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정을 따라서 (2): 백범의 한인애국단과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에서 이어집니다.
송칭링능원을 끝으로 청년백범 답사단은 상하이를 떠났다. 4·29 윤봉길 의거 이래 일제에 쫓기던 백범이 마침내 상하이를 탈출해 도착한 저베이(浙北) 평원의 공업도시 자싱(嘉興)으로 가는 길이다. 상하이에서 1시간 반, 95km를 달려 자싱으로 들어섰는데 도시의 풍경이 매우 낯익어 마치 한국의 어느 소도시로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자싱은 저장성(浙江省) 북부 경항(京杭) 대운하 연안에 위치한 수향(水鄕), 곧 물의 도시다. 수만의 사람들이 수나라 때 만든, 전장(鎭江)에서 자싱을 거쳐 항저우(杭州)에 이르는 이 운하에 배를 띄워 놓고 물 위에서 살았다. 자싱에는 저장성 3대 명호(名湖) 가운데 하나인 남호(南湖)가 이 운하와 닿고 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정 요인들에게 은신처를 마련해 준 이는 외국인 YMCA 간사인 미국인 목사 피치(George A. Fitch)였다. 그의 집은 프랑스 조계지로 비교적 안전이 보장됐는데 피치는 자신의 집 2층을 김구 일행에게 제공했다. 이곳에서 김구는 김철, 안공근, 엄항섭과 함께 자싱으로 탈출하기까지 20여 일 동안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일제의 포위망이 마침내 코앞에 다가오자, 백범은 피치 부인과 “내외 모양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피치 목사는 “차부가 되어 문 밖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백범일지』에서 인용. 아래도 같음). 백범이 ‘각국 정탐들이 문 앞과 주위에 수풀처럼 에워싸’고 있는 지역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 부부로 위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날로 백범은 상하이 항일구원회(抗日救援會) 회장으로 활동하던 저보성(褚輔成 주푸청,1873~1948)의 도움을 받아 자싱의 저씨 집안에서 경영하던 종이공장 수륜사창(秀綸紗廠)으로 피신했다. 신해혁명의 원로이자 상하이 법학원장 저보성은 자신과 가족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정 요인들을 자신의 고향인 자싱으로 피신시킨 것이었다.
자싱에는 이미 이동녕과 엄흥섭 등 임정 요인들도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들은 지금의 일휘교 17번지에 거주했고 백범은 거기서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저보성의 수양아들 진동생(陳桐生, 첸둥성)의 별채인 매만가 76호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동녕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지근거리에 백범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때 일제는 김구의 목에 일본 외무성·조선총독부·상하이주둔군 사령부가 각각 20만 원씩 총 60만 대양(大洋)이라는 천문학적 숫자의 현상금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만가 76호의 광동사람 ‘장진구’
일행은 매만가(梅灣街)에서 버스를 내렸다. 거리 어귀에 ‘김구피난처’와 ‘저보성 기념관’ 등을 안내한 입간판이 서 있었다. 비교적 널따란 길 양옆으로 다소 고풍스런 중국식 건물이 이어지는 거리엔 때 이른 매화가 피고 있었는데 잎 크기가 예사롭지 않은 꽃에서는 향기가 진동했다.
‘김구피난처’라는 표석 뒤편의 건물이 백범이 피신해 있었던 은신처였다. 백범이 머물렀다는 2층 침실의 입구는 옷장으로 위장되어 있고, 옷장 문을 열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침실이었다. 위장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으므로 2층 바닥에 구멍을 뚫어 두어 긴급한 상황엔 바닥을 뜯고, 사다리를 내려 피신할 수 있도록 한 구조였다.
운하로 이어진 집밖에는 늘 나룻배가 있어 위급할 때는 그걸 타고 호수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인솔자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일행은 모두가 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8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일도, 그 시대의 공기를 느끼는 일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백범은 자싱에 은거해 있으면서 광동(廣東) 사람 ´장진구(張震球)´ 또는 ‘장진(張震)’라는 가명으로 행세하였다. 주변에 그의 정체를 아는 이는 저씨 일가 몇 명뿐이었다. 그러나 백범은 중국어를 제대로 할 줄 몰랐으므로 생활의 불편이 적지 않았다.
1932년 여름, 자싱역에 일제 밀정들의 탐문이 시작되자 저보성은 백범의 안전을 위해 피신처를 아들 저봉장(褚鳳章, 주펑장)의 처가가 있는 하이옌(海鹽) 현의 주씨 저택 재청별서(載靑別墅)로 옮기게 했다. 사방이 호수로 둘러싸여 일제의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남북호(南北湖) 안 별장인 이곳으로 백범을 안내한 이는 며느리 주가예(朱佳蕊, 주자루이)였다.
저(褚) 부인은 하이힐 구두를 신고 7, 8월 염천에 친정 여복(女僕) 하나에게 나의 식료(食料)와 각종 문품을 들려가지고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 고개를 넘는 것이다. (……)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 부인의 용감 친절을 우리 자손이나 동포가 누가 공경하고 우러러 사모하지 않으랴.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글로라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김구, 『원본 백범일지』 중에서
백범은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주자루이가 산후 조리도 못한 채 자신을 재청별서로 인도한 데 감동해 이를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자싱과 하이옌 지역에서 저보성 일가는 임정(임시정부)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그의 아들 저봉장과 며느리, 양아들 진동생은 백범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일제로부터 김구와 임정 요인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비록 쫓기는 상황이긴 했지만 재청별서에서 백범의 생활은 ‘산과 바다의 풍경을 완상’하는 등 비교적 여유로운 것이었다. 거의 갇힌 것과 진배없었던 상하이 시절과 달리 ‘매일 산에 오르고 물가에 나가는 취미는 비할 데 없이 유쾌하기만 했다.’
아름다운 자연 호수 남북호는 지난 ’14년 동안 산수(山水)의 주림이 십수 일 동안에 포만되’게 해주었다. 상하이 임정 시절의 긴장과 고뇌에서 일시적으로 놓여난 50대 중반의 독립운동가는 ‘세월 가는 것도 잊고, 나날의 일과가 산에 올라 놀고 물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
눈앞에 펼쳐지는 남북호의 풍경에, 임정의 자취를 찾아다니느라 후미진 골목길을 누비다가 재청별서를 찾은 일행의 눈은 모처럼 호강을 했다. 중국 정부에서는 별장 옆에 백범의 행적을 기념하는 전시관을 신축하여 독립기념관에서 지원한 사진 및 문헌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지만 워낙 외진 곳이라 찾는 이가 많지 않았다.
처녀 뱃사공 주애보와의 ‘선상표박 생활’
하이옌에서 다시 매만가로 돌아온 1933년, 백범은 광동사람으로 행세하긴 했지만 서툰 중국말 때문에 아슬아슬할 때가 적지 않았다. 중국인으로 완벽하게 위장할 방법을 찾던 중 저봉장은 백범에게 중국 여인과의 결혼을 제안하였다.
그는 백범에게 자신의 친구 중에 과부가 된 서른 살쯤의 중학교 교원을 추천했다. 그러나 백범은 자싱에서 자신이 타고 다녔던 배의 처녀 뱃사공 주애보(朱愛寶, 주아이바오)를 떠올렸다. 그는 중학교 교원이라면 신분이 탄로 날 수 있으나 ‘주씨 여자 같은 일자무식한 여자면 비밀을 지킬 수가 있겠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게 쉰일곱의 장년이었던 백범이 갓 스무 살의 주애보를 맞아 부부가 된 사연이다. 9년 전에 아내 최준례를 잃고 홀아비로 살아온 백범은 처녀와 정식으로 혼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여자의 선상(船上)에서 동서(同棲) 생활을 시작하였으니 그들은 사실상의 ‘부부’였다.
신분 위장을 위해서 젊은 여인과 동서하긴 하여도 자싱에서의 생활은 불안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고정된 거처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그 무렵의 생활에 대해 ‘오늘은 남문 밖 호숫가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밖 운하에서 잤다’고 쓸 정도였다.
낮에는 땅 위에서 활동하지만, 밤에는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주애보와 선상(船上) 생활을 했다. 비록 배 위에서 사는 생활이었지만 주애보의 시중을 받으면서 살던 이때가 백범에겐 가장 안정된 삶의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 혁명의 주역이었던 호치민도 광동 시절 중국인 여성과 동서했다고 하니 투사에게도 남자와 가장으로서의 일상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중국의 지원과 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
1933년 5월, 김구는 안공근, 엄항섭과 함께 난징으로 가 장제스를 만나 중국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로 한다.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낸 김구는 임정의 조직체계를 강화할 필요를 느꼈으나 그즈음 대일전선 통일동맹과 관련하여 임정 인사들 사이에는 갈등이 적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백범과 이동녕은 계속 자싱에 머물면서 임정의 내부통합을 꾀하였다.
장제스를 만난 뒤, 김구는 중국의 제의를 받아들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설치한 한인 특별반을 운영하였다.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규합하기 위해 그는 동북에서 활동하던 이청천(李青天)과 손잡고 중국 동북과 조선 국내로부터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그 결과 1934년 2월, 92명의 청년들을 모아 낙양분교의 한인특별반이 정식 개교하였다. 이 한인 특별반은 1년 뒤 62명을 졸업시켰지만 이를 탐지한 일본이 중국에 강력한 외교적 압력을 가하자 폐쇄되고 말았다.
1935년 11월, 자싱의 김구와 이동녕 등 임정 요인들은 의정원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김구와 이동녕, 조완구를 국무위원으로 보선하여 무정부 상태에 있었던 임정을 재정비했다. 이 회의는 남호(南湖)에 ‘놀잇배’ 한 척을 띄우고 선중(船中)에서 열렸다. 항저우로 청사를 옮기고 나서 임정은 일제의 눈을 피하고자 이런 형식의 회의를 여러 차례 열어야 했던 것이다.
남호는 일찍이 마오쩌둥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공산당 대표 13인이 이곳의 놀잇배 위에서 중국 공산당 성립을 선언한 곳이다. 1921년,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1전대회)의 마지막 날이 상하이에서 밀정과 프랑스군의 급습으로 무산되자 대표들은 이곳에서 회의를 속개했기 때문이었다.
1935년 임정 청사는 전장(鎭江)으로 옮겨 갔다. 이듬해 2월, 백범은 자싱을 떠나 난징(南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난징에서도 일제가 백범에게 암살대를 보낸다는 등의 도발이 계속되었으므로 그는 부득이 자싱에 두고 온 주애보를 데리고 왔다. 회청교(淮淸橋)에 집을 얻고 그녀와 동거하면서 백범은 ‘고물상’으로 신분을 위장했다.
1937년 7월 노구교(盧溝橋)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개전 초기에는 중국의 기세가 드높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황은 중국에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폭격이 더해지면서 난징의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중국 정부는 충칭(重慶)으로 전시수도를 정하고 각 기관을 하나씩 옮겨갔다.
11월, 임정과 가족 100여 명은 물가가 싼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옮겨 갔다. 이때 백범은 주애보를 그녀의 고향인 자싱으로 보냈다. 당시의 정황으로 추측하건대 아마 백범은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주애보가 자싱에 가 있는 게 좋겠다고 여겼던 듯하다.
남경서 출발할 때 주애보는 본향인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에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 시에 여비 100원밖에는 더 주지 못했던 일이었다. 근 5년 동안 나를 위해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살았지만, 부지중 유사부부이기도 했다. 나에게 공로가 없지 않은데, 후기(後期)가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었다.
─김구, 『원본 백범일지』 중에서
다섯 해의 짧은 만남, 그리고 긴 이별
그러나 그게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1933년 여름에 만나 다섯 해 가까이 사실상 부부로 살았지만 주애보는 끝내 백범을 광동인 장진구로 알았다. 고향인 자싱으로 가면서 그녀는 아마 멀지 않은 날에 백범과 재회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임정과 백범의 사정은 여의치 못했다. 8년 후, 해방이 되자 백범은 충칭에서 상하이를 거쳐 귀국했지만, 자싱에 들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1949년 6월에 백범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먼 길을 떠났다.
백범과 주애보의 이야기는 호사가들에겐 한 혁명가의 여담에 그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으로 이루어진 정식 혼인이 아니고, 상식적인 부부로 보기 어려운 40년에 가까운 연령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한 시절을 공유하고 정을 나눈 ‘남녀 관계’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오직 광복의 일념으로 싸워 온 노 독립운동가로선 한때의 인연에 대한 감상이나 연민은 스스로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건 난징에서 헤어진 뒤 수년 동안, 그리고 귀국에 앞서 백범이 자싱의 주애보를 찾지 않은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
백범과의 5년여의 세월을 함께하면서 그를 끝내 광동사람 장진구로 알았다고 했지만 어쩌면 주애보는 백범의 신분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설사 몰랐다 한들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두 사람에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리는 백범이 품고 온 한 장의 낡은 사진을 통해서 나라 잃은 독립운동가의 아낙이었던 스물 몇 살의 주애보를 기억한다. 반듯한 이마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후덕한 인상의 이 중국 여성은 경찰의 호구조사를 대신하면서 백범을 보호했고, 일제의 혹심한 공중폭격이 이루어지던 난징에서 백범과 생사를 같이했다.
백범이 담담하게 회고한 대로 자신에게 ‘공로가 없지 않은’ 이 중국 여인에게 빚진 이는 백범뿐이 아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잇고 있다고 믿고, 백범을 민족의 큰 스승, 독립운동의 영수(領袖)로 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애보에 대한 부채의식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여자들의 삶, 혹은 ‘인간 해방’
주애보가 백범을 만났던 때로부터 어느덧 82년이 지났다. 그때 스무 살이었던 처녀 뱃사공은 살아 있다 하여도 백 살이 넘었으리라. 그러나 나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뒷사람들은 항일투쟁에 바쳐진 그이의 ‘이바지’를 다만 전설처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도진순(창원대 교수)이 주애보에게 보내는 100년 편지를 쓴 까닭도 그래서일 것이다.
(…) 한 나라의 독립운동은 그 나라 국민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 나라와 세계의 따뜻한 애호와 지원이 있어야 하기에, 독립운동이 자기 민족 영웅호걸의 역사에 머물 순 없습니다. 당신 같이 비천한 여인과 인간 누구에게도 호소력이 있는 것이어야, 즉 새로운 인간 해방이 있어야 가능하고 의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해방 이후 한국의 독립 운동사는 이제 자랑스러운 양지의 역사가 되었지만, 독립운동을 도운 많은 여인과 보통 사람들은 아직도 대개 어두운 곳에 남아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 남성과 여성, 영웅과 보통 사람이라는 차이를 넘어서는 당신과 그이의 동거야말로 독립운동의 터전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 1996년 대한민국 정부는 저봉장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고, 당신의 고향 가흥의 매만가 76호에는 그이와 당신의 ‘선상표박(船上飄泊) 생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이가 당신께 못 다한 정한이 가슴에 영영 남아 늦게라도 전해드리고자 이렇게 편지를 올립니다.
─ 도진순, 100년 편지 『주애보와 장진구의 못 다한 사연』 중에서
자싱에서 이동녕, 엄항섭, 진동생과 같이 찍은 사진 속의 백범은 57세의 나이답지 않게 강건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주애보와 ‘선상표박’의 세월을 함께 하던 때일까. 도진순은 그녀에게 쓴 편지에서 ‘새로운 인간 해방’을 이야기했다. 독립투사 김구의 삶에서 주애보의 자리와 인간 해방은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멀까.
주애보의 이바지를 인간 해방의 자리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전히 그늘에서 쓸쓸하게 기억되는 이들 여인들의 이야기를 양지로 끌어내야 할 일이다. 비록 조역(助役)에 그쳤지만 그들의 삶도 나라에 목숨을 건 남자들의 그것 못지않게 소중하고 치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정을 따라서 (4): 일본군을 궤멸시킨, 일본육사 출신 독립군 대장」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