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서른여덟 명의 ‘청년백범 4기’ 답사단은 지난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 자취를 찾아가는 여정에 올랐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임정의 중국 내 이동 경로는 항저우(杭州),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을 거쳐 충칭(重慶)까지다.
그러나 우리의 여정은 우선 창사로 옮기기 직전의 난징(南京)까지다. 지난 세기, 백범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배를 타고, 혹은 기차를 타거나 걸어서 옮겨 다닌 수백, 수천, 수만 리의 길을 21세기의 후손들은 비행기로 날아 전세 버스를 타고 따른다. 그들이 일제에 쫓기며 꾸려야 했던 풍찬노숙 16년(1919~1935)을 우리는 고작 4박 5일로 되밟을 뿐이다.
출발에 앞서 우리는 되물었다. 왜 다시 백범인가, 무엇 때문에 다시 우리는 임정을 호명하는가. 이 답삿길이 한가하게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현대사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일 뿐인가. 새삼스레 잊힌 역사의 갈피를 뒤적이는 것은 한갓진 호사 취미는 아닌가.
물론 그것은 아니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선열들의 간난의 삶, 그 자취를 되밟으며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시대에 되물을 것이다. 잊혀 가는 이들 독립 투사들이 온몸으로 기록해 온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과 좌절의 연대기를, 간단없이 이어지고 있는 이 영욕의 민족사, 그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기자>
인천을 떠나 상하이에 닿는 데 걸린 시간은 100분이었다. 상하이 푸동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100년도 전에 나라를 잃고 상하이에 모여든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신의주를 거친 육로로, 혹은 진남포와 인천에서 중국의 정크(junk)선을 타고 황포강(黃浦江)을 통해 상하이에 닿았다. 나라 잃은 이들 우국지사들이 밟았던 망명길은 몇 날 며칠이 걸렸던가.
상하이는 중국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이자 국제도시다. 아편전쟁(1840~1842) 후 체결된 난징조약으로 열강들의 조계(租界 : 19세기 후반에, 중국의 개항 도시에 있었던 외국인 거주 지역. 외국이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했다)가 설정되면서, 상하이는 동·서양이 만나는 정치·문화의 중심지면서 열강들의 활동 무대가 됐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한 데다 쑨원(孫文)이 이끄는 광동 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의 조계가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강점이었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상하이에는 이미 대한제국 장교 출신으로 경술국치 이후 망명해 신해혁명(1911)에 참여했던 신규식(1880~1922)이 쑨원 등의 중국 혁명 인사들과 교유하고 있었다. 이에 국내·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어 동제사(1912), 신한청년당(1918) 등을 결성해 활동하면서 상하이는 해외 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마침내 조국에서의 ‘독립선언'(3·1 운동) 한 달 후인 1919년 4월, 국내·외 지도자들이 상하이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이를 유지·운영하기 위한 임시정부를 수립한 배경이었다. 중국 망명길에 오른 백범 김구(1876~1949)가 상하이 와이탄(外灘) 나루에 상륙한 것은 임정 수립이 정식으로 대내·외에 선포되던 날(4월 13일)이었다.
상하이에서 수립되어 흔히 ‘상해 임정’이라고 불리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임정은 수립 이후에 여러 도시를 전전해야 했다. 임정은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항저우로 이전할 때까지 13년 동안 상하이에서 활동했다. 나머지 도시 가운데 충칭에서 활동한 시간이 5년으로 가장 길고 나머지는 1~2년이거나 불과 몇 달에 불과하니 역시 임정은 ‘상해 시대’가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임정은 지금의 서금로(瑞金路) 2층 양옥집을 빌려 청사로 사용했다. 건물에는 태극기를 게양했고, 정문에는 인도인 수위를 두었다. 그러나 이 청사는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이 최초의 청사는 1919년 10월 일제의 압력에 의해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폐쇄조치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후 임정은 개인의 집이나 기관에 사무소를 두었다. 임정이 한 곳에 오래 있지도 못하고 12차례 넘게 옮겨 다녀야 했던 것은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 탓이었다. 임정은 가난했고, 요인들은 더 가난했다. 임정에 합류해 경무국장을 맡은 백범은 그 시절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 그러고서 외롭게 혼자 떨어져 살았다. 잠은 정청(政廳)에서 자고, 먹는 것은 직업을 가진 동포들의 집(전차공사와 버스공사 사표원이 60~70명 있었다)에 다니면서 먹고 지내니, 거지도 상거지였다. 나의 처지를 아는 까닭으로 누구나 차래식(嗟來食 : 푸대접으로 주는 음식)으로 대접하는 동포는 없었고(…)
─ 『원본 백범일지』, 1989, 서문당, 278쪽.
임시정부는 망명지에서 수립됐지만, 2차 대전 당시의 폴란드처럼 본토에서 합법 정부가 옮겨간 형태가 아니었다. 10여 년 전에 명운을 다한 봉건 왕조 대신 조국은 일제 총독부의 지배 아래 있었다. 당연히 주권자들의 뜻을 묻는 것도, 위임을 받아 정부를 구성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임정의 가난, 독립운동가들의 궁핍
임정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선포된 기미독립선언에 기초해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한 망명정부 형태의 독립운동 단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안팎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고자 한 임정은 자연스레 동포들의 광복에 대한 열망을 포괄하면서 망명 정부로서의 지위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임정은 물적 기반을 전혀 갖지 못한 망명 정부로 운영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잠은 청사에서, 끼니는 동포들의 집을 전전하며 해결해야 할 정도였으니 더 무엇을 말하겠는가. 그런 악조건 아래서도 임정이 항일 투쟁의 구심으로서 구실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요원들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에 힘입어서였다. 그들은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도 나라를 되찾는 일에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상하이 태창로(太倉路)의 신천지(新天地) 카페 골목은 지금은 상하이에서 가장 서구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곳이다. 그러나 1920년대에 이곳 영경방(永慶坊)에 임정 요원들의 숙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영경방 10호는 동농(東農)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정정화 부부가 살던 곳이었다.
백범은 영경방에서 모친 곽낙원과 아내 최준례 그리고 두 아들과 살았다. 백범은 여기서 둘째 신(信)을 얻었으나 아내를 잃었다. 최준례는 산후 조리 중 계단에서 굴러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다 외국인 무료 진료소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을 거두었다. 병원이 프랑스 조계지를 벗어나 있어 김구는 아내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동지들은 최준례가 겪은 고난이야말로 나랏일에 이바지한 것이라며 의연금을 모아 장례를 치르고 묘비까지 세워 주었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독립 투사들의 풍찬노숙의 이면에는 처자들의 희생과 고통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도 이 근처 골목에서 중국인이 다듬고 버린 채소 껍질을 주워야 했던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1892~1926) 의사가 거사를 위해 국내로 들어가기 전에 자기 옷을 저당 잡고 고기를 사와 백범의 생일을 차려준 곳도 여기다. 의열단원 나석주는 백범의 제자로 거사 후 자결로 장렬하게 숨져갔다. 백범은 이 영광된 생일상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그 후로는 생일을 기념하지 않았다.
1990년대만 해도 후미진 뒷골목이었던 영경방은 이제 세련된 실내 장식을 갖춘 카페가 들어찼다. 백범 일가가 살았던 영경방 10호도 ‘바베네(vabene)’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되어 있었다. 이 골목에서 아내를 잃은 백범은 결국 어머니와 두 아들을 고향 황해도로 돌려보내고 마당로의 임정 청사로 거처를 옮긴다.
임정은 정부 수립 7년째인 1926년 3월에야 안정적인 청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임정이 상하이를 떠날 때까지 사용했던 이 청사가 노만구 마당로 304호(옛 보경리 4호)에 있는 붉은 벽돌의 3층 건물이다. 1993년 우리 정부가 이를 임정 시절의 모습으로 복원했고, 그 후에도 적극적인 관심이 이어지자 2001년 다시 확장 보수해 재개관했다.
마당로 304호, 백범의 세 가지 실천
마당로는 버즘나무 가로수가 이어진 좁다란 옛 시가지다. 거리 한쪽에 들어선 청사 건물은 인도에 선 이정표가 아니었다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상하이를 찾은 한국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 작고 보잘것없는 건물이 힘겹게 지고 있는 역사의 무게 때문이다.
안내원을 따라 들어오는 한국 관광객들이 호기심 어린 모습인데 반해 청사를 관리하는 중국 관리인들의 무표정은 대조적이었다. 상하이시는 1990년에 이 건물을 노만구 문물 보호 단위 제17호로 지정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가 이웃 나라의 역사 유적을 보호하고 기념할 수 있게 한 것은 한중 두 나라가 과거 항일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도 전의 시간으로 복원한 회의실, 백범의 집무실, 요인 숙소 등을 돌아보면서 켜켜이 쌓여 있는 시간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곳에 밴 독립지사들의 고뇌와 좌절, 희망과 분노를 이해하는 일은 콧수염을 기르고 집무실에 앉아 있는 백범의 마네킹만큼 낯설고 만만찮을 일이었을 것이다.
백범은 여기서 독립운동을 위해 죽으리라 결심하고, 세 가지 일을 실천한다. 어린 두 아들에게 남길 유서로 『백범일지』 쓰기,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하와이·멕시코·쿠바의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동포 노동자에게 편지 쓰기, 독립을 위해 함께 죽을 동지를 찾아 ‘한인애국단’ 조직하기가 그것이었다.
백범은 이 청사에서 1929년부터 1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지난 독립운동 사실을 회고하며 『백범일지』 상권을 썼다. 재정난 때문에 임정은 청사의 임대 비용마저 제대로 내지 못했으므로 백범은 늘 미주 동포들에게 자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야 했다. 그리고 그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은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윤봉길 의거의 성공은 중국에서의 항일 투쟁의 흐름을 바꿔놓은 쾌거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정을 지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상하이가 이미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데다 일제의 의거 배후 소탕 과정을 피해 임정은 상하이를 떠나야만 했다. 나라 잃은 정부의 갈 길은 멀고 고단했다.
청사 인근에는 대한교민단에서 한인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개설한 인성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1917년 정식 초등교육기관으로 출발한 인성학교의 교사들은 주로 임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됐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1935년 폐교된 인성학교는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망국의 한을 안고 떠나온 망명지에서조차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우리 민족이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배움으로 이어가고자 했던 이들의 꿈은 끝내 35년의 질곡을 끊는 해방으로 이어진 힘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인구 이천사백만의 매머드 도시 상하이 모퉁이에 숨어 있는 80년 전의 임정 옛터를 돌아보고 나서 허허로워진 마음을 달래준 것은 저녁 특식이었다. 쉬자후이(徐家汇) 홍치아오 거리에 있는 평양 옥류관 식당에서였다. 북한이 중국과의 합작으로 문을 연 옥류관에선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는 북한식 가무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해방과 분단, 백범과 남북 협상
젊고 아름다운 여종업원들은 음식을 나르고 손님 시중을 들면서 틈틈이 무대에 나가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갖춰 입은 변형된 한복의 맵시만큼이나 노래와 춤은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그들의 춤과 노래를 지켜보면서 나는 1948년 봄, 삼팔선을 넘었던 백범 일행을 생각하고 있었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단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도는 원한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런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사(深思)하라.
─ <서울신문>, 1948. 2.11~13
1948년 2월,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세력 등에 의한 단독 정부 수립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백범은 이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백범은 김규식, 조소앙, 박헌영, 백남운 등 좌우 인사들과 함께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통일 민주국가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 8월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됐고, 이듬해 6월 백범은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저격을 받아 73년의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 후, 남북은 이태도 되지 않아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러야 했고, 다시 반세기가 지나면서 분단의 벽은 더 높아졌다.
과거의 역사로서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의 한계는 적지 않다. 당대의 정치·사회적 상황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아쉬움을 쉽게 버리지 못할 만큼. 그러나 임정과 백범의 한계는 개인의 그것으로 이해하기보다 당대 사회적 역량의 한계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지.
남북이 각각 단독 정권 수립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시도된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평가는 참석자마다 엇갈렸다. 그러나 “광복 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 결의된 공동 성명에 담긴 내용은 당장 실현되기는 어려웠으나 통일 국가 수립 방안을 구체화했다는 데 의의”(서중석)를 두는 견해는 곱씹어 보아야 할 대목이다.
마지막 여정으로 상하이 구시가지에 있는 명청(明淸) 시대 양식의 정원이라는 예원(豫園)을 찾았을 때 상하이에는 밤이 내리고 있었다. 와이탄(外灘)의 새해맞이 행사장에서 일어난 대형 안전 사고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황포강의 유람선은 운행을 멈추었고, 강변의 현란한 조명도 꺼져 있었다.
불 꺼진 동방명주(東方明珠)를 바라보면서 나는 와이탄 나루에 상륙했던 96년 전의 백범과, 상하이를 거쳐 간 유·무명의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낯선 이국땅에서 오직 희생과 헌신으로 임정을 지켜낸 요인들의 27년 세월을 까마득하게 그려보면서 임정 연구자 이봉원의 헌사가 결코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 있었다.
“27년이나 되는 긴 기간 동안 정부 조직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식민지 해방 투쟁을 벌인 나라는 세계에서 오직 대한민국뿐이다.”
─ 이봉원, 2013, 『알기 쉬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 정인출판사.
원문: 이 풍진 세상에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정을 따라서 (2): 백범의 한인애국단과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