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의 길거리는 똥 천지였다.” (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서양의 화장실
동양과는 달리 서양에서는 화장실을 갖춘 집들이 적었다.
동양에 비해 인분을 거름으로 쓰는 시비법이 덜 발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떻게 용변을 봤단 말일까?
그냥 밖에서 누거나 아니면 요강을 사용해서 버렸다.
어디다 버렸단 말인가?
그냥 아무 데나 버렸다.
강에다 버리기도 하고 그냥 길가에 버리기도 했다.
예컨대 17세기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는 깊은 밤이 되면 갑자기 분주해졌다.(캐서린 애셴버그,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
이 시각에 사람들은 길거리에 요강을 비웠다. 그래야 밤새 차가운 공기 중으로 분뇨의 악한 기운이 날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이면 거리에는 똥과 오줌이 바짝 말라 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밤이 되면 제리(jerry)라고 부르는 요강을 투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곱게 투척하면 괜찮을 것을 2층에서 대충 뿌려대는 통에 길가는 사람이 똥물 세례를 맞는 일이 매우 흔했다.
“때문에 당시에는 우산과 하이힐이 필수품이었을 정도…”
하지만 산업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부유층을 중심으로 점차 화장실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렇더라도 대부분의 서민들은 여전히 화장실이 없었으므로, 아무 곳에서나 용변을 보았다.
때문에 18세기 파리에서는 궁중에서 심은 주목나무를 화장실로 쓰는 것을 당국에서 막자, 사람들은 일제히 센느 강에다 용변을 봤다고 한다.
19세기경 유럽에서는 공중화장실이 생겨나는데,
19세기 후반 영국의 공중화장실을 시찰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클라이브 폰팅, 『녹색세계사』)
엥겔스
“맨체스터에서 200명의 사람들이 한 화장실을 나누어 쓰는 것을 봤다. 그곳의 공중 화장실들은 하나같이 문짝도 없었고…”
“화장실은 너무 더러워서 이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썩은 오줌과 똥구덩이로 범벅된 사방의 도랑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조선 시대의 화장실
동양에서는 화장실이 있었다. 변을 모아 밭에 퇴비로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전통시대의 동양은, 서양보다 훨씬 깨끗한 분뇨처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한양과 같은 도시였다.
조선 후기가 되면 한양의 인구가 급증하게 되는데, 때문에 한양의 거리에는 대로변까지 불법 민가가 들어서고 있었다.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는 이렇게 한탄하기도 했다.(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2권)
영조
“아! 도성 안의 백성이 많아도 너무 많다능.”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초 10만 명이던 한양의 인구가 18세기로 들어서면 20만 명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분뇨 처리도 갈수록 문제였다.
시골에서는 분뇨를 비료로 쓰면 됐지만
도성 안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으니,
분뇨를 버리는 것도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다.
이때 사람들은 몰래 하천에다가 투기하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실학자 박제가는 이렇게 한탄하기도 했다.(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2권)
박제가
“한양에는 수레가 없어서 오물을 쉽게 퍼가지 못하고 사람들은 냇가나 거리에 분뇨를 함부로 버리고 있다.”
박제가
“도성의 물맛이 짠 것은 바로 함부로 내다 버리는 똥오줌 때문이다!”
“다리 밑을 보면 인분이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큰 장마가 아니면 씻기지 않는다.”
실학자 박지원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연암집』)
박지원
“도성의 사람들은 함부로 분뇨를 하천에 버리기도 했는데…”
“그런 이유로, 장마철에 물이 범람하면 분뇨 섞인 오수가 거리 곳곳으로 번지기도 했다.”
당시 거리에는 아무 데나 싸고 버린 인분들이 널려있었고
청계천에는 그런 변들이 둥둥 떠다니다가 돌로 쌓은 둑에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큰비가 내려야만 분뇨들이 씻겨 내려갔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당시는 배수 시설이 형편없어서 똥물이 곧 민가를 덮쳤다는 게 문제였다.
심지어 선왕의 후궁들이 기거하는 자수궁과 같은 지대가 낮은 궁궐에까지 오물이 괴여 궁중에서도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동양에서의 화장실은 배설물을 모아 비료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으니,
‘시비법’이 없었던 고려 시대 이전에는 애써 배설물을 모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퇴비를 모르던 시절에는 화장실보다는 ‘요강’을 주로 사용했다.
또 요강의 사용은 한양과 같은 도성에서는 필수적이었다. 어쩌면 전통시대에서는 화장실보다 요강이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시대에는 발달된 수리시설로 수세식 화장실까지 사용됐으나,
중세 이후 화장실은 사라지고 요강이 보편적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도 요강은 애용되는 아이템 중 하나였으니, 에도시대에는 야외용 요강이 따로 있었을 정도였다.
서울 거리는 대소변투성이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남긴 기행문에 자주 등장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거리 곳곳에 널린 오물 덩어리였다.
당시 서울 거리는 대소변투성이었고 늘 악취가 진동했다.(동아일보 2007년 6월 21일자)
영국인 비숍은 이렇게 말했다.(『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1897)
비숍
“나는 중국의 베이징을 보기 전까지 서울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가 아닌가 했고”
“샤오싱을 보기 전까지 서울을 가장 냄새나는 도시로 생각했다.”
영국인 여행가 새비지 랜도 역시 이렇게 표현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1895)
랜도
“서울에 도착하니 여름에는 비 덕택에 오물이 씻겨내려가 지낼 만하고…”
“겨울이면 얼어붙어서 괜찮았지만…”
랜도
“봄철에는 얼었던 오물들이 풀리면서 풍기는 냄새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차라리 내 코가 없어졌으면 했다.”
그런데 이 말은 마치 유행어라도 된 듯, 한 독일인도 비슷한 말을 했다.(고유경, 2005, 「한독관계 초기 독일인의 한국 인식에 나타난 근대의 시선」, 349쪽.)
독일인
“이런 더러운 도시가 역병에 시달리지 않는 것은…”
“겨울의 혹한, 여름의 홍수가 오염물질을 그나마 쓸어주기 때문이고…”
독일인
“그래도 남은 더러운 것들은 개들이 싹 먹어치운다.”
“그래서 한국인은 감사의 표시로 개를 먹는다.”
1901년부터 4년간 고종의 주치의로 있었던 독일 의사 리하르트 분쉬도 비슷한 말을 했다.(김종대, 『대한 제국을 사랑한 독일인 의사 분쉬』)
분쉬
“서울의 길거리 청소는 견공들에게 맡겨놓은 상태다.”
“곳곳에 널린 대변을 개들이 먹어치우니, 길의 청결 여부는 견공의 식욕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 과학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서울대 의대 신동훈 교수의 말이다. ☞ 출처
신동훈
“경복궁 담장, 광화문 광장, 종묘 광장 등 조선 시대 지층에서 회충·편충 등의 기생충 알을 발견했다.”
“추출한 흙에서 1g당 최고 165개의 알이 나왔고, 평균 35개의 알이 검출됐다.”
“기생충 알은 주로 인분으로 배출된 뒤 채소 등의 먹거리에 섞여 다시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감염된다는 점에서 당시 한양에는 인분이 널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분뇨를 비료로 사용하는 시비법은 중국에서 유래되었는데
시비법으로 인해 토지의 단위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하여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되었지만, 대신 ‘기생충’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20세기 초 90%의 중국 주민들이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개화파들은 처참한 조국의 현실에 악담을 퍼부었다.
윤치호의 일기 내용이다.(장만석 외, 『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다』, 104~105쪽.)
윤치호
“천하 만고에 조선만큼 더러운 곳도 없다.”
“중국 도로에 지린내, 구린내가 진동한다지만 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똥 구더기에 사는 격이다.”
“일본인의 집은 밝고 깨끗한데 중국인의 집이 더럽고 음침하다면서 욕을 주지만…”
“조선 사람들의 집은 똥 뒷간 수준인데 어찌 중국인들의 이층집에 비교하겠는가. 한심스럽다.”
1882년 김옥균은 이렇게 말했다.(장석만 외, 『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다』, 102쪽.)
김옥균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 사람들은 오죽했으면 이런 말을 한다.”
“조선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길에 가득한 사람과 짐승의 똥오줌이다.”
“관청에서부터 민가의 마당에 이르기까지 오물 천지로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이 어찌 외국의 조소를 받지 않을 일인가?”
심각한 수질오염
토양의 오염은 필연적으로 수질오염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보자. 영국인 비숍의 글이다.(『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1897)
비숍
“서울 골목길에는 서방에 널린 도랑과 시궁창으로 가뜩이나 좁은 골목은 더욱 비좁았다.”
“도랑에는 초록색 점액질의 걸쭉한 오물이 고여 있어서, 지독한 냄새가 났는데.”
“이는 집집마다 버려진 분뇨와 쓰고 버려진 하수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더럽고 썩은 시궁창에 반라의 어린이들이 즐겨 놀고 있었고…”
“노점상들은 판자 조각을 시궁창에 걸쳐 놓고 그들의 상품을 팔고 있다.”
“개인 우물을 가진 곳도 상황은 심각했다.”
“마당의 반쯤은 두엄더미인데 여자들이 태연하게 그 우물에서 식수를 긷고 있었다.”
미국인 언더우드 부인도 비슷한 글을 썼다. (『조선견문록』, 1895)
언더우드 부인
“조선의 좁은 하수로는 오물로 가득 차서 도로로 흘러넘쳤고…”
“때문에 녹색의 이끼 낀 물웅덩이가 거리 곳곳에 가득했다.”
“그런데 그런 오물에서 여인네들은 야채를 씻어 먹고 있었다.”
선교사 헐버트 역시 비슷한 얘기를 했다.(『대한제국 멸망사』, 1906)
헐버트
“한국인들은 초보적인 위생 상식도 없었으니, 아무리 부잣집에 가도 상황은 다를 바가 없었다.”
“청소를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오물을 피해 가는 것이 더 현명했다.”
“우물도 매우 오염돼있었는데, 오물이나 빨래를 했던 물, 더러운 하수가 그대로 버려졌다.”
선교사 알렌의 글도 비슷하다.(정성화·로버트 네프, 『서양인의 조선살이』)
“서울은 어딜 가나 위상상태가 좋지 못했다.”
“대감들이 몰려 살고 있는 부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관 댁 담장 아래로 하수로가 나 있었는데…”
“씻고 버린 채소나 쓰레기들이 쌓여 있어 악취가 엄청났다.”
“하지만 그런 길을 태연하게 대감들은 가마나 말을 타고 지나간다.”
이번엔 1899년 독립신문의 글이다.(고미숙, 2004, 『근대계몽기 지식 개념의 수용과 그 변용』, 310쪽.)
독립신문
“도성 안의 개천의 물에는 악독한 냄새와 지미한(미세한) 버러지가 나와…”
“코와 입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병이 나게 한다.”
“도성 안에 있는 우물 또한 모두 대소변의 거름물이 스며든 것이니, 그 물을 깨끗한 유리병에 담아 놓고 좋은 현미경으로 볼 것 같으면…”
“물 가운데 반드시 무수한 버러지가 있을 터이니 그런 물을 먹고서야 어찌 무탈할 수 있겠는가.”
거리청소의 시작
그야말로 불결함은 조선의 명물이었다.
한양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팔도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사람들이 워낙 몰리는 시장에서는 따로 공중변소를 설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매우 열악했다. 일본인 혼마 규스케의 글이다.(『조선잡기』)
혼마
“시장의 중앙에 공동변소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다만 짚으로 지붕을 엮고, 거적을 두른 조잡한 것이었는데…”
“주변에는 인분을 받아 먹이려 개와 돼지를 길렀기 때문에…”
혼마
“사람이 들어가면 옆에서 기다렸다가 인분이 나오면 짐승들은 재빨리 받아먹었다.”
“때문에 그 모습을 보면 거의 구토를 하게 된다.”
결국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정부는 거리 청소에 관심을 갖게 된다.
“조선에만 있을 때는 어디가 나쁜 줄 전혀 모르다가…”
“세상 밖을 나가보니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었음.”
당시 내무 대신이 된 박영효가 경찰 업무에 위생 사무를 포함시켰다.
박영효
“거리 청결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앞으로 순검이 맡도록 하라.”
이어서 1897년 독립신문은 길거리를 깨끗이 하기 위해 공립 뒷간(공중화장실)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으나,
고종
“공립 뒷간이라니, 쓸데없이 돈을…”
“그냥 앞으로 길가에 대변을 누지 않도록 하라.”
이렇게 칙령을 반포했을 뿐 공중변소가 설치되진 않았다.
공중변소가 처음 생긴 것은 1904년 6월 ‘위생청결법’이 만들어지면서부터였다. 당시 위생청결법의 내용은 이러했다. ☞ 참고 (동아일보, 2007년 6월 21일자)
관리
“집집마다 매일 쓰레기를 청소하되 준수하지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공중변소를 만들 것이니 앞으로 노상방변과 노상방뇨는 금지한다.”
“우물의 불결로 질병이 발생하니 앞으로 우물을 청결케 한다.”
똥구멍이 원수로다
이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거리의 대소변을 없애는 것이었다.
때문에 집집마다 화장실을 설치해야 했으니, 새롭게 수거 문제가 대두되었다.
또 위생회사 혹은 청결회사라고 불리는 일본인 소유의 회사가 설립되었으니, 이 회사에서는 인부들을 고용하여 손수레로 분뇨를 실어 날랐다.(권보드래,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274쪽.)
대신 거리에 대소변을 보다 발각되면 참담한 수모를 당해야 했다.
걸리면 뭇매와 벌금은 기본이었고 자기 오줌을 핥아먹어야 했던 이들도 있었다.(이승원, 『학교의 탄생 : 100년 전 학교의 풍경으로 본 그대의 일상』, 138쪽.)
이때 일본처럼 1개월 징역에 처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권보드래,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275~276쪽.)
하지만 가혹한 대응에 사람들은 내심 분노했다.
지나가던 백성
“이건 너무 심하잖아!”
지나가던 백성
“아, 그럼 공중변소를 많이 만들던지. 급해서 바지에 싸게 생겼는데…”
다달이 걷는 위생비도 서민들에겐 큰 문제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공과금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니 반발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생비를 내지 않으면 분뇨를 수거해가지 않았으니, 애써 만든 화장실에 대소변이 대책 없이 쌓여가는데 어찌하겠는가?
때문에 위생비를 낸 집 문간에 붙여놓도록 한 표찰을 몰래 떼다 자기 집에 붙여놓는 도둑질이 횡행하는가 하면,
분뇨를 몰래 거리나 개천에 내다 버리는 일도 잦았다.
이런 무단투기가 어찌나 심했던지, 거리가 예전보다 더 더러워졌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예전처럼 마당 한편에 변을 말려 거름으로 팔 수는 없었다.
일제가 거름 판매를 일체 금지했기 때문에 위생회사를 거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분뇨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위생회사의 주인이었던 일본인들은 수거비를 받는 동시에 분뇨를 농촌에 내다 팔아 다시 이익을 챙겼다.
1908년 10월 대한매일신보 논설이다.(권보드래,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275쪽.)
대한매일신보
“몇백만 명 한국인의 똥이 일본인의 손으로 모두 넘어가서…”
“몇천만 석 거름의 이익이 일본인의 입으로 몽땅 들어갔다.”
“아! 똥구멍이 원수로다.”
하지만 이후로도 쉽사리 길거리에 변을 싸는 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1910년대 신문사설의 자주 등장하는 말은 이러했다.(민족문제연구소, 『한국인의 생활과 풍속』 상, 93쪽.)
신문
“길바닥에 똥을 누지 말라능!”
원문: 레알뻘짓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