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을 정도로 당연한 일
페이스북에서 다수의 ‘좋아요’를 받으면서 돌아다니는 글을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편견이나 차별, 멍청함, 싸구려 감동으로 가득한 조악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전 타임라인에 뜬 글 하나에 생각할 것도 없이 ‘좋아요’를 눌렀다. 그게 바로 ‘최저임금 안 지키는 사장에게 일침을 가했다’는 글이었다.
위 상황을 보자. 학생은 사장에게 임금에 대해 문자로 문의했고, 사장은 최저임금에 한참 미달하는 금액을 말했다. 학생은 ‘최저임금이 안 된다. 죄송하다. 다른 사람 알아보라’고 했고, 사장은 ‘초면에 최저임금을 거론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고 했고, 학생은 ‘법률 안 지키는 곳에서 일할 생각 없다’고 말했다.
대체 이 상황에서 누가 잘못했을까. 물론 이건 바보 같은 질문이다. 답은 당연히 최저임금을 안 주려고 한 사장이기 때문이다. 학생은 임금이 최저임금에 미달한다는 것을 지적하며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을 알아보라는 완곡한 거절을 했다. 문제는 사장의 태도다. 최저임금 지적에 사장은 ‘예의가 아니다’라고 한다.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금액을 제시한 데는 단 한 톨의 반성도 찾아볼 수 없다. 정작 예의가 없는 건 사장이다.
이 상황에서 학생은 오히려 대단히 현명하고, 유연하게 대처한 편이다. 이건 사장이 알바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위법한 노동조건을 제시하며 사기를 치려는 상황이다. 만약 학생이 최저임금을 몰랐다면 어쩌면 저 사장과 함께 일했을지도 모른다.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4,000원이라는 적은 돈을 받고 최저임금 차액을 그대로 사장의 이익으로 뜯겨가며 일했을 것이다.
사장은 결코 저 학생에게 최저임금을 이야기해주지 않고 끝까지 부려먹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순진한 사람을 대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범법을 자행하려고 하고 이런 더러운 일을 마주한 학생은 사실 대단히 화를 내야 정상이다. 감히 나에게 사기를 치려고 들어? 이 나쁜 놈. 쌍욕을 퍼부어도 시원찮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그리고 법적, 윤리적, 도덕적으로 아무리 봐도 사장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이는 이 사건은, 불행하게도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학생을 비난하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사장이 법을 어기려고 한 건 맞는데 학생도 예의가 없으니 잘못이다. 말하는 태도가 싸가지 없다. 저런 싸가지로는 일자리 못 찾고 길바닥에서 굶어 죽을 것이다. 대처가 어른스럽지 못했다. 사회경험이 부족해서 그렇다. 사장에게도 사정이 있을지 모르는데 저렇게 지적하는 것은 버릇없다. 임금부터 따지는 게 무슨 태도냐. 고용 당하는 주제에 버릇없게 뭘 따지냐. 수습 기간은 최저임금 안 줘도 된다. 그만큼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최저임금만 따지고 있냐. 문자로 임금을 물어보는 건 예의가 없다. 자기가 뭐 엄청 잘난 줄 아느냐. 일 시켜주는 걸 고맙게 여겨야지, 사장을 돈줄로 보니 그게 고깝게 보이는 게 당연하지.
학생에게 가해진 비난은 실로 가관이었고, 어이가 없었고, 그래서 나는 너무 슬펐다. 생각해보자. 지금 이 사장과 학생은 서로 거래를 위해 흥정하는 것이다. 학생은 노동력을 노동시장에서 팔고자 하는 것이고, 사장은 그 노동력을 구입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엔 ‘근로기준법’이라는 전제가 있다. 이 둘의 계약은, 그리고 그 계약의 내용은 당연히 그 전제 위에서 그보다 높은 수준으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장은 이 전제를 무시한 조건을 제시했고, 노동력 판매자는 이런 제안에 ‘당연하게도’ 응할 수 없다. 일하기에 앞서 임금이라는 조건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최저임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래를 거절하는 것은 대단히 당연한 과정이고 결과다. 그런데 이 과정은 지금의 한국에서 그리 ‘당연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고용자가 너무 큰 힘을 갖고 있다. 노동자에게는 정보가, 그리고 힘이 부족하다. 최저임금이라는 노동자의 최소한의 권리는 이런 과정에서 너무도 쉽게 무시되고, 노동자는 그만큼 고통을 겪으며, 고용주는 그만큼의 이익을 본다. 그래서 청년유니온이나 알바연대가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당신도 노동자면서
문제는 이뿐 아니다. 정작 노동자 입장에 선 사람들조차 노동자가 자신의 당연한 권리와 이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버릇없다’ ‘성숙하지 못하다’며 비난한다. 노동자의 권리, 그리고 최저임금에 대한 인식수준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다음과 같은 댓글이다.
‘사정이 있어서 최저임금 미만으로 임금을 잡았을 수도 있는 건데 너무했다’ ‘일단 고용된 후에 임금 조정을 해도 되는 거였다’ ‘최저임금 이하일 만큼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동자의 권리는 사용자의 사정에 맞춰서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것이 아니다. 사장의 사정이 설령 어렵다 하더라도 노동자는 자신이 제공한 노동력만큼의, 정당한 액수의 금액을 지불받을 권리가 있고, 이 권리는 남에 의해서 포기될 수 없다.
물론 노동자가, 어디까지나 ‘자비를 베풀어’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금액만 받고 사정이 어려운 사장을 위해 일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 영역에 머물 뿐 그것이 당연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전체에서, 일반적으로 이런 식의 노동자 권리 침탈이 이뤄지고 있더라도 그건 ‘일반적’인 것이지 ‘옳은 것’은 아니다. 노동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되어야만 하고, 장려되어야 한다.
그런데 댓글은 이런 권리가 마치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인 것인 양 말한다. 사장의 권리는 존중받는데 왜 그 사장에게 이익을 안겨주는 노동자의 권리는 존중받지 않는가? 어째서 사장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노동자의 사정은 이해하지 않는가? 노동자는 사용자의 사정에 따라 손해를 입어도 되는 그런 존재인가? 이런 인식은 ‘노예근성’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노예근성’과 ‘사회생활’은 다르다
이런 뿌리 깊은 노예근성은, 비록 그걸 보는 내 심정은 참담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안타깝지만 노예가 되기로 한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므로 타인이 뭐라고 할 방법은 없다. 문제는 그런 ‘노예근성’이 아무 문제의식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강요되고 있다는 점이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댓글만 봐도 그렇다. ‘사회생활을 해봤다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라며 학생의 ‘미성숙함’을 탓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최저임금이라는, 노동자로서 가진 권리 중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미성숙한’ 일인가? 그렇다면 성숙한 것은 무엇인가. 부당한 대우에도 굽신굽신 머리를 숙이는 것이 숙련된 사회생활자고, 어른으로서의 성숙한 대응인가?
앞서 말했듯 자신이 자기가 가진 권리를 포기하는 것에는 뭐라고 할 생각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런 아픔을 감수하라는 식으로, ‘성숙해지라’는 식으로 부당함에 대한 항의를 억제하고 비난하려는 시도는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다. 권위에 복종하고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싸워서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사회생활 잘하는 법’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용서할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빈곤과 차별과 편견과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과 부당해고에 대해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권리를 찾으려 저항하려고 할 때 그 아픔에 아무 공감도 해주지 않는 이들로부터 ‘왜 견디지 못하는가’ ‘왜 더 노력하지 않는가’라는 소리를 듣고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하는가. 얼마나 더 많은 이가 ‘성숙한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권위에 복종하고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법을 학습함으로써 고통받아야 하는가. 이건 사회의 폭력, 지배‘받는’ 자들의 폭력이자, 압제이고 억압이며 사회악이다.
온갖 사람들이 힐링을 원한다. 온갖 사람들이 서로를 힐링하려 야단이다. 그만큼 많은 현대의 한국인이 각각 큰 상처를 입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처음부터 ‘상처받는 것을 거부한’ 사람들, 혹은 ‘상처를 준 이에 대해 항의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자신들만 이런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 싫어서일까. 이렇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참고 성장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처절하게 힐링을 부르짖는데, 감히 ‘상처도 받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일까. 힐링 사회가 성립하려면 먼저 상처를 받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힐링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상처를 받아온 피해자들이다.
자본가와 기업, 혹은 군대는 그들을 ‘잘 참았다’고 칭찬하며 ‘성숙한 사회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사회에선 이런 칭호가 무의미해진다. 그동안 견뎌온 것들이 무의미해진다. 난 지금까지 이게 성장을 위한 필연적인 시련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실은 그냥 막대한 손해를 입어왔던 거였다니!
그래서 상처받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상처를 입히는 것이 그들, ‘성숙한 사회인’들이다. 이기주의와 잠재된 피해의식, 그리고 ‘성공한 사회인’으로서의 우월감이 낳은 결과인 것이다.
상처 없는 곳에 힐링도 없다
더 이상 아무도 상처를 받아선 안 되고, 상처 입히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사회에 맞서는 사람이 있다면, 도와주고 격려해주고 함께 해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임금체불과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이 ‘힐링 사회’는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는가.
이런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역겹고 천한 ‘성숙함’과 ‘어른스러움’이 이 병들고 낡고 지친 사회를 얼마나 좀먹고 있는가. 필사적으로 서로를 물어뜯으며 병듦을 유지하려고 드는 이 사회, 이 짓무른 사회, 이 노예와 같은 사회인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았다. 너무 고통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