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적으로 민감한 성격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엔 선악의 구도가 명확한 채로 토론이 전개되는 경우가 잦은데 이는 때때로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사건 이면의 여러 질문들을 봉쇄함으로써 토론의 장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A를 욕하는 시점에 ‘하지만 이런 점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할 경우 ‘물타기하지 마라!’라는 식의 응대가 대세를 이루는 걸 우린 심심찮게 본다.
이는 큰 손실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우리사회 이면의 여러 논제들을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셈이니까. 근래 들어 특히 자주 관찰되는 느낌인데 그 대상은 우습게도 대부분 연예인, 운동선수다. 해서 친숙한 사례 셋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사례는 나와도 관계가 있으니 조금 분량의 비중을 두겠다.
1. 야구선수 윤완주의 일베 논란, 그리고 일베충이 되어버린 나
몇 주 전 이에 대한 글을 허핑턴포스트와 ㅍㅍㅅㅅ에 동시에 실은 바 있다. 내 글의 요지는 ‘자격정지 3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내리는 과정에 선수가 충분히 변론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 이는 노사관계에 있어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는 점이었다.
즉 해당 사건을 계기로 프로야구 선수들의 노사관계 등을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런 장치가 있었다면 해당 사건의 전개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견해를 덧붙였다. 난리가 났다. 특히 허핑턴포스트 페이스북 페이지에서의 난 아주 거품이 되어 사라질 지경이었다.
물타기하지 마라, 너 같은 놈이 일베의 숨통을 틔워준다, 여기 일베가 나타났다, 일베는 무조건 퇴출인데 지금 징계도 약하다 등등. 덕분에 난 그날부로 일베충이 되었다. 그래서 현직 변호사 세 명에게 의견을 물어봤다. 내가 제기한 질문이 전문가에겐 어떻게 읽히는지 궁금해서.
그러자 세 명 모두 내 손을 들어줬다. 야구판 내부규약대로 진행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충분히 법리를 다툴 여지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중 한 명은 소송을 할 경우 윤완주 선수가 매우 높은 확률로 이길 것이라고 단언했고, 다른 한 명은 적용 과정이나 징계 수위 등에 있어 기준이 모호하고 과중한 점에서 징계처분 취소사유에 준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당시 댓글에 욕설만 있던 건 아니다. 나름 조곤조곤 반론을 펴는 이들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둘이 ‘기업에 손해를 끼쳤으니 기업은 징계를 내릴 권리가 있다’와 ‘변명할 수 있는 기회는 타이거스 구단에서 충분히 줬을 것이다’였다.
난 둘 다 동의하지 않는다. 기업이 손해를 끼친 직원에 대해 징계를 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엔 엄격한 절차와 기준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금의 한국프로야구는 주먹구구식이다. 명백한 인종차별 발언을 한 (유명한) 김태균, 허구연, 이순철 등에는 아무 징계가 없었던 반면 일베 용어를 쓴 (무명의) 윤완주에겐 자격정지 3개월을 때렸다.
형사 사건인 음주운전, 뺑소니, 무면허운전 등도 한결 징계가 낮거나 유야무야 넘어갔던 걸 감안하면 이는 개그소재감이다. 절차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또 하나 따져볼 건 선수들의 고용 방식이다. 대다수 선수들은 특정 구단에 원서를 내고 테스트를 거쳐 입단한 게 아니라 드래프트 과정을 거쳐 구단에 선발된 것이다. 즉 프로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KBO에 원서를 낸 것이지 특정 구단에 원서를 낸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후 트레이드, 연봉조정신청, FA, 해외진출 등의 결정적 사안도 모두 KBO 규약 안에서 이뤄진다. 이런 시장에서 선수의 징계수위를 구단이 단독으로, 그것도 임의로 정하도록 하는 시스템엔 분명 불합리한 구석이 있다. 구단이 변명의 기회를 줬을 것이라는 반론에도 동의하지 못한다. 징계 수위를 결정하는 주체가 바로 구단이다.
그런 구단이 따로 변명을 들었을 테니 괜찮다는 건 마치 법정에서 판사가 변호사 없는 피고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 내가 들어줄게’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피고에게 필요한 건 법리와 논리에 근거해서 자신을 강력하게 지켜줄 변호사다.
밥그릇이 걸린 노사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국프로야구엔 그런 장치가 없다. 선수권익을 대변해야 할 선수노조는 힘도 의지도 없어서 그저 침묵할 뿐이다.
위 이야기들은 일베와는 무관하다. 그 자체만으로 토론거리가 된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을 계기로 그간 수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논제를 공론화할 수 있단 뜻이다. 하지만 이것이 망할 놈의 일베와 엮이니 감정적 양상으로 흘러간다. ‘물타기하지 마, 이 일베충아!’라고 대동단결하며 토론의 싹을 자르는 식이다.
(나를 포함해) 일베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박정희와 전두환이 반론의 싹을 자르며 독재하던 모습에 치를 떤다. 때문에 난 우리사회가 그와 정반대의 모습으로 가는 게 진정 일베와 맞서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우리와 정반대의 사상과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도 반론을 펴고 보호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자는 뜻이다.
한데 그 반대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은 듯해서, 아니, 아예 그들을 답습하려 드는 듯해서 심히 아쉽고 의아하다.
2. 옹달샘 여성비하 사건
확실히 밝혀둔다. 난 이 사건을 듣자마자 ‘헐! 얘네 미쳤네?’라는 생각을 한 사람이고 그들이 선을 과하게 넘은 언사를 했음을, 즉 잘못을 저질렀음에 대해선 아주 조금도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든 퇴출시키기 위해 다른 토론의 싹을 자르는 현황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해당 발언을 행한 공간이 팟캐스트였다고 한다. 사실 난 팟캐스트를 전혀 즐기지 않기에 그곳의 운영방식이나 감성에 대해선 잘 모른다. 한데 여러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곳을 보통의 방송과 동일시하긴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공과 사의 경계에 자리한 영역이라는 건데 이 점에 대해선 같이 논의를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급변하는 미디어환경 속에서 이런 논의는 충분히 건설적이고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사건은 결국 완전한 사적영역으로 여겼던 그들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대중 간의 괴리에서 기인한 것이니까. 또 해당 사건이 최근이 아니라 꽤 오래 전에 벌어졌고 형식적이긴 하나 사과를 하며 내린 방송임도 고려해볼 대상이다.
크게 공론화될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는 항목임을 스스로 인지하고 조처한 심정이 조금이나마 보인단 뜻이다. 이런 부분들은 대중이 비판의 수위를 결정하는 데 있어 참작의 요소가 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옹달샘의 경우는 해당 사건 이후에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몇 차례 한 정황이 있음으로, 이 참작요소는 희석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어둔다.)
다만 몇몇 사람들이 들이미는 ‘표현의 자유’ 운운은 궤변 내지 무지에 가깝다고 본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타인이 모멸감을 느낄 수 있는 수위로 공개적으로 내놓는 행위는 자유가 아니라 폭력이다. 표현의 자유는 폭력배의 자기합리화를 위해 마련된 마법방패가 아니다. 억압받지 않을 권리를 어떻게 마구잡이로 때릴 권리로 도치할 수 있나.
혹자는 루이스 CK나 코난 오브라이언이 한국에 오면 XXX 취급 받을 거라며 반발을 피력하기도 하던데, 나로선 그저 실소할 뿐이다. 그런 반론을 펴려면 그들의 독한 스탠딩 개그와 옹달샘이 내뱉은 이야기가 동급 내지는 같은 성격이어야 하는데, 어딜 봐서 그렇다는 건지 의문이다.
그들은 풍자와 위트가 가득한 성역 없는 개그로 공감대를 얻은 부류이고, 옹달샘은 타인에 대한 모멸을 감정적으로 피력하며 공분을 산 부류다. 이들이 동류로 느껴진다면 본인의 인권감수성을 돌아볼 것을 진지하게 권한다.
3. 이수의 <나는 가수다> 하차 사건
또 하나의 예민한 이름이다. 미성년자 성매매로 공적이 되어버린 가수 이수. 성기는 욕해도 성대는 욕하지 말라는 희대의 유행어를 낳은 그는 결국 몇 년의 시간이 지나 가수에겐 의미가 지대할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합류가 확정되었었다. 하지만 첫 촬영까지 마쳐놓고도 MBC의 일방적 통보로 하차했고 방영조차 되지 못했다. 대중의 극심한 반발 때문이다.
솔직히 난 그때 MBC를 굉장히 욕했다. 어마어마한 논란이 일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 즉 이수라고 하는 한 명의 ‘자연인’에게 굉장한 비난이 쏠릴 것이 명약관화한 상황에 섭외를 했다면 끝까지 같이 갔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마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눈치를 봐서 하차의 가능성을 열어둔 상황이었다면 아예 출연제의를 하지 않는 게 도의 아니었을까?
명예회복해보겠다고 조리돌림 각오하고 나온 사람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소견이다. 이는 그의 성매매 이력과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위 단락에서 굳이 ‘자연인’이라는 단어를 동원한 건 그 때문이다. 시청률과 돈벌이만을 위해 섭외를 했다가 하차시킨 MBC 때문에, 한 명의 인격체로서의 그는 받지 않을 수도 있었던 비난을 받았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하지만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다. 아니, 전혀 없다. ‘성매매’라는 세 글자가 사건 전체를 덮어버린 때문이다. “성매매를 한 놈이 무슨 인격?”이라는 싸구려 냉소만 넘칠 뿐이다.
4. 왜 죄다 연예인, 운동선수야?
웃긴 건 이와 같은 성격의, 그러니까 감정적으로 민감한 사건에서 절대악으로 인식되어 조리돌림 당하고 삶의 무대에서 퇴출당하다시피하는 건 죄다 연예인 아니면 운동선수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 민감하다는 인종차별에 대한 미국 스포츠계의 실제 사례를 한번 얘기해보려고 한다. 거긴 어떻게 다른지.
대상은 세 명이다. 한 명은 농구팀 LA클리퍼스의 구단주였던 도널드 스털링이고, 두 명은 야구선수였던 존 로커와 치퍼 존스다. 세 명 모두 명백한 인종차별 발언을 했다. 스털링은 여자친구에게 ‘흑인을 내 경기장에 데려오지 마라. 어울리지도 마라’라고 말했고, 로커는 인터뷰에서 ‘뉴욕은 동성연애자와 흑인 등이 득실대는 가기 싫은 곳’이라고 말했다. 존스는 트위터에 ‘리오그란데 강에 악어를 풀어서 불법이민자를 막자’고 말했다.
결과는 어찌되었을까? 스털링은 250만 달러의 벌금을 물고 영구 퇴출되었고, 로커는 500달러의 벌금을 물고 2주 출장정지를 당했다. 반면 존스에겐 공식적인 징계가 없었다. 셋 다 인종차별 발언을 했는데 결과가 이토록 다른 것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사랑받는 스타일지라도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는 그냥 일개 인기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두고 사회지도층으로 간주하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는 않는다. 우리와는 반대다. 사회지도층으로 분류되는 스털링 구단주는 사석에서 한 말을 두고 아주 작살을 내놓았지만, 일개 운동선수일 뿐인 로커와 존스는 인터뷰와 트위터에서 공개적으로 말했음에도 한결 관대하게 처분했다.
그럼 로커와 존스의 징계수위는 왜 다를까?
크게 두 가지 이유다.
첫째로 로커는 미국 내의 시민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반면 존스는 그와는 약간 달랐다. 자연히 전자의 반발이 훨씬 컸고 죄질도 크게 인식됐다. 또 둘의 반성 태도가 달랐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둘째로 로커는 사건 이후 오만한 태도를 견지하며 계속 논란을 유발했지만 존스는 즉각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트윗을 삭제하고 사죄했다. 해서 크게 공론화되진 않았다. 비판은 하더라도 조리돌림까진 않았단 뜻이다. (존스의 경우 명예의 전당 입성이 확실시되는 슈퍼스타라는 점도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겠다.) 생각할 대목이 있어 보인다.
우린 사회지도층의 부정부패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그들 또한 그다지 자정의사가 있는 것 같지 않다. 표적이 되는 건 인기 있고 만만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고작이다. 오죽하면 그들의 스캔들을 터뜨려 부정부패를 덮는단 말이 나돌 정도일까? 사회지도층보다 그들에게 요구하는 도덕수준이 대략 500배는 더 높은 느낌이다.
감정적으로 민감한 소재 하나로 다른 모든 논의를 덮어버리며 퇴출만을 부르짖는 게 어떤 측면에서 크게 이득인지 나로선 도무지 모르겠다. 그냥 만만한 한 놈을 함께 두들겨 패며 속 시원해하는 이상의 의미는 없지 않을까?
원문 : 홍형진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