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을 떠나며: 해방 이후 조선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①」에서 이어집니다.
조선에 눌러앉고 싶은 일본인들
1945년 9월 12일 경성 : 때아닌 조선어 강습 열기
경성 YMCA 청년회관 로비에는 어린 학생에서 백발이 성한 노인들까지 삼삼오오 모여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바로 이들은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모인 일본 사람들이었다.
당시 강단에 선 일본인 강사는 이런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센세 (대역)
“조국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으로 발생한 현 상황은 비록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명연자실하여 넋 놓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조선어를 배워 새로운 조선에 우리도 협력합시다.”
이렇게 수강생들을 격려했다.
당시 조선어 강좌는 1945년 9월 12일부터 3개월 과정으로 일주에 3회, 90분씩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수강생을 모집하자마자 희망자가 정원을 넘어서는 바람에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학급을 증설해야 할 정도였다.
미군에 대한 불안: 일본인 위안부를 모집하자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처음 2~3일 동안 매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조선인들이 독립만세를 외쳐대는 통에 일본인들은 두려워서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게다가 북한에는 이미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고 인천에도 곧 미군이 상륙한다는 소문이 돌자
일본인들은 점령군이 자신들을 어떻게 대할지 몰라 몹시도 불안해했다. 심지어 일본인들은 자체 회의를 열어 일본인 여자들 중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전문 위안부를 모집하여 따로 유곽을 열면 어떻겠냐는 주장도 하고 있었다.
차라리 성매매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부녀자에 대한 성폭력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지 않겠냐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군은 기강이 잘 잡혀 있어 걱정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군이 진주하고 치안이 안정되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난 갈 곳을 찾느라 정신이 없던 일본인들은 서서히 조선 땅에 눌러앉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떠나는 일본인들
밀항선, 도둑배
패전 당시 해외에 있던 일본인들은 어림잡아 총 700만 명에 달했다. 동쪽의 태평양 열도에서 서쪽의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북쪽의 만주에서 남쪽의 인도네시아까지, 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모두 송환선이라는 배를 타고 가야 했다.
다만 한반도는 여타 식민지에 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공식 송환선 외에 밀항선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 밀항선은 도망치듯 떠난다 하여 속칭 ‘도둑배’라고도 불렀다.
한반도에서 돌아간 일본인들을 보면 민간인은 약 70여만 명, 군인은 20여만 명으로 추계하고 있는데, 이들 중 20만 명 정도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한 도둑배들은 위험을 무릅써가며 단기 특수를 노렸기 때문에 돌아갈 때는 빈 배로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승객을 태우지 못하면 하다못해 밀수품이라도 싣고 갔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나중에는 그걸 노리는 해적들까지 등장하게 된다.
송환선 vs 밀항선, 무얼 타고 갈 것인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밀항선과 공식 송환선 중에서 무엇을 탈 것인가는 단순히 교통편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향후 그들의 인생이 걸린 도박과도 같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밀항선의 경우 검역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전염병에 감염될 우려도 있었고, 악덕 업자를 만나면 어렵게 가져온 재산마저 모두 빼앗기고 엉뚱한 곳에 내려놓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밀항선을 타고자 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공식 송환선을 타고 가면 심사과정에서 반출 상태를 면밀히 수색당해야만 했다.
당시 민간인은 1,000엔, 군인은 200~500엔 사이로 소지 금액이 제한됐고, 수하물도 휴대 가능한 보따리 정도로만 제한했었기 때문이다.
두고 가는 공동묘지의 처리
일본인 공동묘지 처리는 큰 고민거리였다. 인천에 사는 일본인들은 그대로 놔두면 안 되냐며 조르고 졸랐지만, 이에 인천시장은 이렇게 큰소리쳤다.
인천시장 (대역)
“아놔, 만일 동경 한복판에 조선인 묘지가 있다면 니들은 그거 그대로 놔둘래?”
일본인
“…”
인천시장 (대역)
“애초에 니들 맘대로 우리 땅에 공동묘지를 만들지 않았음?”
결국 인천시는 공동묘지를 모두 없애고 일본인 유골들은 구덩이를 파서 모두 한곳에 매립시켜 버렸다. 떠나기 전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일본인들은 조상의 무덤까지도 신경 써야 했던 것이다.
38선 이북의 일본인들
무지막지한 소련군의 실체
1945년 8월 말 평안북도 강계: 일본인촌
일본인 촌의 젊은 처자들은 소련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황급히 수수밭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미처 집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다락과 지하실로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여자들은 모두 머리를 잘랐다. 머리를 빡빡 깎은 여성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소문에 모두 까까머리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백주 대낮부터 조선인을 앞잡이로 세워 마을의 일본인 집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나 여기저기를 뒤졌고, 그중에서도 소련군은 유독 시계와 만년필을 좋아했다. 술을 달라는 병사도 있었다. 술을 내주면 순순히 돌아가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들이 술에 잔뜩 취해 다른 집으로 들어가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소련군에게 절대 술을 내주지 않기로 사전 약속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소련군 한 무리가 지나가고 나면 곧 또 다른 패거리가 나타나 이번에는 이불과 담요를 가져갔고,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겠거니 생각할 무렵에는 여군들이 와서 취사도구를 챙겨갔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소련군의 현지 조달 방식이었다.
1945년 8월 말 평안북도 곽산: 충격적인 소련군의 모습들
소련군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당시 한 일본인의 목격담은 다음과 같았다.
“윙~윙~” 소련군이 곽산에 온다는 사이렌 신호가 떴다. 조선 사람들은 겉으로는 환영하는 듯했지만, 사실 그들도 안심할 수 없었고 부녀자들은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 시계나 금붙이 등을 숨기고 있었다.
실제로 소련군은 전투태세로 침공해왔기 때문에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약탈과 폭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런 소련군의 행렬을 보면 모두들 적잖이 놀라게 된다.
“아! 이것이 정녕 현대군의 모습이던가?”
마차를 앞세운 긴 행렬이 이어지고, 긴 장총을 어깨에 걸쳐 걷는 소련군들은 마치 유목민의 모습과도 같았다. 군대의 행렬 후미에는 양과 닭까지 매달고 있었다. 심지어 마차 위에는 부뚜막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소련군들은 개고기는 역시 누렁이가 최고라며, 주인이 있든 없든 길에 나다니는 개가 보이기만 하면 어김없이 총을 쏘아 잡으며 행군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무기와 탄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에서 조달하고 있었다.
또 원래는 철도와 교량 경비를 위해 곽산에 들어왔다지만, 실제로는 기계와 설비를 뜯어 소련으로 실어가려는 목적으로 온 것이었다.
소련군과 대조적인 미군의 모습
그에 비해 미군이 주둔하던 한반도 남쪽의 일본인 목격담은 이렇다. 대략 500~600명 규모의 미군이 마을에 진주했는데 일본인들은 이들이 가져온 장비와 물품을 보고서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아! 일본이 정녕 이런 나라를 상대로 4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였단 말인가?”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언뜻 보아도 미군은 모두들 최신식 무기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오지에 주둔하면서도 침구와 식량, 심지어는 개인이 마실 물까지 휴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군의 현지조달
소련군은 왜 북한에 주둔했나?
원폭 투하로 일본에 대한 각종 이권이 미국으로 대거 넘어갈 듯하자, 소련은 서둘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동아시아 전선으로 뛰어들게 된다. 사실 소련군은 한반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저 바람이 있다면,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하나 그쪽 동네에 만들면 그것으로 만족할 정도였다. 당시 소련의 주된 관심 지역은 동유럽이었지 동아시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도 한반도보다 전통적으로 소련의 목을 조여온 만주지역, 그리고 일본과 이권을 다투던 홋카이도, 사할린 지역을 소련은 더욱 중시했다.
따라서 소련은 애초에 한반도는 별 관심이 없었고 북한을 먹은 것도 만주, 사할린 지역과 연동되는 형태로 이뤄진 것이었다.
소련군의 현지조달의 배경
소련은 2차대전에서 비록 승전국 반열에는 올랐지만, 까놓고 말하자면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2차 대전 중으로 2,500만 명이 사망했는데, 이것은 대전으로 죽은 전 세계 사망자의 40%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였다.
또 전쟁으로 GDP가 17%나 감소했기 때문에 종전 후 소련의 최우선 과제는 무엇보다 노동력 확보와 경제복구였다.
이런 상황과 맞물렸으니,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주둔 비용은 철저히 현지 조달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소련군 병사들의 월급도 북한 재정으로 충당하고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배상 명목으로 수풍발전소를 비롯해 한반도의 주요 공장시설, 광물자원, 생산품 등을 마구 반출하고 있었다.
“아놔, 일본 걸 뜯어가야지. 왜 우리 걸 뜯어가는 건데!”
1946년 1월 초 평양 : 일본인은 소중한 노동력
미소 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북한에 있는 일본인들의 남하 문제를 논의하게 위해 미군 장교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소련군 관계자는 상부로부터 일본인 송환에 관한 지시를 따로 받은 것이 없었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소련군
“일본인들을 그대로 돌려보내기에는 ‘매우 귀중한 노동력’임.”
현지조달과 노동력의 확충
북한을 상대하는 소련의 인식은 철저히 뜯어먹고 보자는 식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생산 설비만 반출해간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생산시설을 가동하여 완제품을 만들어 반출하고, 나중에 생산 설비를 뜯어가는 형식이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방식이었다.
그런가 하면 소련군이 보기에 일본군 포로는 더없이 훌륭한 인적자원이었다. 일본인들 중에서는 고등교육을 배우고 고급 기술을 연마한 엔지니어가 많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애초에 소련군은 일본인들을 본토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1946년 3월까지 남한의 일본인들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북한의 일본인들은 여전히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북한 거주 일본인들의 호구지책
목욕탕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된 학교장
도코 요시마사는 원래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그는 이제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 겨우 찾게 된 것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공중목욕탕의 일이었다.
아침 일찍 욕조에 물을 받고 장작을 때워 물을 데우는 일이라 일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과 대면하면서 그가 받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조선인들은 일부러 다른 사람도 들으라는 듯이 여기저기서 더운물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럴 때마다 그는 “네!”라고 답하며 물을 대령해야 했다.
때로는 꼬마들까지 “이르본(일본)!”이라며 그를 놀렸다. 하지만 먹고살려면 어차피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오히려 더 기분 나쁜 것은 일본인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염장을 지르는 이들이었다.
염장질
“와! 패전 덕분에 목욕탕에서 시중드는 일본인 나리를 다 뵙게 되네.”
─ 정주 소학교 교장 도코 요시마사
로스케 마담이 된 일본 여자들
1945년 가을 함경북도 성진. 이곳의 주택가를 스치고 지날 때마다 나날이 일본인들은 야위어만 갔다. 먹을 것도, 돈도, 입을 것도 점점 궁해 보인다.
그런 한편, 암시장은 성황을 이뤘다. 모두 일본인에게 약탈한 물건들이었다. 시장 한편으로는 사과, 감, 털게, 조선 엿, 육류 등이 쌓여 있지만, 일본인들을 물물교환할 옷가지마저 없어 그저 침을 삼키며 바라만 볼 뿐이었다.
예쁘게 옷을 장식한 소련 장교 부인, 몸을 화려하게 꾸민 조선인 부인 사이로 그야말로 상거지나 다름없는 몸빼바지 차림의 일본 부인이 콩을 바꾸어 가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다.
조선인 냉면 가게나 주막에서 일하는 일본 여성도 늘어났다. 이들은 새하얀 분과 붉은 입술을 한 일명 ‘로스케 마담’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주요 고객은 소련 군인들이었다.
─ 고니시 아키오 세화회 섭외부장
가르치던 학생 집에 식모로 들어온 교사
생활난에 허덕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경영하는 이발소, 여관, 목욕탕 등에서 잡일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녀자들은 부유한 조선인 집이나 소련군 관사 등에 들어가 가정부로 일하기도 했고 농사 한번 지어보지 않은 사람이 중국인 밭에 약초를 캐러 다니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점령 당국이 1946년 1월부터 일본인의 상업활동을 부분적으로 허가하여 일본인들 중에서 담배, 두부, 비누 행상에 나서는 자도 나타나게 됐다. 다만 이런 행상의 경우는 조선인 상권 보호를 위해, 일본인 마을에서만 허용되었다.
수입이 없어 생활이 어려워지자 과거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 집에 식모로 들어간 교사도 있었다. 그녀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일하던 곽산소학교 교장의 딸, 도코 도시에였다.
그녀는 한때 학교의 교사로 있었지만
패전이 되자 한 부유한 조선인 집에 들어가 가정부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원래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의 집이었으니, 조선인 고용주는 그녀를 매우 딱하게 여겼다. 하지만 조선인 고용주가 신경을 써줄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 괴로웠다고 한다.
─ 정주 소학교 교장 딸 도코 도시에
캄차카의 고기잡이 선원 모집
1946년 초 남한에서 일본인의 송환이 마무리되고 있을 무렵, 소련 당국은 흥남 공업지역 일대에서 사할린과 캄참카 방면의 고기잡이배에 탈 노동자를 북한에서 모집하려고 했다.
소식을 들은 일본인들은, 소련군이 일본인들을 만주와 시베리아로 끌고 간 것도 모자라 남아 있는 일본인마저 ‘모집’이라는 허울로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것이 아니냐며 불안해했다. 하지만 호구지책이 궁했던 일본인들은 굶어 죽느니 먹고살 수 있는 길을 택하게 되고, 그렇게 2천여 명이 캄차카의 고기잡이 일에 지원하게 된다.
귀환 후에 일본인들
민폐 집단이라는 차가운 시선
1947년 1월 어느 겨울날. 오사카에 사는 22세의 한 젊은 여성이 집에서 극약을 마신 채 자살했다.
다키카와 나쓰요라는 이 여성은 1945년 11월 조선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잠시 지낼 곳을 수소문하던 끝에 알게 된 친척 집에서 온 가족이 신세를 지게 되었다.
원래 이 집에는 미쓰이 씨 가족 5명이 살고 있었는데, 다키카와 가족 8명이 들어오는 바람에 졸지에 13명이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비좁은 집에서 함께 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두 집 사이에 다툼이 잦았다.
가족 (대역)
“가뜩이나 패전으로 본토인들도 살기 빠듯한데, 사람들이 염치가 있어야지!”
그도 그럴 것이, 생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뜸 친척이랍시고 들어와 함께 살고 있으니, 미쓰이 가족 입장에서도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군식구들은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마쓰이 가족에게 번번히 손을 벌리기 일쑤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너무도 힘들었던 귀환자 가족 중 22세의 한 젊은 여성은 자살하고 만 것이다. 이는 당시 귀환자들을 대하는 본토인들의 일상적인 단편이었다.
임시 수용소의 삶
패전 후 2년여가 지난 1947년 겨울, 도쿄의 역 부근에 설치된 귀환자 임시 수용소는 본의 아니게 거의 반영구 시설이 되어버렸다.
당시 수용된 귀환자들은 일자리를 구해 빨리 밖으로 나가야만 다음 사람을 받을 수 있는데, 수용소에 한번 들어오면 그대로 눌러앉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것이 취직은 어려운데 물가는 살인적이었다. 나가더라도 높은 전세값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수용소는 시설이라고는 대충 지어진 가건물 속으로 바닥에 깔린 거적이 전부였다.
게다가 귀환 출신의 어린이가 수용소 울타리 밖으로 나서기라도 하면 본토의 아이들은 이렇게 놀려댔다.
꼬꼬마들 (대역)
“외지에서 굴러 들어온 거지!”
그때마다 아이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자며 울면서 돌아오는 턱에, 부모들의 억장은 무너졌다.
범죄자라는 오명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도둑질을 일삼게 되었다.
1946년 7월 1일의 범죄 통계를 보면, 생활고와 취직난으로 저지른 절도죄가 총 범죄 건수의 2/3를 차지했는데, 범죄자의 대부분은 갓 제대한 군인이거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세균 덩어리’라는 인식
해외 귀환자는 더러운 전염병을 옮기는 세균 덩어리로 인식되고 있었다.
1946년 봄에서 여름까지 중국 대륙, 한반도의 일본인들은 대대적으로 일본으로 귀환하고 있었는데, 이때 돌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일본은 각종 풍토병과 전염병에 시달리게 된다. 때문에 흔히 외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본토인들로부터 ‘세균 덩어리’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당시 일본의 언론을 이렇게 퍼뜨리고 있었다.
라디오
이렇게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본토인들은 귀환자들에 대해 ‘온정’을 베풂과 동시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계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호의호식했잖아!
민폐 집단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범죄자, 거지, 세균 덩어리라는 인식은 귀환자들에게 한동안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귀환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이 있었다. 당시 귀환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귀환자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말은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본토 귀환 이래로 어떤 점이 가장 당신들을 힘들게 했는지?”
라는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외지에서 식민지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온갖 호사를 누리고 살았으니, 지금은 천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말이 가장 듣기 괴로웠다고 한다.
원문: 레알뻘짓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