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정을 따라서 (4): 일본육사 출신 독립군 대장, 일본군을 궤멸시키다」에서 이어집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가 공식적으로 난징(南京)에 청사를 둔 일은 없다. 훙커우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난 임정은 항저우에서 3년을 머물렀고, 1935년에는 난징과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전장(鎭江)으로 옮겨갔다.
난징에 남은 임정의 자취들
당시 난징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수도였으므로 임정도 난징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임정이 난징 대신 전장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일본의 협박 때문이었다. 일본 해군은 난징 성안에 임정 청사를 두면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난징을 폭격하겠다고 을러댔던 것이다.
청사는 전장에 두고 임정 요인들은 대부분 난징에 거주했다. 뤄양(洛陽)의 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한 백범은 난징으로 은신처를 옮겨 자싱(嘉興)의 뱃사공이었던 주애보(朱愛寶)를 불러 회청교(淮淸橋)에 살면서 고물상 행세를 했다.
1925년 며느리 최준례를 잃고 인(仁), 신(信) 두 손자와 함께 귀국했던 곽낙원도 다시 손자들을 데리고 난징으로 나와 마도가(馬道街)에 거주했다. 마도가에는 이들 외에도 여러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이산의 아픔을 달래면서 살고 있었다.
광화문(光華門) 남기가(藍旗街)에는 요인 가족들이, 중화문(中華門) 안 동관두(東關頭) 32호에는 한국 국민당 청년들이 모여 살았다. 또 교부영(敎敷營) 16호에는 김원봉의 의열단과 이청천의 조선혁명당 청년들이, 호가화원(湖家花園)에는 민족혁명당 인사들이 거주했다. 청사를 두지 않았을 뿐이지 난징은 임정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는 도시인 것이다.
셋째 날, 답사단은 난징 시 중산동로(中山東路)의 중앙반점에 들었다. 1933년 5월 장제스를 만나려 난징에 온 백범이 묵었던 이 호텔에 82년 후, 그의 자취를 따라온 답사단은 이틀을 묵었다. 중앙반점은 중국 현대사의 유명 인사들이 거쳐 간 명소인데 로비 복도에 걸려있는 적지 않은 사진들은 그 흔적이다.
항일항공열사공묘의 ‘한인 열사’들
난징에서의 첫 답사지는 쯔진산(紫金山) 기슭의 항일 항공열사 공묘(航空烈士公墓)였다. 공묘는 중국이 1932년 상해전쟁에서 전사한 공군을 안장하기 위해 조성한 묘원이다. 뒷날, 중일전쟁(1937~1945) 때 중국을 돕다가 희생된 외국인들도 안장하였다. 공묘에 봉안된 전사는 중국인 870위(位), 미국인 2,197위, 소련인 237위, 한국인 2위다.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1,600여 대의 압도적 항공 전력으로 고작 300대에 불과한 중국 항공대를 섬멸하고 무제한 폭격으로 중국인들을 공포로 몰아넣겠다는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 작전은 1,300여 대에 이르는 소련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결사 항전한 중국 항공대의 반격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공권은 이내 전력이 우월한 일본이 장악해 버렸다. 이러한 전황을 반전시킨 것은 1941년 12월 미국지원항공대가 항일전을 전개하면서부터였다. 1942년에는 히말라야 항공노선을 개척, 중국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이 대량으로 이루어졌다. 1943년 10월 이후 중국과 미국 항공대는 연합단을 조직하면서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제공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항공열사공묘에 안장된 전사들 중 상당수가 이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이다. 이 3,306명의 희생자 가운데 두 사람이 한국인이다. 항일항공열사기념비 주변에 선 빗돌에 나라별 희생자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기념비 오른쪽, 어른 키 높이의 빗돌에 새겨진 단 세 줄의 기록, 한인 열사들의 이름을 읽는 기분은 처연했다.
韓國 烈士 名單
田相國 上尉隊長 一九○七年 ~ 一九三八年 八月 二十一日
金元英 少尉飛行員 一九二二年 九月 六日 ~ 一九四五年 三月 二十四日
전상국(1907~1938)은 황해도 신천 출신이다. 일본 다치가와(立川) 비행학교를 나온 뒤, 일본에서의 항공학교 교관직 제의를 거절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중앙항공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1931년 2등 비행사 자격으로 중국 공군에 입대해 항일활동을 펼쳤고, 1936년에는 민족혁명당 당원이 되어 우리 독립투사들의 항일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중일전쟁 초기에 중국항공대의 일원으로 출격해 17번의 공중 운송 임무와 15번의 폭격 투하 임무를 모두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일본군의 사기를 꺾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전상국은 1938년 8월, 양쯔강 공중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전해져 온다. 그러나 대만 공군에서 발행한 <공군충열록(忠烈錄)>에 따르면 그는 공무로 한커우(漢口)에서 C.B기 74호로 사천 성도로 가다가 발동기 고장으로, 호북(湖北) 의창(宜昌) 서쪽 남타강(南沱江)에 추락, 순국하였다. 향년 32세.
김원영(1919~1945)은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동향인 김구를 따라 독립운동을 한 김보연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안원생(안중근의 조카)에게 시집간 누이를 따라 베이징에 살았다. 1938년에는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 대원으로 활동하였고 공군군관학교를 나와 비행사로 입문하였다.
미군 지원 프로젝트에 따라 1944년 2월 인도에서 비행훈련을 추가로 받고 중미연합항공대에 배속되었다. 1945년, 군 준위 견습관으로 배속된 그는 악양, 형양 등지에 출격하여 숱한 전과를 올렸다. 1945년 3월, 일본군 공격을 위해 출격했으나 불행하게도 애기(愛機)와 함께 추락해 순국하였다. 향년 26세.
식민지 시절에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항일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일본군 장교나 하사관이 되고자 했던 청년들과는 달리 국외로 망명하여 여러 갈래의 독립군 부대로 들어가거나 중국 국민당이나 공산당 계열의 정규군이 되어 일제와 싸웠다. 타국 군대였지만 이를 꺼리지 않은 것은 그들이 ‘독립과 해방’이라는 대의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1932년 7월,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난징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아래 간부학교)에서 공부한 125명의 청년투사들 역시 그들의 젊음을 조국 해방과 독립에 바치기로 한 이들이었다. ‘한국의 절대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이라는 간부학교의 설립 목표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젊음을 이 임시 군사학교에 의탁했던 것이다.
1930년대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정치 정세도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에 독립운동 노선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김원봉은 1932년 10월, 난징 교외 탕산(湯山) 선사묘(善祠廟)에 간부학교를 열고 제1생 26명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황룡산 기슭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6개월 후인 1933년 4월에 1기생 졸업식이 거행되었지만, 2기생 55명의 입교는 9월에야, 그것도 장쑤성(江蘇省) 강녕진(江寧鎭)으로 옮겨 이루어졌다. 중국군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는 교육이었지만 일제 정보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934년 4월, 2기생이 졸업한 뒤 탕산과 강녕진의 학교 위치가 일제 밀정에게 탐지되었기 때문에 3기생 44명은 이듬해(1935) 4월부터 난징 상방진(上坊鎭) 황룡산의 천녕사(天寧寺)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후에도 한인들이 군사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3기생은 난징 교외와 성내의 여러 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 3기생들은 9월에 졸업하게 되지만 간부학교의 군사훈련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일본과의 외교적 분쟁을 피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폐쇄 조치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정식 명칭이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결국 3년여 기간 동안 125명의 청년투사를 양성한 것으로 그 소임을 마감했다.
정치교육과 군사교육을 받았던 졸업생들은 뒷날, 대부분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활약하였는데 상당수는 활동 중 일제기관에 검거되어 희생되었다. 간부학교를 1기로 졸업한, 안동 출신의 시인 이육사(1904~1944)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간부학교 1기생 가운데는 백범의 요청에 따라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특별반으로 이동한 이도 있었다. 이는 노선상 차이에도 불구하고 김원봉과 의열단이 임정의 항일투쟁 기반 조성에 협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뒷날 조선의용대(義勇隊)의 핵심세력이 되었고, 일부는 다시 광복군의 주요 무장역량으로 성장했다. 중국군의 지원에 따라 단기적으로 실시된 군사간부 교육이었지만 간부학교는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담당할 주역을 길러낸 것이었다.
현재 간부학교 1·2기 교육이 이루어진 난징의 탕산, 장쑤성의 강녕진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자취는 찾을 수 없다. 유일하게 그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은 곳이 난징 교외의 천녕사다. 1·2기 훈련장소가 일제에게 알려지면서 학교가 훨씬 외진 산속으로 옮아온 덕택이다.
황룡산 아래 버스를 대고 산기슭을 오르면서 나는 긴가민가했다.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완만한 물매의 산기슭에는 나무와 대숲이 우거져 있었다. 10여 분쯤 오르자, 한때는 도교도(道敎徒)들의 발길이 이어졌을 도교 사원 천녕사가 나타났다.
그리 넓지는 않은 평지에 세 동의 단층 건물이 서 있었다. 정면 건물에 붙은 ‘天寧寺(천녕사)’ 현판이 80년 전의 역사를 간신히 환기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심코 발길을 재촉했을지도 모른다. 인적이 끊어져 폐허가 되다시피 한 유적 앞에서 답사단은 잠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주춧돌에 새겨진 몇 자의 글자와 ‘천녕사’ 현판을 제외하면 이 낡고 허물어진 사원에서 80년 전 조선 젊은이들의 뜨거운 숨결을 떠올린다는 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 퇴락한 건물에서 1기 졸업생 윤세주(1901~1942)가 정치를, 김두봉(1889~1961?)이 조선의 역사·지리를 가르쳤다는 사실이 마치 허구 같았다.
처음으로 이 유적을 찾았던 선배 답사단 일행은 참담함과 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오열하고 말았다던가. 사원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 시절을 환기해 주는 어떤 표지도 보이지 않았다. 공터에 소주 한 잔 부어놓고 예를 갖추었지만, 석양을 등진 하산 길은 쓸쓸하고 허전하기만 했다.
1932년 장제스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웠던 김원봉은 일찍이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투쟁을 전개해 온 이다. 국민당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 국민당군 장교로 임관하기도 했던 김원봉은 좌파 민족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로 1935년 난징 금릉대학(지금은 난징대학) 강당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일제에 맞서 독립을 이루고 민주국가를 건설하자는 원칙을 토대로 당의 강령과 정책을 확정한 민족혁명당은 5개 당파 단체들을 규합한 민족단일당이었다. 임정의 백범은 민족단일당에 부정적이었지만 거기 반대하진 않았다. 임정 내 보수파 세력들을 대표했던 백범과 사회주의 색채를 띤 좌파 민족주의 진영의 약산의 대립과 갈등은 좌우합작과 민족통합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세력의 임정 결집, 의용대의 광복군 편입
민족혁명당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김원봉의 리더십을 뒷받침해 준 정치적 기반이었고, 중국 정부 관할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인세력 중 가장 강력한 단체였다. 민족혁명당은 ‘해외에 통치권을 행사할 대상이 없고, 각국으로부터 승인과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국내 인민의 합법적 선거를 통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 등을 들어 임정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
1937년 일제가 난징을 공격해 오자 김원봉은 조선혁명당 본부를 거느리고 난징을 떠나 우한(武漢)으로 갔다. 그는 이듬해 10월, 간부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을 재규합하여 항일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 편성하여 대장에 취임했다.
당시 중국의 2차 국공합작에 의해 국민당 정부의 통일된 후원을 받은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의 지원부대로 창설되어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대원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식비와 공작비 등을 후원받았다. 당시 의용대는 한중일, 3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았으므로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 등 선무공작에 주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김원봉과 민족혁명당이 임정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국제 정세와 중국 정부의 한인 독립운동 정책 변화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1941년 12월, 민족혁명당 제6차 전당대표대회 선언을 통해 표방한 임정 참여의사는 김원봉의 광복군 부사령 취임과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 등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이 시기의 국제정세의 변화는 독립운동의 국제 환경도 우호적으로 바꾸어냈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 세력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하기 위해서는 임정의 대표성과 지도 역량의 강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독립운동세력의 임정 결집을 강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1919년 상하이에서 어렵사리 ‘민국(民國)’의 깃발을 내건 이래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어느덧 임정은 청년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20세기를 19세기 방식으로 살아가면서도 희망의 불씨를 놓지 않았던 임정에도 이 같은 정세의 긍정적 변화와 함께 조국광복의 서광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1937년 11월,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예정도 없이 곧바로 수도 난징을 향해 진격해 왔다. 화청교 부근에서 살고 있던 백범의 집 근처에도 포탄이 떨어지는 등 위험은 눈앞에 다가왔다.
일본군 난징 점령, 비극의 서막
장제스 정부가 서둘러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겨가자 임정 요인도 중국 정부가 주선해 준 목선 한 척에 의탁하여 난징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정 요인과 가족 등 100여 명의 대식구가 양쯔강의 뱃길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한 것은 11월 하순이었다.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 닿은 임정 식구들이 우한반점에 여장을 풀고 다음 목적지인 창사(長沙)로 떠날 채비를 차리고 있을 무렵 난징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양쯔강을 피로 물들이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중국군은 투항을 거부했다.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 일본군은 12월 13일, 난징을 점령하고 성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성안에 남아 있던 50, 60만의 시민들은 공황 상태 속에서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에서는 ‘난징 사건’으로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난징 대도살(大屠殺)’이라고 부르는 아시아판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서막이었다. 그것은 또 ‘사람들이 이러한 대량학살을 받아들였고 이 사건에 대해 수동적인 방관자가 된 것이라는 비참한 교훈'(아이리스 장)을 남긴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정을 따라서 (6): ‘난징의 능욕’,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