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는 문서로 말한다 ②」에서 이어집니다.
역시 예전 직장에서 있었던 얘기다. 일반적으로 응찰 전에는 입찰에 참여할지 말지, 참여한다면 어떤 기업과 파트너십을 구성할지, 어떤 목적(실리를 따진 이익 위주 또는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시장 진입/사수를 위해 공격적)으로 수주할지 등을 정하는 회의가 있다. 또 새로운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전략도 짠다. 이런 일을 위해서 무수한 ‘전략회의’가 열리고, 노력이 퍼부어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회의에서 시장과 경쟁 상황만을 다룬다. 발주처는 뭘 하려고 하는지, 경쟁사들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갖은 정보를 늘어놓고 고민을 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자기 회사에 대한 분석이 없는 것이다. 보고서 구석에 박혀있는 회사 로고만 지우면 도대체 어디서 만든 자료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물론, 경쟁사 현황분석에 빠져있는 회사가 자기 회사이기는 하겠지만, 꼭 그렇게 어떤 회사에서 만든 전략인지를 알아야 할까?
다른 경쟁사의 문서를 구해봐도 대략 비슷했다. 업계에 무슨 이런 관행이 있나? 옆 사람의 설명인즉, 워낙 자기 회사 현황에 대해서는 잘 알기 때문에 생략하는 것이란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이게 다 3C분석이라는 기본을 지키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었다. 발주처(Customer), 경쟁사(Competitor), 자사(Company)를 놓고 분석한다는 기본 틀을 모르거나, 무시했거나, 잊어서 생긴 일이다. 실제 사례가 있다.
Company가 빠진 3C 분석
어떤 기업이 아프리카 시장에 진출하려고 한다. 예상되는 발주처와 그들의 사업계획을 꼼꼼히 분석하여 정리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경쟁사들의 활동을 정리한다. 그 결과를 늘어놓고 목표 시장(Target Market)을 결정하려고 한다. 물론, 자사에 대한 분석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생략.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회사가 수행할 수 있는 분야가 매우 한정되어 있다.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해보지 못한 분야가 있기 때문이다.
해보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다는 용감무쌍(!)한 사람이 가끔 있는데, 그 기백은 가상하지만 프로젝트의 세계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내가 존경하는 예전 상사가 간단히 정리한 바 있다. “프로젝트 바닥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이 존재한다. 수주를 해본 인간과 아직 못한 인간” 그렇다. 발주처는 계약업체의 실적을 쌓아 주거나 경험을 늘려주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예산 안에서 안전하게 공사를 완수할 업체를 선별할 뿐이다. (그래서 수주업체가 새로운 분야에 진입하려면 뭔가 과감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
앞선 두 분석(발주처, 경쟁사 분석)에 이 회사가 수행할 수 있는 분야를 엎어보니 Target Market이 1/3 정도로 줄어든다. 어머, 우리 시장이 줄어들었네! 하며 실망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실망할 필요가 없다. 언감생심, 남의 시장을 넘보느라 공연히 침 흘리던 입을 고이 닫아주는 것뿐이니까. 3C 분석이 제대로 되어야 다음 단계인 STP (Segmentation, Targeting, Positioning) 전략 수립으로 넘어갈 수 있다.
즉, 마케팅 전략을 짜려면 3C > STP > 4P로 이어지는 기본적인 틀이 머릿속에 들어있어야 한다. 분야마다 사안마다 다 다르지만 틀이 있기 마련이다. (틀이 없으면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다음에 소개하기로 한다.) 어떤 국가의 개요에 대해서 설명한다면? 대략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는 틀이 있다. 그 외에 특별한 사안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기본적인 틀을 설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 나라에 도착한 첫 인상부터 쓴다면? 그건 우리가 말하는 문서가 아니다. 문학이다.
파워포인트를 잘 다루는 것이 문서력이다?
문서를 만들 때 필수적인 생각의 틀을 얘기하면, ‘보고서의 틀’로 착각하는 분들이 꼭 있다. 그리고, 그 착각은 곧장 ‘정해진 양식’으로 전락한다.
국내 유수의 몇몇 그룹사에서 모든 문서를 파워포인트로 만든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 전혀 프레젠테이션하지 않을 출장품의서와 사무용품 구입결의서까지 파워포인트로 만들고 있다. 궁금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탐문 끝에 알게 된 사실에 어이가 없어졌다.
1997년 외환 위기는 여러모로 우리 기업들에 자극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돈 내고 컨설팅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도 외국의 대형 컨설팅 회사에 말이다. 전략으로 유명한 초대형 컨설팅 회사에 일을 맡긴 국내 대기업들은 그들이 보고하는 내용보다 그 어마무시하게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에 압도된 모양이었다. 그래, 저것이야말로 선진 기법이군. 우리 모두 저렇게 하자. 앞으로 모든 문서를 파워포인트로 만들어라… 그래서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든 문서는 파워포인트로 작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컨설팅 회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것이야말로 참 웃기는 일이다. 컨설팅 일의 최종 산출물(Output)은 고객에게 제출하는 최종보고서다. 착수보고서, 중간보고서와 마찬가지로 고객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한 후 서면으로 제출한다. 만약 보고서를 워드로 작성하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파워포인트로 만들면 이중으로 일하게 되어 노력이 낭비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파워포인트로 워드 문서 만들듯이 해서 고객에게 서비스한다. 그래서 파워포인트 화면에 글씨가 가득하다.
컨설턴트는 고객에게 보일 문서를 자기들끼리도 그대로 본다. 즉, 동일한 문서로 내부 회의하고, 고객에게 프레젠테이션 하고,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고, 마지막에 그대로 출력하여 제출한다. 컨설팅 일에는 그 특성상 문서작성에 파워포인트를 쓰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효율적이다.
그럼, 그들의 고객은 어떤가? 컨설팅 업체가 아닌 모든 기업들의 결과물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역시 대부분이 문서다. 문서는 압도적으로 워드를 사용한다. 그러니까 결과물은 워드로 만들 거면서, 결과물까지 가는 과정에서는 회의와 보고 등에 엉뚱하게 파워포인트 ‘작품’을 만들고 있다. 회의실 상석에서 보고받는 사람의 눈은 조금 더 행복할지 모르겠지만, 그걸 위해서 직원들은 안 해도 될 노가다를 뛰면서 야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숭배해 마지않는 IT계의 거물들 ─효율 극대화로 구루가 된 인물들─은 파워포인트 사용을 싫어했다. (파워포인트를 싫어한 텍 업계의 거장들 참고) 특히, 프레젠테이션 분야에서 신의 반열에 오른 스티브 잡스는 이런 독한 말씀까지 남겼다. “지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는 놈은 파워포인트가 필요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내용을 줄줄이 적어놓고 읽는 데나 쓰는 것이 파워포인트라는 것이다. 물론, 경쟁사인 Microsoft를 싫어하기도 했지만, 말씀은 맞는 말씀이다.
물론, 여기서 파워포인트를 창조한 조물주 빌 게이츠는 예외다. 하지만 그도 파워포인트에 글씨를 꽉 채워서 쓰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 역시 예전에는 문장을 나열해 놓고 지루한 강연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스티브 잡스와 비교당해 가면서 절치부심한 결과, 최근에는 많이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파워포인트를 사용할 때는 내용을 단순화해 시각에 호소하라는 것이 파워포인트를 창조한 분의 조언이다.
문서 작성에 파워포인트를 사용하는 데는 당장 보이는 시간과 노력의 낭비 말고도 치명적 약점이 있다. 파워포인트에는 문장을 간략하게 기술해야 하는 공간적 제약이 있어서 작성자들이 현상을 단순하게 나타내도록 강요한다. 복잡한 사실을 간단하게 나타내는 기술은 대단한 내공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는 실무자들은 그럴 여력이 별로 없다. 그래서 간단한 사실만을 선택하여 간단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생긴다. 결론적으로 보고서 내용의 깊이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이전보다 나아지려면 새로운 형식에 도전하라
남의 만들어 놓은 틀에 익숙한 것은 보고서의 기본이다. 그러나 기본에만 충실해서는 항상 기본적인 대우만을 받을 뿐이다. 최근 ‘고수의 생각법’이란 책을 낸 국수 조훈현은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스승을 만나 최고의 가르침을 물려 받더라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지 않는 한 최고가 될 수 없다.
아니다 싶으면 네 방식대로 가라. 시키는 대로만 해서는 한계를 넘을 수 없다. (조훈현)
이런 조훈현의 문하에서 조훈현 ‘류’를 벗어나 자신의 스타일을 이룬 제자가 나왔다. 스승의 말씀대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이룬 그 제자는 스승의 타이틀을 다 뺏어갔다. 이창호다. ‘청출어람 청어람’이 되려면 푸른 빛이되 쪽빛과는 달라야 한다.
문서력에서도 마찬가지다. 맨날 선배들 문서나 베껴서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1만시간이 아니라 10만시간을 일해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는 1만시간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_링크) 선배들에게 배우되 거기서 안주하지 말고 자신만의 스타일에 도전해봐야 한다.
한때 ‘1 Page Proposal’이라는 얇은 책이 유행을 했다. 제안서를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정말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서 1페이지에 담아 내라는, 상당히 유익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팔리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사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책의 내용대로 실천해 본 사람은? 내 개인적으로는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실제로 써 봤다.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싶은 기업을 설득하는 미팅을 준비하면서 미팅 어젠다를 1 Page Proposal이 제시한 형식 그대로 만들었다. 어젠다를 받아 든 팀장이 묻는다.
“이건 또 뭐냐?”
“요새 최신 유행인 제안서 양식입니다.”
“그래?…”
그 날 상대방 회사 반응도 비슷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최신, 첨단, 트렌드 이런 것에 약한 경향이 있다. 이걸 노려봤다. 물론 이때 팀장은 상당히 변화에 포용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팀장 같았으면 “이 자식, 또 잘난 척하고 튀어 보이려고!” 하면서 던져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보고서를 바꾸려면 이렇듯 조직문화가 (혹은 보스가) 받아들여 줘야 한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 역시 시도해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순서를 거꾸로 쓰는 보고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서 순서를 거꾸로 쓴 적이 있다. 출장결과 보고서였는데, 내게는 너무나 의미있는 보고서였다. 출장 한번으로 향후 몇 년간 먹을거리를 마련해 온 역사적인 출장이라 보고서에도 뭔가 임팩트를 주고 싶었다.
일반적인 출장보고서는 출장개요, 출장중 활동, 결과 등의 순서로 쓰여진다. 난 이래서는 임팩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출장개요를 쓰지 않았다. 출장개요라는 것이 출장자, 출장지, 출장일정 등을 나열하는 것이잖은가. 어차피 출장가기 전에 보고한 내용이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중요한 결과보고서 맨 앞을 다시 차지한다면 좀 억울하다. 그리고 이미 보고받은 내용(누가 언제 어디로 출장을 간다는 사항)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사라면, 어차피 결과보고서의 중요성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개요는 쓰지 않았다.
그리고, 보고서 맨 앞에 출장결과부터 요약했다. 아무리 바빠도 이것만은 읽어달라는 얘기였지만, 만약 보고받는 사람이 진행상황을 모르고 있으면 뜬금없는 얘기가 될 우려가 있었다. 그 다음에 세부적인 내용을 붙였다. 보고서를 받은 팀장이 난처해 하길래 출장개요를 맨 뒤에 달아서 임원에게 보고했다. 일종의 타협이었다. 결과적으로 내 출장보고서의 순서는 ‘결과 – 내용 – 개요’가 되어서 일반적인 보고서와 반대가 되었다.
이 보고서 내용과 관계된 팀장과 임원들에게 참조로 보냈는데,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 그 중에 단 한 명만이 나를 따로 불러 보고서 좋다는 칭찬을 해줬다.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내 보고서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선비가 아닌 장사꾼이지만, 역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보고서를 ‘영업비밀 보호’ 때문에 여기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고객의 요구사항이 바로 생각의 틀이다
보고서든 제안서든 모든 문서는 수요자가 누군지가 가장 중요하다. 일종의 ‘주문 받은 서비스의 제공’이기 때문에 주문자가 뭘 원하는지 (사업개발자들이 Employer’s Requirements 즉, 발주처 요구사항이라고 부르는 이것을)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문서작성에서 강조되는 ‘생각의 틀’을 규정한다.
다음은 직급과 역량의 관계에 대한 앞선 글(상무 같은 이대리, 대리 같은 김전무)에서 한번 소개한 내용인데 다시 소개한다.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일이다. 하루는 어떤 면담에 배석한 뒤 그 면담록을 작성해 가지고 보고하러 들어갔다. 마침 담당 임원이 바뀐 뒤 첫 보고였는데, 보고서를 받아든 그 임원이 갑자기 결재판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네가 블루칼라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내가 군대에서 문서작성으로 한동안 먹어주던(!) 사람인데 고작 회의록을 이유로 내게 블루칼라라니? 흥분을 가라앉힌 그 임원이 나를 앉혀놓고 하는 설명을 들어보니 옛날 작전참모에게서 배운 것이 기억났다. 요점은 ‘지휘관이 바뀌면 보고서도 바뀐다.’ 그걸 잊었던 것이다.
내가 입사해서 처음 모신 상사는 모든 것을 자기만 판단하는, 그러니까 아랫사람에게 위임이라고는 절대 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회의록을 써도 무슨 녹취록을 쓰듯이 누가 뭐라 말하니 그 앞에 누구는 또 뭐라 하더라, 갑이 무엇을 공개하니 을은 말은 못하고 눈이 똥그래 지더라 등등 있는 사실을 그대로 나열하는 보고서를 주문했었다. 모든 것은 자기가 다 판단할 것이니 부하 나부랭이들의 판단, 건의 따위는 필요 없다는 자세였다.
그런데, 블루칼라냐고 일갈한 그 임원은 위와 같은 현장묘사식 보고에 질색했다. 회의록을 쓰면, 우리측 입장은 이렇고 상대방 견해는 저렇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다는 식으로 실무자가 핵심만 짚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오기를 주문하는 것이었다.
같은 내용이지만, 앞선 글에서는 임원의 업무위임이 실무자의 역량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며, 조직적으로 더 가치가 있다는 방향에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순수하게 보고서 작성이라는 차원에서만 보면, 이런 두 방식에 무슨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보고서는 상황에 따라 같은 내용이라도 다른 형식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며, 어떤 보고서를 요구받느냐, 어떻게 최선의 솔루션을 내느냐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고객의 요구에 맞는 문서를 잘 쓴다는 것은 일을 잘 한다는 것과 ‘거의’ 같다. 그 고객이 외부고객이던 내부고객이던 항상 그렇다. 문서를 잘 써서 성공한 사례를 한번 찾아 보시라. 얼마나 많은지(2030성공습관 보고서의 힘).
원문: 개발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