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정을 따라서 (3): 37살의 나이 차, 백범과 중국여인의 ‘특별한 동거’」에서 이어집니다.
답사 둘째 날, 자싱(嘉興)과 하이옌(海鹽)을 거쳐 우리는 어둠살이 내리고 있는 항저우(杭州)에 닿았다. 하나둘 불을 켜고 있는 도시로 들어가면서 나는 상하이를 떠나 이 낯선 도시로 스며들어야 했던 1932년의 임시정부(아래 임정)와 백범을 비롯한 요인들을 생각했다.
항저우는 장강(長江) 델타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저장성(浙江省)의 성도(省都)다. 중국의 7개 고도(古都)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 도시는 수나라 때 건설된 대운하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 일찍부터 운하를 이용한 상업이 발달했다.
10세기에 항저우는 난징(南京)과 청두(成都)와 함께 남송(南宋) 문화의 중심지였다. 12세기 초부터 1276년 몽골이 침입하기까지는 남송의 수도였고, ‘임안(臨安)’으로 불리었다. 당시 북쪽엔 여진이 세운 금나라가 있었으므로 항저우는 중국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원에 의해 남송이 멸망하고 몽골 제국이 구축한 육상 네트워크와 해상 세계가 통합되자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이 도시는 나날이 융성해 갔다. 항저우는 원대(元代)에 중국을 여행한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도시”라고 격찬할 만큼 번성했다.
항저우는 이방인의 눈에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중국인들도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저우와 쑤저우(蘇州)가 있다.(上有天堂,下有蘇抗)”거나 “소주에서 태어나, 항주에 살고, 광주(廣州)의 음식을 먹고, 황산(黄山)에 가서 일하고 유주(柳州)에서 죽으라!”는 속담으로 항저우를 기렸던 것이다.
청태제2여사에서 시작된 항저우 시대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虹口) 의거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민국의 존재를 새롭게 증명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임정이 더 이상 상하이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것은 기막힌 역설이었다. 그간 한국 독립운동에 협조적이었던 프랑스도 이봉창·윤봉길의 잇따른 의거로 인한 일제의 압력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목에 천문학적인 현상금이 걸린 백범은 자싱(嘉興)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백범은 당일 뒤늦게 임정 요인들에게 거사 사실을 알리고 피신을 주문했지만, 동포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느라고 백범의 전갈을 놓쳤던 도산 안창호는 일경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상하이를 떠나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했던 임정에 바야흐로 최대의 시련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1932년 5월, 임정은 상하이에서 180km 남하하여 항저우로 옮겨갔다. 백범이 상하이를 탈출하기 사흘 전, 항저우로 피신한 국무위원 김철(1886~1934)이 인화로(仁和路) 22호에 있는 청태제2여사(淸泰第二旅舍) 32호실에 임정의 판공처(辦公處, 공무를 처리하는 곳)를 개설한 것이었다.
청태제2여사는 당시 화려한 식당을 갖춘 이 지방 최고의 여관이었다. 1910년에 신태(新泰)여관으로 문을 연 이 업소에는 쑨원(孫文)이 묵어가기도 했는데 청태제2여사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33년이었다. 1967년 문화혁명 때 ‘군영반점(群英飯店)’이 되었고 답사단이 찾았을 때는 ‘한정쾌첩(汉庭快捷)이란 이름의 호텔 체인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지어진 목조 2층 건물인 여관은 중앙에 ‘입 구(口)’자 모양의 마당을 둘러싸고 촘촘히 방을 들여 놓았다. 객실 내부는 정비되어 있었으나 구식의 시설은 낡고 불편했다. 그래도 1932년의 임정 요인들에겐 이 여관이 최신식의 판공처였을 것이다.
임정의 항저우 시대는 그렇게 만만찮게 시작되었다. 임정은 청사를 항저우에 두었지만, 임시의정원 회의는 자싱의 남호(南湖)나 난징(南京) 등에서 개최해야 했다. 청사가 사람의 출입이 잦은 여관이어서 일본 정탐들에게 노출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임정이 청태여사에서 머문 시간은 다섯 달 남짓이었다. 그해 11월, 임정은 중국의 도움으로 항저우의 서호(西湖)에 가까운 호변촌(湖邊村) 23호로 청사를 옮겼다. 여러 세대가 다닥다닥 붙어살고 있는 연립주택 23호에서 임정은 한동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이듬해(1933) 5월 백범은 난징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 주석 장제스를 만났다. 이봉창 의거 때부터 백범의 명성을 듣고 있었던 장제스는 자신의 접견실에서 배석자를 물리친 채 김구와 밀담을 나눴다. 백범은 특무공작에 쓸 자금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한국 청년들을 모아 무관 훈련부터 시킬 것을 권했다.
한중 양 수뇌의 만남은 결국 1934년 봄,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洛陽) 분교에 한국 청년들을 위한 특별반, 제2총대 제4대대 소속 육군군관 훈련반 제17대의 개설로 이어졌다. 분교에서는 92명의 학생들에게 혁명 정신교육 등의 정치훈련과 일반 군사교양 및 전술·마술 훈련, 각종 포와 기관총 조작법을 가르쳤다.
독립군 3대 대첩 ‘대전자령 전투’
백범이 장제스를 만나 한인특별반에 합의한 한 달 뒤, 만주 간도 지역의 독립군으로부터 그간의 어려움을 일거에 해소하는 낭보가 임정으로 날아들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1920)와 함께 마땅히 한국독립군의 3대 대첩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대전자령(大甸子嶺, 다덴츠링) 전투의 승전보였다.
대전자령은 지금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汪淸)현 일대의 고개다. 높이는 해발 800여 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꾸불꾸불한 계곡길이 5km 정도 이어지고 고갯길 양쪽 길가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진 천연의 매복지였다.
1933년 6월 28일, 총사령 이청천(본명 지청천, 1888~1957)이 이끄는 5백여 명의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이란 이름의 중국 항일의용군 2천여 명과 함께 1,300여 명의 일본군 정규군(간도파견군)을 매복 공격했다. 군수물자를 잔뜩 싣고 이동하고 있던 일본군 이즈카(飯塚) 부대는 4시간 만에 거의 궤멸되었다.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의 항일전 사상 최대의 승전이다. 이전까지 주로 만주국군을 상대로 싸웠으나 이 전투는 정규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대규모 작전이었다. 총사령관 이청천은 구한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가 강제병합 뒤 동경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이니, 그는 일본 육사에서 배운 대로 일본군을 궤멸시킨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한중연합군은 군수품 2백여 마차, 대포 3문, 박격포 10문, 소총 1천여 정 등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이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분배관계로 독립군과 중국군 부대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면서 뒤이어 심각한 불협화음이 야기되긴 했으나 독립운동사에서 이 전투의 의의는 자못 크다.
승전 뒤 관동군이 증강되고, 국내 군자금 공급 루트가 차단되면서 무장 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이는 이후 무장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가는 단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뒷날 이청천은 한국광복군(1940) 총사령관이 되고 황학수, 오광선, 조경한, 고운기 등 간부들은 임정과 광복군의 주요 지도자로 성장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대전자령 전투는 무장 독립군의 이념과 정통성을 임정 계열로 계승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 대전자령 전투 이후 무장 독립운동의 목표와 성과가 임정으로 본격 수렴되기 시작했다. 백범의 제의에 따라 이청천·오광선·공진원 등 독립군 간부들이 이듬해(1934) 개설된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洛陽) 분교에서 한인특별반의 군사훈련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이청천의 총책임 아래 이범석이 제17대 대장, 오광선·조경한 등이 교관으로 실제 교육훈련을 주관했다. 특별반은 2년제 정규 군사훈련 과정을 이수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제1회 졸업생만 배출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일제가 중국에게 한인특별반 해체를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1년 남짓밖에 유지되지 못했지만 여기서 훈련받은 한인 청년들은 뒤에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임정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있는 난징과 가까운 전장(鎭江)으로 옮긴 1935년 11월까지 항저우 청사를 유지했다. 지금의 청사 건물은 2007년 항저우시가 이 일대를 매입하여 내부를 재정비하고, 우리 독립기념관과 협조하여 기념관으로 연 것이다.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항저우 청사는 8군데 임정 청사 가운데 복원된 3개의 청사(상하이, 항저우, 충칭) 중 하나다. 한길과 면하고 있긴 하지만 한적한 거리에 서 있는 낡은 청사 건물은 쓸쓸해 보였다. 기념관 입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 기념관’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청사 안에는 상하이 청사처럼 당시 독립 운동가들이 쓰던 침소, 집무실, 부엌 등을 재현해 놓았다. 익숙한 백범의 흉상, 애국지사들의 친필 서명이 담긴 태극기, 백범일지 단행본 등의 유물들이 지난 80년 전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항저우에서 다시 전장(鎭江)으로
항저우의 임정이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있는 난징(南京)과 가까운 전장(鎭江)으로 옮겨간 것은 1935년 11월이었다. 전장은 장수성의 난징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다. 일본군이 난징 침공에 앞서 교두보로 삼고자 했기 때문에 중일전쟁 때 전장은 난징보다 앞서 파괴되기도 했다.
전장의 임정 유적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실제로 요인들이 난징에 머물고 있으면서 청사를 전장에 둔 것은 일본 때문이었다. 일본 해군은 난징성 안에 임정 청사를 두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난징을 폭격하겠다는 협박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임정은 1935년 11월부터 2년 동안 전장에 머물렀는데 일본 첩자를 피해 세 번 이상 장소를 옮겨야 했다. 임정은 전장에 머물면서 일제의 중국 침략에 대비한 군사 활동 정비를 논의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군무부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해 임정의 군사정책과 활동을 전담하도록 했다.
청사를 전장에 두고 있었지만 임정 요인들은 대부분 난징에 거주했다. 장수성(江蘇省) 성도 난징은 일본군에 점령될 때까지 국민당 정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뤄양의 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한 백범은 난징으로 은신처를 옮겨 회청교(淮淸橋)에 함께 살면서 고물상 행세를 했다.
상하이 시절에 손자를 데리고 조국으로 돌아갔던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도 9년 만에 다시 두 손자와 함께 나와 마도가(馬道街)에 거주했다. 마도가에는 이들 외에도 여러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이산의 아픔을 겪으면서 살고 있었다.
광화문(光華門) 남기가(藍旗街)에도 요인 가족들이 살았고, 중화문(中華門) 안 동관두(東關頭) 32호에는 백범이 이끌던 한국국민당 청년들이 모여 살았다. 이들 청년들에게 이웃 동네에 살고 있는 곽낙원은 고향 할머니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김원봉의 의열단과 이청천의 조선혁명당 청년들은 교부영(敎敷營) 16호에 모여 함께 살았다.
그러나 노구교사건 뒤에 중일전쟁이 일어나 중국 정부가 난징을 떠나 충칭(重慶)으로 천도하자 임정도 다시 전장을 떠나야 했다. 1937년 11월, 임정 요인들이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이동하면서 2년간의 전장 시기는 막을 내렸다. 이후, 임정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도착할 때까지 창사·광저우(廣州)·유저우(柳州)·치장(綦江) 등 네 지역을 전전해야 했다.
땅거미가 지고 있는 전장에 닿아 답사단은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한참 돌아서 양자먼(楊家門) 23호 룬저우(潤州)문화관 안에 마련된 ‘전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진열관’을 찾았다. 전장시 정부는 2010년 이곳을 ‘진강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기지 유적지’로 승인하고 2013년 5월 사료진열관을 정식 개관했다.
나지막한 단층 건물의 현판에 쓰인 한글이 반가웠다. 진열관은 중국인들에게 항일의식 고취를 위해 백범이 수차례 강연했던 무웬(穆源)소학교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진열관에는 임정 요인들과 전장시 인사들의 인연, 백범의 강연 사료와 당시 직접 강연을 들었던 전장 주민 인터뷰 자료 등 임정의 활동상이 소개되어 있었다.
임정, 광복군 창설의 밑돌을 놓다
전장 시기에 구성된 임정의 제4차 내각은 1937년 중일전쟁에 대처해 군사정책을 수립했다. 일본에 대한 결사항전을 선언한 장제스는 비밀리에 백범을 불러 의견을 나누었다. 백범은 중국의 대일항전에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해선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의 단합이 긴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중국 내 세 단체(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의 합의에 이어 미주의 여섯 개 단체가 참여함으로써 민족진영의 연합회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군사위원회를 두고 군사정책을 수립하였지만 아직 임정은 군대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찍이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서 독자적 무장 항일투쟁을 하던 독립군들은 통합조직을 만들기 위해 애썼지만 주변 국가들의 비협조와 일본의 방해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1937년 발발하여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 중일전쟁 기간 중에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직할 정규군 부대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게 된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창설한 광복군은 1945년까지 5년여 동안 각종 군사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임정은 비로소 한국독립운동의 최고 통수기관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충칭으로 수도를 옮기는 국민당 정부를 따라 난징을 떠나야 했던 임정의 앞날은 순탄하지 않았다. 1937년 11월의 이슥한 밤, 텅 비어버린 난징을 떠나는 배 한 척이 있었다. 중국 정부가 알선해 준 목선 한 척에 의탁하여 임정 요인과 가족 등 대식구 백여 명은 장강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하였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정을 따라서 (5): 난징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약산 김원봉」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