게임을 종료시켜 버리고 말았다. 게임을 종료하는 방법도 사실 몰라서 우왕좌왕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것이 필자와 DOOM 시리즈와의 첫 대면이었다.
필자는 이 날의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한동안 DOOM2 디렉토리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었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이것이 매우 유명한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에야 아주 가끔 생각나면 추억을 되짚으면서 하는 게임이지만, 당시만 해도 DOOM은 필자에게 정말 새로우면서도 색다른 경험이었던 게 분명하다. IDDQD, IDKFA가 무슨 단어인지 안다면 당신도 필자와 같은 경험을 해봤다는 소리다. 힌트를 주자면 show me the money?
사실 DOOM 시리즈는 현재 유행하고 있는 FPS 게임들-카운터 스트라이크, 콜옵듀티, 하프라이프 등-의 시조가 되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출시 당시에 DOOM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 이전에 울펜슈타인 3D라는 게임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픽이 DOOM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DOOM은 FPS게임 최초의 네트워크 플레이를 지원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DOOM에 빠르게 빠져들었다. 당시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DOOM에 중독된 나머지, 많은 회사들이 DOOM 중독으로 인해 아침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출근하는 직원들에 대한 불평을 쏟아놓을 정도였다.
그 인기 덕분인지 지금도 DOOM을 즐기는 사람들이 꽤 있고(…) 그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DOOM의 새로운 버전을 출시하기도 한다. 좀 더 어려운 난이도의 DOOM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Ultimate DOOM이 나왔었고, 최근에는 좀 더 잔인한 버전의 DOOM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brutal DOOM 이라는 버전까지 출시되었는데, 너무 잔인해서 차마 짤방을 실을 수가 없었다. 뭔지 궁금한 사람들은 스스로 찾아보시길.
DOOM, 총기난사 사건의 원인으로 주목받다(?!)
그런데 게임과 심리학 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왜 DOOM 얘기를 하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DOOM은 얼마 전 미국에서 일어났던 한 총기난사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지적받았다. 1999년에는 미국의 한 고등학교(Columbine High School)에서 재학생들에 의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범인들을 포함한 14명의 학생들과 한 명의 교사가 사망하였다. 그런데 조사 결과 범인들이 DOOM을 즐겨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폭력적인 게임이 현실 세계에서의 폭력을 ‘유발’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두 범인 중 한 명인 Eric Harris는 특히 DOOM에 심취해 있었는데, DOOM과 관련된 소설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DOOM의 맵을 직접 만든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Eric은 자신이 만든 맵이 자신이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라고 생각했다고까지 한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서, 폭력적 게임에 대한 거센 비난 여론이 일었는데, 애초부터 게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상원 의원 Joseph Liberman 까지 가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계속됨에 따라 미국심리학회(APA)는 2005년에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성명은 폭력적 게임이 폭력적 행동/사고/감정을 유발하며, 친사회적 행동(prosocial behavior)을 감소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 마디로 APA는 폭력적 게임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또한 2009년에는 AAP(American Academy of Pediatrics)라는 단체에서도 같은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 성명에서는 폭력적 게임의 해악을 흡연, 음주 등에 비교하면서, 폭력적 게임이 비슷한 정도의 해악을 가지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폭력적 게임을 규제하려는 여러 정치적 움직임-주로 청소년에 대한 폭력적 게임 판매 금지-으로 연결되었는데, 그 중 캘리포니아 주의 경우가 특히 주목할 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주에서 폭력적 게임 규제 법안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주지사, 즉 ‘터미네이터’ 아널드 슈워제네거였다. 그는 법정으로까지 이 법을 끌고 가서 통과시키기를 원했는데, 첫 번째 판결은 그에게 실망스러웠다. 하급 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는 결국 이 법안을 미국 대법원(SCOTUS)까지 가져갔다. 폭력으로 흥한 자, 폭력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망하게 만들려 시도했던 셈이다.
게임의 폭력성을 주장한 터미네이터, 법원에서 패소하다!
하지만 역시 터미네이터의 시대는 가 버린 것이었을까. 그의 규제법안 입법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미 대법원은 2011년 6월 27일, 결국 주지사의 패소(7대 2)를 선언하고 말았다(사건 이름 : Brown v. Entertainment Merchants Association). 특히 주목할 것은, 미 대법원이 앞서 언급했던, ‘폭력적 게임은 현실 세계에서의 폭력을 유발한다’는 APA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APA의 주장이 불충분한 증거에 입각해 있고, 잘못된 방법론을 사용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는 곧 전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APA의 주장이 비전문가인 대법관들에 의해 기각된 것으로, 폭력적 게임의 유해성을 강조하던 일부 심리학자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다만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현재 이 문제와 관련된 심리학자들의 의견은 통일되어 있지 않고, 앞으로 소개하겠지만, APA의 주장과 상반되는 의견을 가진 연구자들도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APA일까, 대법원일까?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게임은 심리적으로 유해할까, 그렇지 않을까? 오히려 이득이 될 수도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 물음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 문제는 비단 게임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미디어와 관련이 있다. 미디어가 사람들(특히 아이들)을 망친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고, 멀리는 그리스 철학자들까지 관련이 있는 매우 오래 된 논쟁거리이다. 하지만 이 연재에서는 그러한 모든 논의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며, 심리학과 관련이 있는 것만 다룰 것이다.
맨 먼저 살펴볼 것은 애초에 게임(미디어)이 심리학적으로 해롭다는 주장이 어떻게 제기되었는지 하는 것인데, 이것은 다음 글에서 다룰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Bandura라는 심리학자의 사회 인지 이론(Social Cognitive Theory)이라는 것을 살펴볼 것인데, 이 주제만 해도 많은 논쟁거리를 안고 있다. 그러면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이 글은 여기서 맺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