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는 문서로 말한다 ①」에서 이어집니다.
보고서 제목은 신문 헤드라인처럼 뽑아라
(1편에서 소개한) 그 작전참모를 2년간 모시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누구는 인생에서 필요한 건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고 하던데, 가정 형편상 유치원에 가지 못했던 나는 군대에서 그걸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실무적으로 가장 영향이 강했던 건 역시 문서력이다.
작전참모는 매우 실질적인 방법론을 가르쳐주곤 하셨는데, 이것이 그 한 예다.
전방 사단은 근무환경도 열악하고 병력도 많아서 사건 사고가 많았다. 그런 사건은 발생한 부대에서 상급부대로 보고된다. 중대에서 대대, 연대, 사단까지는 전화상으로 보고를 하다가 사단에서 군단에 보고할 때 최초로 문서화 된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사단에서 만드는 보고서도 워드로 작성하면 안 된다. 워드로 작성하면 초안 잡고, 수정하고, 결재받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고, 그러다간 그야말로 날 새는 일이 생길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사단에서 군단에 보고하는 최초 상황보고는 작전처에서 손으로 써서 그대로 팩스로 밀어 넣게 되어있었다.
작전처 장교 가운데 막내이기도 하고, 손글씨가 막강(!)했던 내가 그 담당이어서 평시에도 상황보고 작성하는 연습을 수시로 했다. 그런데 작전참모가 가르치는 작성법은 군단내 다른 사단에서 작성하는 것과 달랐다. 일단 제목을 전혀 다르게 뽑았다. 신문기사 헤드라인처럼 쓰라는 주문이었는데,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다.
상황보고라는 것은 좋은 일로 하는 법이 없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터져서 급하게 보고하는 것이니 시간이 촉박하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 평시에서 전시로 넘어갈지 모른다는 원초적 제약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상황보고와 관련해서 생길 수 있는 위기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고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팩스로 넘기는 상황보고서 첫 줄이 군단에 도착했을 때, 마침 떨어진 적 포격에 통신선이 끊긴다면?” 보고서를 어떻게 시작하겠냐는 것이다.
이럴 때 맥없이 ‘상 황 보 고’라는 넉 자만 넘어오고 끊긴 상태라면? 군단 상황실은 답답해 죽을 것이다. 이것은 ‘안 좋 은 일’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작전참모는 상황보고는 물론 모든 보고서의 중간, 소제목을 ‘신문기자가 헤드라인 뽑듯’ 하라고 가르쳤다. 예를 들어 전방에서 총기 사고가 난 상황이라면, “5xx GP 총기사고 발생(사망 1명) 16:35″이라고 쓰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렇게 써놓고 보고받는 입장에서 읽어보면 군단에서 궁금한 모든 것이 다 들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 다음에는 제목을 풀어 쓴 요약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아래에 비로소 좀 더 세부적인 내용이 들어간다. 이때 내용과 그 순서는 철저하게 군단장에게 맞춘다. 군단 상황실에서 그대로 보고할 수 있도록 작성해서 보내라는 것이 우리 작전참모의 요구사항이었다. 이런 방법론을 토대로 몇 년 동안 실제로 발생했던 상황을 가지고 보고서 작성하는 연습을 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 당시에도 그런 보고서를 다룬 책이 시중에 나왔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뒤로 보고서나 제안서, 기획서 등 문서 작성법을 다룬 책을 꽤 읽었지만, 그만한 통찰력을 그렇게 실감 나게 설명하는 책은 아직 없었다. 실제로 신문기사 제목을 뽑는 분이 쓴 방법론을 참고하시라. ([데스크 칼럼] 제목을 잘 뽑는 3가지 방법)
폴라로이드로 쓰는 보고서
군대에는 배운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군생활을 돌이켜 생각할 때, 나만큼 행운아가 있을까 싶다. 초기부터 유달리 유능했던 분들을 상관으로 모시고 배웠기 때문에 난 분명 행운아다.
사단으로 올라가기 전 소대장이었을 때 모셨던 중대장도 문서 작성을 잘하고 보고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한 장교였다. 전방에서는 봄, 가을로 2주간씩 진지 보수공사를 대대적으로 하는데, 각 급 부대는 공사도 공사지만 그 결과를 보고하는데 애를 먹었다. 진지라는 것이 온 산에 걸쳐서 꾸불꾸불 존재하는 것이라서 일목요연하게 보고하는 것이 곤란했던 탓이다.
당시 우리 중대장은 진지공사 계획을 세우고 나면 소대장들과 이동하면서 작업을 지시하는 와중에 곳곳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어 두었다. 처음에는 왜 그러는지 몰랐는데, 진지공사가 끝나면 확인차 돌아다니면서 전에 사진 찍은 그 자리에서 같은 구도로 다시 찍었다. 진지공사 결과 보고서에는 간단한 공사개요 아래에 주요 포스트 별로 공사 전, 공사 후 사진을 대조하여 붙여두었다.
우리 중대장이 쓴 보고서에는 무슨 구구절절한 설명이랄 것이 없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때가 1993, 94년이었다.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디지털 카메라라는 것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때, 업무에 적용하는 카메라의 용도를 정확히 알았던 것이다. 비록 그 분과 동기생들이 불공정한 처우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바람에 불명예스럽게 군복을 벗었지만, 대대장과 연대장은 그 중대장을 가장 믿었고 안타까워했다.
보고서 작성을 염두에 두며 일을 기획·실행·보고한다
내가 소대장으로 배치 받던 1993년 겨울에는 전방에 계획된 지뢰지대를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일이 있었다. 상급부대에서는 작전개념의 변경만 하달되고, 실제 적용은 전투부대에서 작성하여 보고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연대 작전장교가 본인만 일을 편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일명 ‘호치키스 장교’다.
상급부대에서 내려온 지시를 연대에 맞게 적용해서 하달하여 예하 대대, 중대가 통일되게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부대 지시사항을 그대로 내려 보낸 다음, 중대급에서 각양 각색으로 올라온 보고서 중에 가장 맘에 드는 것을 골라 다른 중대들도 그것에 맞추도록 다시 지시를 내린다. 12개 중대 가운데 11개 중대가 밤새 만든 보고서를 남이 만든 양식에 맞춰 다시 만드는 것이다. 나는 다행히 늘 예외적인 1개 중대에 속해 있었다. 보고서를 잘 쓰는 중대장 덕에 두 번씩 같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우리 중대장은 보고서 쓰기를 서두르지 않았다. 다른 중대장들이 와서 어떻게 쓸 거냐고 물을 때에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고 대답하곤 했다. 실제로 상급부대 선배에게 지시사항의 배경을 물어보고, 지휘관들의 구상을 감 잡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구상이 확실해지는 순간 일사천리로 적어내려 가는 것이다. 우리 중대장이 구상할 때, 마음이 급해서 우선 쓰기 시작했던 다른 중대장들은 결국 우리 중대장 보고서에 맞추어 다시 쓰는 굴욕을 몇 번이나 맛보아야만 했다.
이런 일이 현재 기업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정말 ‘쌍팔년도’ 군대 얘기일 뿐인가? 지금도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래서 보고서를 잘 쓰는 것이 결국 일을 잘 하는 것이 된다. 보고서에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고, 보고한다. 보고서를 쓰기 전에 보고서의 수요자인 지휘관(상사)과 상급부대(회사)의 의도와 개념을 이해한다. 일의 성격에 가장 적절한 형태로 보고한다. 결국, 일의 본질에 있어서는 20년전 군대 일이나 현재 기업 일이나 같다고 본다.
조금 더 그 중대장 얘기를 하자면, 보고서를 쓸 때 보여준 주도면밀함은 부하에게 일을 시킬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 중대의 소대장은 장교 3명과 중사 1명이 있었는데, 같은 상황에서 동일한 과업을 지시할 때도 소대장 각각의 수준에 맞추어 다르게 설명을 해주었다.
고참 소대장에게는 과거에 유사한 일과 어떻게 다른 지를 간단히 설명하면서 지시를 하고, 당시 막내 소대장이던 내게는 같은 일도 일의 배경, 주변 상황, 세부적인 실행 방법을 직접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현장에 동행하면서 지시를 하곤 했다. 그래서 고참 중위나 신참 소위나 고르게 성과를 내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신참 소위들이 흔히 겪는 시행착오를 최소화 할 수 있었고, 코칭과 리더쉽이 어때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Framework이 있어야 쓸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작전참모는 갓 마흔이 넘었고, 중대장은 스물 여덟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지금의나와 비교해 보면 그들은 그 나이에 어디서 그만한 통찰력을 얻었는지 참 궁금하다. 그걸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내가 공부하다 찾은 가장 비슷한 대답이라고 한다면 MECE를 들 수 있겠다.
MECE는 보통 ‘미씨’라고 읽는데, 세계적으로 경영컨설팅 업계의 종가라는 McKinsey가 컨설턴트들에게 강조하는 사고방식의 핵심이다. 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 가 원문인데 직역을 하자면 좀 까다롭다. ‘상호 배타적이고, 집합적으로 총망라하여’라고 하면 뭔 소리인지 더 모르겠고… 쉽게 말하면 ‘겹치지 않고, 빼먹지 않게’ 정도가 맞지 않나 싶다. 꼭 있어야 할 내용만 꽉 차 있어야 한다는 얘긴데, 쉽지 않다. (MECE만 이렇게 저렇게 설명한 책도 꽤 많다.)
간단하게 위에서 든 총기사고 예문으로 생각해 보자. 제목에 ‘XX사단’을 써 넣어야 할까? 제3자는 모르겠지만, 군단에서 보고받는 상황실에서는 ‘XX사단’임을 다 안다. 각 사단별로 별도의 팩스가 설치되어 있기도 하고, GP 번호만으로도 그게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다. 즉, 거기다 사단 이름을 넣는 것은 맥락상 겹치는 일이니 불필요하다.
날짜는 어떤가? 상황보고의 속성상 발생한 지 몇 십분 내에 보고를 하게 된다. 날짜는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면 정식 보고서에서나 적을 내용이다. 역시 맥락상 불필요하다.
내용이 서로 겹치지 않는가를 살피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눈에 보이는 것들끼리 서로 겹치거나 충돌하지 않는지를 따지는 것이니, 좀 꼼꼼하기만 하면 어렵지 않다. 그런데, 빼먹지 않으려면 어떻게 한다? 어디에서 무엇이 빠졌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전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전체를 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쉽게 얘기하면, 대상에 대해서 전체적인 그림이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써놓고 보니 똑같이 영양가 없는 망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사안에 대해서 미리 정립된 정보의 틀(framework)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프레임 웍’, 미리 정립된 정보의 틀
예를 들어 보자. 나는 직업상 해외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전문성을 논하는 경우가 많은데, 누가 “그 사람 전문가야?”라고 (황당하게) 물어오면 이렇게 대답한다. “그 사람이 지역적으로는 어쩌구, 기능면에서는 저쩌구, 품목 면에서는 이러저러…” 이럴 때 내 머리 속에는 내가 개발한 ‘3각 역량모델‘이 이미 들어있어서 여기에 맞춰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이든 자기가 개발한 것이든 이렇게 어떤 틀이 있으면 훨씬 편하고 안정감 있게 설명할 수 있다.
위에서 예로 든 상황보고는 그 속성이 뉴스와 같다. 기자들이 뉴스를 작성할 때 어떤 틀에 맞춰 쓰는가? 바로 ‘6하원칙(5W1H)’이다. “5xx GP 총기사고 발생(사망 1명) 16:35″에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결과적으로) 어떻게의 네 가지가 들어있다. 제목이라서 여섯 가지 내용을 다 넣지는 않았다. ‘누가’는 고립되어 있는 GP 성격상 소대원중 누군가일 것이기에 제목에서는 빠졌고, ‘왜’는 조사를 해서 후속 보고에서나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자기가 보고하고자 하는 내용에 맞춰 어떤 프레임웍을 써야 할 지 알고 있다면 보고서는 절반 이상 다 쓴 것이나 다름없다. (올바른 시작이라면) 시작이 반이니까 말이다. 만약 상사 가운데 보고서 초안을 보고 구체적으로 “이것, 저것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 사안의 전체적인 모습이 이러이러한 것이니까”하는 식으로 지적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그를 따르라. 그가 당신을 구원할 것이니.
원문: 개발마케팅연구소
※ 「프로는 문서로 말한다 ③」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