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정을 따라서 (1): 후미진 중국 골목에 한국인이 줄 선 이유」에서 이어집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 청사 다음 여정은 훙커우(虹口)로 더 잘 알려진 루쉰(鲁迅) 공원이었다. 1927년 상하이로 온 루쉰은 생전에 이 공원을 즐겨 산책하였는데 1956년 그의 유해가 이곳으로 이장되면서 기념관이 만들어졌고 1989년에는 공원 이름도 아예 루쉰으로 바뀐 것이다.
일찍이 영국 원예가가 설계한 서양식 정원 양식의 이 공원을 일약 세계에 알린 이는 스물다섯 살의 조선 청년 윤봉길(尹奉吉, 1906~1932)이다. 그가 일본군의 전승 기념식장에 던진 폭탄이 만주사변 이래 파죽지세로 중국 중심부로 진격하고 있던 일제의 기를 꺾어 놓았던 것이었다.
윤봉길, 진격하는 일제에 폭탄을 던지다
윤봉길은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1931) 이후 악화된 한중 양 민족 간의 문제 해결과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임정이 조직한 비밀조직 ‘한인애국단’의 단원이었다. 백범이 책임을 맡은 이 조직은 극비 결사체였다.
당연히 모집이나 선정 과정이 드러나지도, 창립식을 거행하지도 않았다. 단장인 김구가 활동을 준비·계획하는 과정에서 거사를 결행할 인물을 선정했고 상호 협의를 거쳐 계획을 확정했다. 입단식은 태극기 앞에서 입단 선서문을 목에 걸고 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대신하곤 하였다.
이봉창(1900~1932)과 윤봉길이 각각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들고 찍은 사진을 남긴 것은 그들의 비장한 입단식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나라 잃은 식민지의 청년들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거기 복무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늠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몬(櫻田門)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말이 다치고 마차가 부서졌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봉창이 일제의 조사를 받고 있던 1월 28일에 ‘상하이 사변’이 발생했다. 이는 상하이 국제 공동조계 주변에서 일어났던 국민당 정부와 일본 제국의 군사적 충돌이었다. 전황이 중국에 불리해지면서 국제연맹이 주선한 정전협정에서 장제스 정부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상하이에서의 중국군의 비무장화에 합의하고 말았다.
이 승리에 잔뜩 고무된 일본은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天長節,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갖기로 했다. 이봉창의 동경 의거 실패를 애통해 하던 백범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 훙커우의 채소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던 윤봉길을 부른다.
매헌(梅軒) 윤봉길은 이태 전인 1930년에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건너온 충남 덕산 출신의 우국청년이었다. 그는 이봉창 의거의 실패 이후 백범을 찾아 ‘동경사건(이봉창 의거)과 같은 경륜을 지도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었던 것이다.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원본 백범일지』(서문당, 1989) 중에서
백범이 마련해 준 폭탄 두 개를 갈무리하고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끌러 백범에게 주고 현장으로 떠났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백범의 목멘 음성을 그는 들었을까. 성공이든 실패든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사지로 스물다섯 살의 젊은이를 보내야 했던 백범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늙은 노동자는 비장한 어조로 청년에게 말하길, “군의 목숨은 머잖아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나는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위대한 희생자가 되려는 군에게 혁혁한 성공이 길이길이 군과 함께 머물러 있기를 충심으로 비는 바다.
단지 최후로 군에게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적은 왜놈뿐이니 오늘 거사를 실행함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신중해야 할 것이고, 결코 왜놈 이외의 각국 인사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는 것이다. 자, 폭탄 2개를 주니 한 개로는 적장을 거꾸러뜨리고 또 한 개로는 그대의 목숨을 끊으라!”
청년이 대답하기를 “삼가 가르침에 따르겠나이다. 바라옵건대 선생께서는 나라를 위해 몸을 삼가시고 끝까지 분투하소서!” 늙은 노동자는 또 다시 말을 이어, “군이여, 군과 나는 다시 지하에서 만나세!” 이에 두 사람은 악수를 마치고 헤어지니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김구의 『도왜실기(屠倭實記)』중에서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했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고 일본인들만 남아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이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11시 50분,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순간 윤봉길이 던진 물통 폭탄이 단상에서 폭발했다. 폭탄 명중을 확인하고 자결용 도시락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불발하면서 그는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다.
윤봉길이 던진 폭탄으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등이 죽었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실명,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과 주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다리를 잃었다.
훙커우 의거, 존폐의 기로에서 임정을 되살리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내분과 어려운 여건으로 존폐의 기로에 서 있던 임정을 되살려냈다. 그즈음 임정은 집세도 낼 수 없는 형편인 데다, 국내외 동포의 지지도 상실하여 존재 가치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봉창 의거는 임정의 ‘건재’를 만방에 알린 쾌거였다. 이어진 윤봉길 의거의 성공으로 국제적 지원까지 얻게 되면서 임정은 비로소 민족적 기반을 새롭게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보산 사건과 상하이 사변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중국 주석 장제스는 상하이 의거를 높이 평가하여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윤봉길이 해냈다’며 극찬하고, 이후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의거는 이후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되어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큰 도움을 주었고 광복군 창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 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라며 의거에 비판적이었던 이승만도 뒷날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한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였다.
상하이 의거 이후 마오쩌둥(毛澤東)도 임정의 존재를 인정하고 임정을 괄목상대하기 시작했다.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를 거쳐 충칭까지 임정이 청사를 옮기는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저우언라이(周恩來)를 통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40년 충칭에서 열린 광복군 창립대회에 중국 공산당을 대표한 저우언라이와 둥비우(董必武)가 참석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윤봉길의 의거가 당대에 던진 반향을 감안하면 루쉰 공원 안에 그 기념물이 만들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입구에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 전시관’이라 명시한 경내의 ‘매원(梅園)’은 훙커우 의거의 주인공 윤봉길에게 바쳐진 독립 공간이다.
윤봉길에게 바쳐진 루쉰공원의 매원
입장권을 사서 매원 안으로 들어서면 ‘윤봉길 의거 현장’이라 새긴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비’가 방문객을 맞는다. 1998년에 세웠다는 빗돌에는 우리말과 중국어로 윤봉길 의거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현장 표지석은 실제 의거 지점에서 약 80m 떨어져 있지만 사람들은 빗돌 앞에서 너나없이 옷깃을 여몄다.
사적비 뒤쪽의 아열대 정원 가운데 단아하게 서 있는 2층 정자가 ‘매헌(梅軒)’이다. 정자 주변에 심어 놓은 홍매화 봉우리가 바야흐로 벙글고 있었다. 애당초 이 정자의 현판은 ‘매정(梅亭)’이었으나 한국 측이 윤의사의 아호를 넣은 ‘매헌정’으로 바꾸어 줄 것을 요청한 끝에 2009년에야 다소 절충된 ‘매헌’이란 현판이 걸렸다.
한국인들이 매원을 찾기 시작한 것은 1992년 한중 국교 수립 이후다. 그러나 상하이시 당국은 경제 강국인 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해 매원이 윤봉길 의거를 기념하는 공간임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급속도의 경제 발전을 이룬 중국이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 왜곡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매원이 윤봉길의 의거 현장임을 분명히 밝히게 되었으니 국력이란 역사를 바르게 밝히는 힘이기도 하다.
매헌에는 1·2층 전시실을 마련하여 윤봉길의 영정과 함께 의거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 놓았다. 태극기를 배경으로 수류탄과 권총을 들고 선서문을 목에 건 윤봉길의 그 유명한 사진이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뒤에는 조작된 사진으로 판명된, 의거 직후 일본군에게 연행되는 윤 의사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1932년 5월 28일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윤봉길은 일본으로 후송되어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처형은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에서 이루어졌다. 가나자와 시 미쓰코지야마 서북 골짜기에서 윤봉길은 미간에 총탄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지도 없이 매장되었다. 일제는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 없이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그것은 일본군 수뇌부에 타격을 입힌 윤봉길에 대한 일제 군부의 치졸한 복수였던 셈이다.
동경 의거의 주인공인 이봉창이 도쿄 대법원의 사형선고를 받고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것은 두 달 전인 10월 10일이었다. 서른둘 미혼이었던 이봉창과는 달리 스물다섯의 윤봉길은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갔다. 1932년 하반기 두 달 사이에 일제는 두 명의 식민지 청년을 처형함으로써 저들의 ‘대동아 공영권’이 약소국가와 민족의 핏자국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
만국공묘, 뜻을 잃지 않고 사는 일의 어려움
지금은 송칭링능원(宋慶齡陵園)으로 불리는 상하이 만국공묘(萬國公墓)를 찾은 것은 이튿날이었다. 1981년 국부 쑨원의 처인 송칭링의 유해가 이곳에 안장되면서 송칭링능원으로 바뀐 만국공묘에도 상하이 임정 13년의 자취가 남아 있다. 삶과 죽음이 있는 한 인간은 묘지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만국공묘에는 임정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을 비롯하여 한국인의 묘로 확인, 추정되는 14기의 묘가 있었다. 이 가운데 박은식・노백린・신규식・안태국・김인전·윤현진・오영선·연병환 등 8기는 1993년, 1995년, 2014년 등 세 차례에 걸쳐 고국으로 봉환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임정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안태국(1920)·윤현진(1921)·신규식(1922)·김인전(1923)·박은식(1925)·노백린·연병환(1926) 등과 같이 1920년대 초중반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패망한 조국을 떠나 이국의 도시에서 힘겹게 이어간 항일투쟁 끝에 숨져간 이들의 유해는 그러나 70년이 족히 지나서야 간신히 조국의 산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만국공묘에는 아직도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영자로 표기된 여러 기의 표석이 남아 있다. 이들은 1932년 임정이 상하이를 떠난 뒤에도 일본 점령하의 상하이에 남아 있었던 이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일제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등의 행적은 매우 불분명하다. 무릇 뜻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의거 후, 일본의 배후 소탕과정에서 도산 안창호가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예비 검속자들의 탄압이 계속되자 백범은 거사의 진상을 발표했다. 엄항섭이 기초하고 피치 목사 부인이 영문으로 번역해 로이터통신에 보낸 선언문을 통해 백범은 도쿄와 훙커우 의거가 임정과 자신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세계 각국에 알렸던 것이다.
윤봉길 의거는 그동안 악화되었던 한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을 놀랄 만큼 호전시켰다. 또 의거에 고무된 미국과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에 사는 교포들의 애국열정이 임정에 대한 납세와 후원으로 이어져 임정의 사업이 확장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의거는 한국인의 항일 정신과 독립 의지를 세계에 드높였지만 이후 상황은 임정에 매우 부정적으로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상하이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의 압박이 심했다.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수색과 체포가 이어지면서 임정과 민단은 물론, 부녀단체조차도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또 일본 외무성과 조선총독부, 상해주둔군 사령부 등 3부 합작으로 백범의 체포에 60만 원(현재 가치 200억 원 이상)의 현상금이 걸렸다. 이 같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에 결국 임정과 백범은 상하이를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32년 5월, 마침내 백범은 상해를 탈출하여 자싱(嘉興)과 하이옌(海鹽)으로 피신했다.
백범, 3의사를 조국으로 모시다
백범은 자신이 사지로 보낸 애국단원 이봉창과 윤봉길을 잊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의 순국 13년 뒤에 조국은 해방을 맞았다. 1945년 11월, 임정 주석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던 백범은 이듬해 두 의사와 함께 백정기(1896~1934) 의사의 유해를 일본으로부터 송환한다.
백정기는 1933년 3월에 상하이에서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일본 이사하야(諫早) 감옥에서 옥사한 아나키스트였다. 백범의 부탁을 받아 이들 3의사의 유해 송환의 책임을 맡았던 이가 일왕 암살을 모의하다 체포되어 22년을 복역한 아나키스트 박열(1902~1974)이었다.
3의사의 유해가 송환되자 1946년 7월 7일, 이들의 장례식이 5만여 군중이 참례한 가운데 해방 후 첫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3의사는 문효세자의 묘소가 있던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효창원 3의사 묘역에는 아직도 유해를 모셔오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허묘 오른쪽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소가 나란하다.
삼의사의 묘 기단에 백범은 민족을 향한 그 ‘애국충정의 향기가 영원하라’는 의미로 ‘유방백세(遺芳百世)’라는 자신의 친필을 새겼다. 그러나 3년 뒤, 백범 자신도 흉탄에 맞아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하고 이들 3의사 이웃 묘역에 묻혀야 했다.
중국에서 돌아와서야 나는 1988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에 국민 성금으로 ‘매헌기념관’을 세웠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국가나 서울시의 보조 없이 운영되는 기념관은 2013년에는 재정적자 때문에 전기료를 납부하지 못해 단전 위기를 겪기도 할 만큼 어렵다. 어쩌면 그것은 해방 전사(前史)를 바라보는 이 나라의 민낯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보수 세력 가운데에는 현대사에서 임정의 이름을 지우고 싶은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친일의 배덕(背德)을 부정하고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은근히 미화하면서 해방이 항일투쟁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미국의 승리로 주어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 편향된 역사의식은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뉴라이트 교과서’와 ‘교학사 역사 교과서’로 이어진다. 그것은 백범이 조직한 ‘의열투쟁’을 ‘항일 테러 활동’으로 폄훼(뉴라이트 교과서)하거나 임정 수립일과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누락(교학사 교과서)시키는 방식으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뒷사람들의 몫은 여전히 무겁다
매헌 관련 자료를 뒤적이다가 나는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훙커우 공원을 답사하고 숙소로 돌아온 윤봉길이 백범의 요청에 따라 썼다는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을 한 자 한 자 뜯어 읽었다. 고작 스물다섯, 요즘 같으면 가치관을 정립하기에도 버거운 나이에 그는 빼앗긴 조국의 이름 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에 깃발을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고단하고 강퍅한 시대는 청년을 성큼 어른으로 자라게 했던가. 일제가 처형에 앞서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묻자 윤봉길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고 담담히 대꾸했다. 일제의 탄환이 그의 몸을 꿰뚫는 순간, 그는 ‘강보에 싸인 두 병정’을 떠올렸을까.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를 읽으면서 나는 이로써 매우 담담하게 윤봉길과 그의 시대를 일별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아들에게 남긴 글의 어느 갈피에선가 나는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어떤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스스로 전혀 제어할 수 없는 오열로 복받쳐 왔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국외자의 눈길로 현대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이봉창과 윤봉길의 죽음이 83년의 시간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프게, 그리고 부끄럽게 확인케 해 주는 것이었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 앞에서, 뒷사람들의 몫은 여전히 무겁고도 무거운 것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정을 따라서 (3): 37살의 나이 차, 백범과 중국여인의 ‘특별한 동거’」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