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시민은 누구일까? ‘깨어있는 시민’의 축약어로, 비하적인 의미가 잔뜩 녹아들어 있다. 이와 유사한 특정 정치 진영 비하어로는 좌좀, 수꼴, 꼴페미 등이 있다.
깨시민은 원래 고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중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발언에서 비롯됐다. 이 때까지만 해도 비하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 지지자들의 사명감에 가까운 자칭이었다. 하지만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후 기존 노 대통령 지지층을 비롯, 반 이명박 대통령 계열이 급격하게 각성하며 좀 더 공격적이고 남을 일깨우려는 자세를 취하게 됐다. 이에 학을 뗀 사람들은 그들의 부정적 속성을 꼬집기 위해 ‘깨시민’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조롱으로 활용하게 됐다.
깨시민의 문제점
정리를 좀 명확히 해야겠다. 어차피 비하적 단어니까 좋은 뜻으로 쓰일 수는 없다. 모든 비하적 단어가 그러하듯 ‘그 정치성향 전체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라는 단서를 붙여서, ‘부정적’인 깨시민의 특성을 대충 4가지로 나열해 보자.
깨시민의 문제 1 : 열정과 지식의 부조화
깨시민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열정 과잉에서 비롯된다. 열정에 비해 정치적, 정책적 지식은 부족하다. 정치 관심의 에너지는 높고, 그 디테일이 부족하다. 이를 토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계몽적 태도를 취하면 당연히 충돌이 생기고 열정의 과잉과 지식의 부족은 설득이 아닌 싸움을 낳는다.
깨시민의 문제 2. 지나친 흑백논리와 편 가르기
여기에서 좀 열린 자세로 논리적 반론을 받아들이면 좋을 텐데, 그조차도 감성으로 덮으려 드는 경우가 많다. 감성에 기반하다보니 감성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흑백논리와 편 가르기가 심하다. 여기에 자의식이 끼어들며, 마치 자신들만이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식의 태도를 취할 때도 잦다.
깨시민의 문제 3 : 조직성 결여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말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깨시민들은 전자에 파묻혀, 조직된 힘을 결성하려는 노력과 인식이 부족하다. 대선 때 깨시민 비판이 쏟아진 것도 트위터, 페이스북에서의 열정 과잉이었는데, 이는 조직성을 상실한 헛된 움직임이었다.
깨시민의 문제 4. 현실보다 관념의 우선
이들은 새누리당의 역사적 과오를 비판하며 민주당을 옹호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역 개발 이권 등 물질조건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폄하할 때가 많다. 노조를 구닥다리 취급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3. 조직성의 결여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데, ‘깨어 있음’이 ‘민주화와 정의감’으로 변질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 필요한 ‘다양성에 대한 관용’은 깨어 있지 않다.
깨시민 비판에 대한 시각과 전술적 가치
이런 깨시민 비판은 정당한가? 위의 저 특성에 근거한 비판은 당연히 정당성이 있다. 하지만 좀 걱정스럽다. 최근 깨시민에 대한 조롱이 정덕 사이에서 도가 지나치게 불붙고 있다는 생각이다. 깨시민에 대한 조롱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깨시민 비판의 문제 1. 광역 어그로의 문제
좌좀, 수꼴, 쿨게이, 꼴페미라는 표현도 그렇듯 ‘깨시민’에 대한 비판도, 그들과 정치적 입장을 함께하는 이들까지 싸잡는 문제가 생긴다. 물론 ‘깨시민’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들이 한정적인 용법으로 사용했다고 해도, 민주당 지지자들은 여기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다. JS선생께서 이번에 깨시민에게 독설을 좀 퍼부으셨는데, 이런 명사들은 좀 더 큰 반감을 이끌어낸다.
깨시민 비판의 문제 2. 부정적 프레임의 문제
ㅍㅍㅅㅅ에 글을 기고하기도 하신 우아킴 누나^^ 가 “깨시민이라는 용어 쓰면서 놀리는 거 무척 거슬린다. 또 하나의 조롱용 낙인. 현재 노무현 지지자와 노빠, 진보와 종북이 얼마나 혼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용어들이 만들어낸 프레임의 부정적 결과들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이야기했듯, 결과적으로 광역 어그로는 단순한 반감을 넘어 실제 사람들이 보는 시각, 프레임을 만든다. 이에 캡콜드 님은 “부정적 틀짓기가 계속되면, 결국 ‘나쁜 놈, 우리들의 적’이라는 거대하고 모호한 덩어리로 합쳐서 인식하게 된다. 어떤 요인이 잘못되었다는 게 사라지고, 저놈 싫다가 됨. 안 믿기면 ‘쥐박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보면 쉽다.”고 첨언.
깨시민 비판의 문제 3. 피장파장의 문제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놀라웠던 게, 평소 하는 행동과 발언이 깨시민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조롱조, 공격적이었던 분들이 깨시민들에게 조롱을 퍼붓는 것이었다. 하지만 깨시민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워낙 깨시민 까는 진영이 소수여서인지, 그런 문제 제기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네임드들이 이런 말을 하면서도 일말의 비판도 받지 않는 건 얼마나 공정한지 모르겠다. 그저 서로 감정의 앙금만 쌓지 않을지?
깨시민 비판의 문제 4. 조직력의 문제
“너희 때문에 졌어.”라는 식의 자세도 많은데, 이건 좀 억측이다. 깨시민이 표를 얼마나 깎아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많은 표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원래 정치가 다 이성보다는 정념의 세계다. TV 토론회에서 박근혜가 그토록 발렸음에도 불구하고 (1차 토론, 2차 토론, 3차 양자 토론) 왜 박근혜를 그렇게 지지했겠는가? 사람들은 그 복잡한 논리를 이해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이들은 문재인의 민주당 경선 압승에서 볼 수 있듯 꽤 강한 동원력을 가졌다. 이들을 비판하는 이들은 얼마나 조직화가 됐고, 어떤 성과를 이끌어냈는가?
결어 : 증오의 고리를 끊기를 기대하며
어떻게 보면 깨시민은 ‘노빠’와 가장 가까운 단어다. 두 단어 모두 경멸조이면서, 상대방의 폐쇄성과 감성에 기댄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불만과 맞물려 엄청난 분노를 모았다는 점에서 두 계층은 상당히 겹치기도 한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악순환은 계속된다. 자꾸 태도론을 내세우니 꼰대 같기는 하지만 한국 정치에 꼭 필요한 것은 증오를 들어내고 희망과 화해를 그 자리에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야 비로소 좋은 정치의 기반인 ‘신뢰’가 들어설 것이다.
깨시민의 비합리적 열정은 분명 눈에 거슬리지만, 동시에 좋은 정치적 동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기존 정치 관심층은 이들에 대해 경멸의 시각을 보이지만, 좀 더 건설적인 시각은 이러한 열정을 어떻게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지에 대한 숙고와 조직화이다. 단지 좀 더 잘 알고, 좀 더 먼저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경멸한다면 결국 위에 언급한 피장파장의 우를 범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나도 좀 반성하고자 한다. 좌빨이기도 하고, 쿨게이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서 그간 이들 용어를 너무 남용한 감이 있는데 앞으로 좀 자제하겠다. 또 ㅍㅍㅅㅅ에서도 나름 패러디 완성도를 고려해(?) 깨시민 총통의 몰락이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는데, 앞으로 이런 글은 좀 더 수위조절을 하거나, 민감한 부분을 피하도록 하겠다. 아니면 쿨게이와 좌빨을 깔 때 2배 매몰차게 까거나(…)
이상… 앞으로 좀 더 신중한 매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