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로 일본인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나라에 남아서 생활했고, 또 어떤 식으로 빠져나가 귀환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런 면에서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은 그런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책 내용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시점에서 그려진 회고담이다.
여기서는 책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약간씩 발췌, 각색해서 올려본다. 좋은 책이니 관심 있으면 내용 전부를 보았으면 한다.
38선 이남의 일본인들
패전 당시의 일본인
1945년 8월 9일 함경도 회령 : 소련의 8월 폭풍 작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다음날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 지역에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그러자 이곳을 지키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 수뇌부는 곧바로 열차를 동원해서 고위 관료와 군 관계자 가족을 서둘러 남쪽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만주 현지에 있던 100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어떠한 대피 명령조차 내리지 않았다. 때문에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소련 지역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많은 자들이 희생되고 고아들이 대거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흘 뒤,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소련군이 함포사격에 이어 시가지 상륙을 개시하자 함경북도를 관할하던 일본 군부는 서둘러 열차를 수배하여 군인 가족들만 태우고 경성으로 출발해 버린 것.
그러는 동시에 조선인들과 일본 민간인들에게는 대대적으로 소집영장을 띄워서 회령에 있는 군부대로 모이게 했다. 군부는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당시 비료공장에 다니던 사바타 겐조는 이렇게 회고했다.
사바타 겐조 (대역)
“영문도 모른 채 수많은 사람들이 소집영장을 받고 회령의 군부대로 모여들었다. 그곳에 관리자들은 우리에게 무기 대신에 삽 한 자루씩을 쥐여주고선 소련군의 총알받이로 삼으려 했다.”
1945년 8월 15일 부산의 한 관공서 : 예상된 항복 발표
상부로부터 정오에 중대 발표가 있을 예정이라는 전갈이 내려졌다. 공무원들이 들어보니, 그것은 예상대로 항복에 관한 내용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일본이 4년 전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고부터 시작된 부산 지역의 등화관제가 해제된 날이었다. 때문에 조선인들에게는 야경을 만끽하며 비로소 해방을 실감할 수 있는 뜻깊은 날이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을 비추는 환한 불빛이 결코 달갑지만은 않았다.
─부산지방교통국장 다나베 다몬
1945년 8월 15일 경성전기회사
덴노(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경성전기회사의 사장 호즈미 신로쿠로는 황급히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옥으로 갔다.
호즈미 신로쿠로 (대역)
“만약 단 1분이라도 정전 사태가 발생한다면 무서운 결과가 초래할 것이다. 그러니 직원 여러분은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임하도록 .”
그는 위급한 시국에 정전사태라도 발생하게 되면 일본인들에게 극심한 공포심을 조장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1945년 8월 중순 부산항: 밀항선
돈 있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재빨리 밀항선으로 귀국했다. “나만 살겠다”는 원초적 본능만 남은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천황의 백성이라는 애국심은 눈곱만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가족들이 일본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지, 또 조선 땅에서 일군 재산을 어떤 방법으로 한 푼도 빠짐없이 가져갈 수 있을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교사 후지와라 지즈코
조선인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심
1945년 8월 16일: 만세를 외치는 군중
사무실 밖으로 조선인들이 만세를 외치며 경성역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경성전기회사 사장 호즈미 신로쿠로
8월 15일 이후 1주일간의 폭행 사건
1945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보고된 폭행 사건은 총 913건이었다.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습격한 곳은 주로 경찰관, 지방행정기관, 신사였다.
또 개인을 상대로 한 살인과 폭행은 총 267건으로 보고되었는데 주된 표적은 경찰관, 교사, 공무원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었다.
당시 보고 체계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오지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은 집계에서 누락되기 일쑤여서 보고 수치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일본인보다 조선인의 피해자가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일본인 상관들은 조선인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먼저 피신했기 때문이다.
그러기도 했지만, 일본인 상관보다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징발에 앞장서며 악역을 맡았던 조선인들에게 악감정이 많았던 탓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18일 조선총독부
이날 조선총독부는 각 기관에 급하게 전달한다.
아베 노부유키 (대역)
“각 기관에 걸어둔 천황의 사진을 모두 불태워라!”
“또 각 지역의 신사에 연락해 위패를 모두 불태우도록 명령하라!”
그들은 행여나 조선인들의 심기를 상하지 않도록 재빠르게 대응했던 것이다.
뜻밖의 공포: 조선인들이 이렇게도 많았나?
당시 일본인들이 느꼈던 공포심은 평소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한 총체적인 무관심에서 비롯됐다. 사실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이런 경향은 식민 지배 초기에 수많은 조선인의 저항을 경험한 1세대와 달리, 문화통치 시기(1920년대)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2세의 경우에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조선을 타지로 인식하기보다는 일본 본토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호즈미 신로쿠로
일본인 촌: 그들만의 분리된 공간
대부분의 일본인이 패전 직후에 나타난 조선인의 집단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집단을 이루며 조선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공간에서 따로 살고 조선인들을 도시의 변두리로 몰아내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인촌이 당시 한반도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이러한 일본인촌에는 철도역과 정거장, 학교, 병원, 관공서, 백화점 등의 편의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고, 경찰, 군대 등 치안기관을 유치해 더욱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렇게 일본인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조선인들과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에 평소 조선인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일본인들의 증언: 여기 일본 아니었어?
당시 초등학생(소학교 학생)이었던 한 일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마쓰나가 아쿠오 (대역)
“한 번도 조선인 친구와 놀아본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조선인은 가끔씩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물건을 팔던 아줌마가 전부였다.”
“원산에 그렇게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패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원산부립소학교 2학년 마쓰나가 아쿠오
경찰서에 근무하던 청년은 이렇게 물었다.
나카무라 기미 (대역)
“패전했기로서니 꼭 내지(일본)로 돌아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의 부모님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돌아가야 한다고만 대답했다. 그는 왜 자기가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패전 직후 조선인들이 왜 거리를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치는지도 이해 못 했다.
─나카무라 기미(당시 23세). 충남 강경 경찰서 근무
갑자기 달라진 세상
돈을 인출하려는 일본인들
요즘은 밤이 깊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편예금을 인출하려고 사람들이 몰려든 바람에 출금 업무가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노우에 스미코. 충무로 경성우편국 근무
은행에는 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8월 15일에만 은행이 보유한 지급준비금의 20%가 빠져나갔는데, 이런 속도로 돈이 빠져나간다면 곧 은행은 파산이 나고 말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예금한 돈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어 수많은 예금자들은 화가 나서 은행을 때려 부수려 할 것이다.
때문에 8월 17일부터 총독부에서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일본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미즈타 나오마사 (대역)
하지만 하루빨리 재산을 찾아서 일본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 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 나오마사
강탈을 당해도 신고할 수 없었다
은행에서 인출을 하고 돌아오다가 돈을 강탈당했다는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일본인들은 어차피 경찰에 신고해봐야 소용없다며 분을 삭일 따름이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거리마다 넘쳐나는 물자
패전 후 조선 전역에서 나타난 특이한 현상 중 하나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시중에 전례 없이 물자가 풍족해졌다는 점이다.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다음 날 남대문시장에는 거짓말처럼 쌀, 설탕, 밀가루, 옷감, 가죽제품, 구두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전쟁 수행 중에는 좀처럼 구경할 수 없었던 각종 물자가 한꺼번에 시중에 풀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북한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바로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살림을 처분하고 일본으로 귀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모든 세간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당장 배를 타고 항구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런 일본인들의 심리를 꿰차고 아예 조선인 고물상들은 일본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물건들을 값싸게 구매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대전과 같은 지역에서는 쓸만한 물건을 사려는 조선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전에 없던 시장이 하루아침에 생겨나기도 했었다.
일본인들의 투매 행위 비난: 조선의 재산을 함부로 팔지 말라
한편 조선인 지도층들의 생각은 이랬다.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일본인이 소유한 것은 바로 ‘조선에서 조선인을 부려서 일군 것’
때문에 일본인 재산은 그 형태를 막론하고 조선인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본인들 재산을 매입하는 행위는 해방 조선의 부를 유출하는 이적 행위요, 공공의 재산을 개인의 것으로 독점하는 반사회적 악덕 행위로 간주했다.
그렇게 일본인들의 투매 행위에 대해 조선 사회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미군정 또한 일본인들의 재산 반출에 여러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가지고 갈 짐에는 중량을 제한했으며 현금은 1,000엔 이상의 반출을 금지했다.
이러한 제한 조치 때문에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어떤 짐을 가져가고, 또 가재를 팔아 마련한 돈을 어디에 숨겨 가야 할지 저마다 고민하고 있었다.
귀환 열차 속의 풍경
귀환 열차에 오르다가 넘어진 앞사람이 무거운 배낭 때문에 혼자서 일어나지도 못하니, 그 모습이 비참했다.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 열차에 오른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무거운 짐 때문에 하나같이 중풍 환자나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등에 짐을 짊어지고 젖먹이 아기까지 감싸 안고 있는 아낙의 모습을 보자니 씁쓸했다.
“고작 이것이 수십 년 동안 일하여 얻은 전 재산의 말로구나!”
─ 고타니 마스지로 인천일본인세화회장
당시 남한과 북한이 달랐던 점
돈을 허리춤이나 옷섶에 넣어 보이지 않게 다시 꿰매거나 커다란 붓 속에 지폐를 말아 넣는 등의 방법은 이미 낡은 방식이 되면서 단속을 피하기 위한 다양하고 기발한 수법이 끊임없이 동원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돌아간 남한의 일본인들은 북한에서 돌아간 사람들과 비교해보자면 훨씬 상황은 나았다.
북한에서 돌아간 일본인들의 경우는 자전거, 라디오, 축음기, 재봉틀, 서적류는 물론 심지어 이불과 개인 화장품까지도 공출 대상이었다.
일본인들이 느낀 패전 후 몇 달간의 변화
1945년 8월 16일: 독립만세
거리에는 가는 곳마다, 일장기를 재활용해 만든 어설픈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리고 질주하는 트럭은 물론이고 전차 지붕에서도 조선인들이 외쳐대는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9월 5일: 조선에 남고 싶은 일본인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들의 만세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고 일본인들도 점점 무뎌져 갔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귀환 열차가 출발한다는 헛소문이 돌아 멀쩡한 가구를 헐값에 내다 팔며 부산을 떨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편해서 못 살겠다며 다시 세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또 어느 정도 치안이 확보되는 낌새가 보이자 어떻게든 조선에 눌러앉아보려는 사람도 늘어갔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지금 일본의 주요 도시들은 대공습으로 초토화되었고, 그나마 멀쩡한 도시도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에 돌아간다고 한들 미래가 없을 곳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조선에 어떻게든 남아있으려고 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가을: 점차 안정을 찾는 사회
8월 말부터 푸줏간에는 오랫동안 구경하기 힘들었던 고기가 내걸렸고 술집에는 각종 술이 넘쳐났다. 다시 문을 연 카페에서는 전쟁의 선전가요가 아닌 대중가요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차림새도 칙칙한 국민복을 벗어 던지고 여성들도 볼썽사나운 몸빼바지 대신 치마를 걸치기 시작하여 거리의 풍경도 한층 밝아졌다.
거리 뒤편의 상점들에서는 “배척하자 일본인”이라고 적힌 전단을 떡 하니 붙여놓고 조선인들이 일본어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에게 물건을 팔기는 했지만 가는 곳마다 왜노(倭奴) 추방이라고 써 붙인 자극적인 전단지가 계속해서 눈에 거슬렸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겨울: 사라진 일본어
11월에 들어서는 어느새 일본식 동네 이름들이 모두 조선식으로 바뀌어 길 찾기도 어려워졌다. 관청에서는 각종 서류에 ‘쇼와’, ‘메이지’ 같은 연호를 기재하면 아예 접수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그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인데 경성은 어느새 낯선 공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라디오 방송도 10월 말부터 과도적으로 한일 양국어를 사용하다가 얼마 후 뉴스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어로 단일화했다.
12월에 들어서는 그런 뉴스마저 하루에 단 1회로 줄어들었다. 경성에서는 이제 제국의 언어(일본어)가 발붙일 곳은 전혀 없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하지만 북한과 비교하면 그래도 양호했다. 북한에서는 8월 29일부터 라디오에서도 전면 일본어가 배제되었다. 때문에 갑작스런 정보의 차단으로 당시 일본들은 몹시도 불안해 했다.
원문: 레알뻘짓 블로그
※ 「조선을 떠나며: 해방 이후 조선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②」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