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잡설
주변에 과학자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자세히 물어본 적이 있는가? 전문용어 쓰려고 하면 “전문용어 말고, 좀 쉽게 설명해봐.” 해 가면서. 그렇게 해서 설명을 들어 봤더니 “그런 거 연구해서 도대체 어디에 써먹음? 난 또 과학자고 박사래니까 무슨 대단한 거 하는 줄 알았구만. ㅋㅋㅋ”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뭐 솔직히 본인도 학회에 가보면 아무리 동업자 쉴드가 쳐진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저런 거 왜 하는지, 저런 걸 알면 왜 중요한 건지 잘 이해가 안 될 경우가 많은데, 일반인이라면 오죽하겠느냐고.
그렇다면 이런 것은 왜 하는가? 솔직히 지금 해봐야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쌀이 나오는 것도 아닌 그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우리의 혈세를 낭비하는 과학자넘들~ 참 나빠요 그쵸?
근데 원래 과학자라는 게 다 그런 거다. ㅋ
과학자는 자기 궁금한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님들의 혈세를 낭비해 가면서 연구를 하는 게 직업이니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 하실 분들은 이렇게들 이야기하실 것이다. “그래도 뭔가 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연구한다고 하면 안 되니? 기상이변, 에너지 고갈, 암 퇴치, 불로장생, 우주정복, 주색잡기.” 물론 많은 분들이 이런 명분으로 조금 더 많은 혈세를 타가시긴 하지만, 사실 이런 명분에 대한 뾰족한 답은 크게 못 내놓으시는 경우가 많다. 결국 이런 명분은 자기가 궁금한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여러 호갱님들의 주머니를 좀 더 효율적으로 털기 위한 명분이라니까…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을 대중에게 폭로하는 MadScientist는 자폭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가 아닌 너님들은 나님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세금을 내실 신성한 의무가 있는 거다. 왜? 그게 인류가 진보해온 방식이다. 원시인 시절 하라는 곰 새끼와의 현피는 안 뜨고 어디 짱박혀서 돌멩이나 가지고 놀던 잉여 원시인 1인에 의해서 인간은 도구를 발견하게 되어, 곰 새끼의 브런치가 될 위기를 면했고, 나무쪼가리나 깨작거리던 또 다른 1인에 의해서 불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리고 곰탕을 먹게 되는데…
“그건 그때, 지금 너님들이 하는 것은 밥도 안 나오고 쌀도 안 나오는 혈세낭비!”라고 하실 분들을 위해서 요즘의 전형적인 “아무리 해도 돈 나오는 것과는 관계없을 연구들” 몇 가지를 소개해보도록 하자.
1. 1987. 어떤 잉여 DNA
1987년. 일본 오사카대학. 새로운 유전자 클로닝(편집자 주: 클론, 즉 유전적으로 균질한 집단을 만드는 것)하면 좋은 박사학위 논문이 되던 시절, 어떤 연구자 한 명이 어떤 유전자를 클로닝하여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발견하고자 한 유전자가 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시퀀싱을 해서 원하는 단백질을 코딩하는 ORF를 찾고 나니, 음? 뒤에 요상한 시퀀스가 있네~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stem-loop 같은 구조 같기도 하고? 근데 뭐하는 넘인지는 모르겠다. ㅋ 그냥 날로 먹는 Fig 하나 벌었다. ㅋㅋㅋ
그리고 논문에는 “뭐 요상한 게 있는데 뭔진 모르겠다능~ 뭐 걍 정크 DNA가 요기 잉네~”라고 쓰고 넘어갔다. 사실 과학자가 잉여스러운 관심을 보이는 게 직업이라고 해도 이런 것은 요상하긴 하지만 뭔지 알 도리가 있으니 아무리 잉여스러운 과학자라도 이런 게 왜 있냐, 뭔 기능을 하냐 차마 뒤져볼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흘렀다.
2. 2002. 정크 DNA가 요기죠기 잉네?
2002년. 1987년에는 유전자 하나 클로닝하여 시퀀싱하면 박사 논문이 될 시절이었지만 이제 2002년 정도가 되면 휴먼 지놈 프로젝트에 의한 기술의 발전으로 박테리아 하나 따위는 몇 년 정도 시간이 걸리면 전체 지놈서열이 나오던 시절이 되었다. 수백 개의 박테리아 지놈 시퀀스가 쏟아져 나왔다.
이런 지놈 시퀀스를 여러 가지 훑어보던 네덜란드의 한 연구자가 이전에 1987년에 발견된 시퀀스가 사실은 여러 가지 세균과 고세균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이런 논문을 냈다.
각종의 박테리아에 비슷한 반복서열이 모여서 존재하는 경우가 많더라. 그래서 이런 서열을 “일정 간격으로 규칙적으로 모여있는 작은 문회(palindormic repeat) 서열” 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 라는 진짜 멋대가리없는 이름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이런 잡스러운 시퀀스 근처에 보면 단백질들이 있는데, 각 종의 세균에 보니 비슷한 아미노산 서열을 가지는 비슷한 계열의 단백질들이네?
근데 뭐하는 단백질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까 그 잉여스러운 시퀀스에 관련되어 있는 건가부지? 그래서 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 에서 cas 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나서 논문 하나 내고 잊어버렸다. ㅋ 아직도 이게 뭐하는 시퀀스인지는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3. 2007. 감기에 걸리는 유산균
이제 좀 더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2000년대 중반. 덴마크의 요구르트 회사 DANISCO
요구르트이든 MSG이든 대량의 미생물을 배양하여 발효하는 공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오염. 오염에는 곰팡이 (fungi), 다른 박테리아 등등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가장 심각한 오염이라고 한다면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에 의한 오염이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말하자면 박테리아에 감염되는 바이러스. 뭐 그런 게 있다.
“풋~ 박테리오파지는 1950~60년대에 다 연구된 거잖아염. 저런 시덥잖은 거 가지고 고민하는 님들 좀 한심.”이라고 생각하는 양반들도 있겠지만, 뭐 그때 연구된 것은 주로 E.coli에 감염되는 coliphage. 그것도 막스 델뷰릭이라는 전직 물리학자 출신 아저씨가 ‘뭐 우리 여러 가지 각자 가지고 싸우는데, 그러지 말고 한 서너 가지만 가지고 드립다 팝시다‘ 하고 선정된 몇 가지의 박테리오파지. 즉 유산균 등의 산업미생물에 기상하는 파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른다.
여하튼 여기는 요구르트 회사이고, 요구르트 발효 도중에 한번 감염되면 컬춰를 완전히 망치는 유산균 박테리오파지에 대한 연구를 조금 진행하고 있었고, 이러한 박테리오파지에 내성이 있는 유산균을 개발할 수 없을까 하고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a. 산업적으로 표준처럼 사용되는 유산균이 하나 있었다.
b. 여기에 분리한 박테리오파지를 감염하니 당연히 대부분의 균이 싸그리~ 죽었는데, 이 와중에 살아서 콜로니를 형성하는 넘들이 있어!
c. 뭐 대개의 사람이라면 여기서 ‘훗 컨탐된 겨?’ 하고 버렸겠지. 근데 이 연구자는 이걸 그냥 컬춰해 봤음. 음 컨탐 아니고 유산균 맞음.
d. 근데 여기에 다시 박테리오파지를 감염시켜 봤음. 이젠 안 죽어!
오오, 이제 박테리오파지에 내성이 있는 유산균을 만든 것임? 근데 유산균에 감염되는 파지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래서 다른 종류의 파지를 감염시켜보니까, 캑~ 뭐야. 이러면 쓸모가 없잖아…
뭐 웬만한 산업계의 R&D라면 여기서 그만두었겠지만, 그 연구자가 좀 잉여기질이 있었는지 아니면 회사가 좀 널럴했는지 왜 이런 현상(사람이 수두바이러스에 한번 감염되면 내성이 생기는 것처럼 유산균도 파지에 한번 걸렸다가 살아남으면 내성이 생기는)이 일어나는지를 좀 뒤져보기로 했다. 그래서 논문 서치 신공.
그런데 찾아보니 대충 이런 논문들이 나왔다.
CRISPR라는 이름의 세균에 많이 있는 요상한 반복서열이 있는데 이런 것은 파지나 플라스미드의 서열과 비슷하다
그래서 혹시 이런게 파지에 대한 면역현상과 관련있는지 실험을 시작했다.
a. 우리 유산균에도 비슷한 CRISPR 시퀀스가 있어!
b. CRISPR의 repeat 사이에 있는 시퀀스가 파지의 시퀀스와 비슷해!
c. 특정 파지에 저항성이 있는 유산균에는 해당 파지의 시퀀스가 CRISPR 안에 존재해!
d. CRISPR 옆에 있는 cas 유전자를 deletion 하니 면역이 사라져! 즉 이 유전자들은 파지에 대한 면역에 관여하는 것일꺼야…
즉 결론적으로,
- 유산균에 박테리오파지를 감염시키면 해당 파지에 대한 면역성이 생길 수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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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SPR라는 정체불명의 유전자 쪼가리들은 특정한 파지에 대한 면역성을 주기 위해서 파지의 DNA 쪼가리를 잘라서 자기 지놈 상에 기억해 놓은 흔적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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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놈 내에 ‘기억’된 파지에 대한 내성은 cas 유전자들이 부여한다.
물론 이 시점까지는 어떻게 내성이 부여되는지에 대한 것은 연구가 안 된 상태.
물론 아직도 “이걸 하면 돈이 나와 밥이 나와”의 연구지만, 과학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는 연구가 되었다. 즉 기존에 고등동물에만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적응성 면역(Adaptive Immunity – 뭐 쉽게 말해서 항원항체반응)이 박테리아와 박테리오파지에서도 성립한다는 것은 나름 획기적인 결과. 그래서 논문이 『과학』이라는 주간지에 실리게 되었다.
이제 이십 년 전에 박테리아 유전자 근처에서 발견되었던 희한한 시퀀스 하나는 많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는 유전자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박테리아도 면역이 있네~ 세상에 희한한 일도’ 수준의 관심이랄까. 관련 분야 덕후 학자들의 입장으로는 매우 흥분되는 일이었지만, 일반인이나 (요구르트 업계를 제외한) 산업계, 매스미디어가 크게 관심을 끌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 심지어 해당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들도 앞으로 몇 년 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예상하지 못한 상태였다.
원문: Secret Lab of a Mad Scientist
※ 「“이런 것을 연구해봐야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하던 연구의 말로 (후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