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해서 일할 때는 클래식이나 OST, 연주곡 같은 가사 없는 곡을 BGM으로 틀어 놓는다. 반면 반복, 단순 작업을 할 때는 소위 ‘노동요‘라는 제목이 붙은 속도감 있는 노래를 듣는다.
‘노동요’라는 제목만 보고 별생각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생각보다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다. 듣다가 궁금해 노래 제목을 훑어보니 Y2K 감성이 물씬 풍기는 노래들이었다. 감성의 날이 바짝 서 있던 10~20대를 관통했던 그 시절 노래를 부른 주인공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런데 그 많은 뮤지션 중 지금까지 폼을 유지하며 가수 활동을 이어가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인기 하락, 엔터 업계에 대한 환멸, 사건, 사고, 결혼이나 육아, 사업 등등 활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많았다. 논란 없이 20여 년 넘게 꾸준히 활동하는 가수는 몇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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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 갈수록 한 분야에서 오래 일을 한 사람을 볼 때,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시장에서 40년 넘게 소머리 국밥을 말아 온 할머니부터 박물관에 전시될 전통 예술품을 만드는 무형유산 장인까지. 그런 분들을 만날 때마다 진심을 다해 ‘대단하시다’고 쌍 엄지를 번쩍 추켜올리면 똑같은 장면이 재생된다. 다들 부끄러운 듯 손사레를 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대단은 무슨, 그냥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건데요.
아침이면 기대보다 두려움을 안고 눈을 뜨는 요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자의든 타의든 한자리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을 절실히 실감하는 중이다.
나의 의지나 능력도 불가피한 천재지변급 상황 앞에서는 무력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 모진 풍파를 다 견디고 경력 30년, 50년이란 타이틀을 달고 장인 대열에 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어디 일뿐일까? 취향도, 목표도, 관계도, 변함없이 한결같다는 건 상상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 많고, 변덕스럽고, 엉덩이가 가벼운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조금이라도 싫증이 나거나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쉽게 방향을 튼다. 확신은 없고 불안에 떨다 썩은 동아줄을 내팽개치고 빨리 새 동아줄로 갈아탈 기회만 노린다. 앞은 보이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도 안 잡히는 날들 속에서 내가 택한 생존법이다.
한 분야의 터줏대감 같은 분들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냥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것의 실체는,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날들이 쌓인 결과다. 그들은 반짝하는 순간에만 빛나는 사람들이 아니다. 평범한 날들을 하루하루 쌓아가며 대체할 수 없는 역사를 만들어 온 존재들이다. 지루하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에도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해야 얻을 수 있는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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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 고루한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로 쓰던 말이 이제는 한 분야에서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부르는 표현이 됐다. 혁신, 창조, 트렌드 같은 단어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고인물의 존재는 더 빛난다.
시류에 휩쓸려 가지 않고, 청천벽력 같은 사건에도 꺾이지 않고 소신대로 내 갈 길 가는 사람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는 계절이다. 그런 사람들이 제일 부러운 요즘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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