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가서 맥주 하나 사 와라
어른들이 모인 큰집의 방 한구석에서 미션이 떨어졌다. 어른들이 마실 맥주라니. 이것은 참 난제 중의 난제다. 지난 10년간의 음료 큐레이팅(이라고 쓰고 ‘심부름’이라고 읽는다) 빅데이터를 모아보았을 때 정말로 아무거나 하나 짚었다가는 성난 어른들의 안부 공격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맥주를 이런 걸 사 왔냐… 나는 원래 이걸 먹는데 맛이 좀 그렇다… 그래서 성적은, 연애는, 결혼은, 집은, 아이는, 아이의 성적은?으로 이어지는 콤보는 입맛을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른들과 마실 맥주를 살 때 필요한 것은 2가지다.
- 대중적일 것 (카스테라 옆에 있는 녀석이면 됨)
- 대의명분이 있을 것
그렇다면 오늘 맥주 심부름, 아니 맥주 큐레이팅을 알아보자.
1. 실패 없는 ‘카스 프레시’
안전함을 추구한다면 가장 대중적으로 판매되는 ‘카스 프레시’를 사 가는 것을 추천한다. 카스를 샀다고 맥주를 왜 이거 샀냐고 투정 부릴 사람은 힙스터, 크래프트 맥주양조자 빼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원한 맛에 기름진 음식과 잘 어울리기도 하고.
문제가 있다면 임팩트다. 너무나 무난한 선택을 한 나머지 당신에게 맥주심부름을 시켰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렇게 심부름 후 호감도 상승을 이용한 용돈 등의 리워드 기회를 놓칠 수도.
2. 소맥의 ‘테라’
카스와 라이벌 구도를 가져가는 ‘테라’는 소맥용으로 사랑받는 맥주다. 맥주의 맛(특히 대중적인 라거맥주)이 다 똑같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은근히 차이점이 있다. 테라의 경우는 ‘탄산감’이다. 목을 때릴 정도의 강한 탄산감은 소주와 섞어도 적당하다. 그것도 인공적으로 주입한 게 아닌 알아서 생긴 탄산이 이렇게 강하다니.
보다 소주파인 어른들이 섞여 있다면 선택해 볼 만한 맥주다. 추가로 카스까지 함께 섞어서 사서 “카스테라 사 왔습니다”라고 드립을 날리면 어른들의 호감도 상승을 노려볼 수 있다.
3. 추억의 ‘하이트’
이제는 잘 기억에 남지 않는 ‘하이트 엑스트라 콜드’를 발견했다면, 이것을 통해 어른들의 추억을 다시 살려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무려 ‘카스’를 오랫동안 이기고 한국맥주의 왕좌에 집권했던 녀석이기 때문이다. 시원시원하며 터프한 맛도 오랜만에 느끼니 괜찮다.
문제는… 원래부터 맥주를 마실 어른들이 카스파였다면 괜한 눈총을 받을 수도 있다. “이걸… 샀다고?”
4. 카리나의 ‘크러시’
보통 어른들의 맥주는 언제나 오랜 브랜드로 선택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것도 좋다. 이번 겨울에 나온 ‘크러시’ 맥주를 선택하는 것은 ‘트렌디’에 대한 나의 신념, 그리고 카리나를 향한 나의 약속(…)과도 같은 맥주일 수 있다.
심지어 캔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제품이 ‘신선한 상태’다. 맥주의 맛은 어쩌면 재료와 신선도의 승부. 크러시가 가장 맛있는 순간을 즐길 수 있을뿐더러, 은근히 어른들이 마시기에 좋은 시원한 느낌의 맥주다. 문제가 있다면 아무리 이렇게 설명해도 ‘그래서 카리나가 누구냐’라고 대답하시겠지.
5. 고소함의 ‘켈리’
크러시 다음으로 신상맥주지만 하이트진로의 엄청난 마케팅 덕분에 술집에 가봤다면 누구나 만나보았고, 누구나 마셔봤을 맥주가 ‘켈리’다. 소맥파들이 ‘테라’의 탄산감을 좋아한다면, ‘켈리’는 맥주 본연의 진함을 기대하는 분들에게 추천하는 올 몰트 맥주다. 고소해.
추가로 어른들에게 ‘그 옛날 맥스 아십니까…’로 시작하면서 그 유지를 이은 맥주가 ‘켈리’라고 말한다면 흥미를 높일 수 있다. 신상맥주임에도 나름 족보가 있는 녀석. 과연 어울리지 않는가?
주의 : 차력의 ‘아사히 왕뚜껑 맥주’
아무거나만 믿고 가장 궁금한 맥주를 사 올 수 있다. 하지만 어른들 마시는 데 이런 맥주를 가져오다니…라고 한 소리를 들을 확률이 큰 ‘아사히 수퍼드라이 생맥주’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 가장 성공적인 산성 맥주이기도 했다. 큰 뚜껑을 열면 거품이 나오는 퍼포먼스가 좋다. 그래서 많은 어른들이 재미있어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래서, 어른들 마시는 데 이런 맥주를 사 왔단 말이냐?
어른들은 쿠사리나 주고 마시지 않을 확률도 있다. 어른들의 신망을 잃은 당신, 하지만 남은 맥주는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원문: 마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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