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괴물>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카모토 유지가 각본을 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괴물 (怪物, MONSTER, 2023)>.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직접 각본을 쓰지 않은 드문 작품이지만 (데뷔작 ‘환상의 빛 (1995)’을 제외하면 모두 직접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괴물>은 <어느 가족> <브로커> 등 그의 최근작들과 궤를 같이하는 연장선에 있는 동시에, 주로 드라마를 통해 탁월한 각본을 선보였던 사카모토 유지의 장점도 잘 살려낸 영화다. 이질적인 조합인 듯하지만 결과적으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은 3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미나토의 엄마인 사오리(안도 사쿠라)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1부와 미나토의 학교 선생님인 호리 (나가야마 에이타)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2부, 그리고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와 같은 반 친구 요리(히이라기 히나타)의 시점이 담긴 3부로 전개된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이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구성에는 관객의 자리도 비중 있게 준비되어 있다. 즉,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은 의도적으로 관객이 극 중 인물과 동화되어 전체 이야기를 오해하도록 계산되어 있다. 이런 방식은 흔히 스릴러 영화에서 자주 쓰이곤 한다. 범인이라고 믿었던 자가 사실은 무고한 자였고, 가장 범인 같지 않았던 이가 범인으로 다시 오해되지만 말미에는 또 다른 익숙한 인물이 범인으로 드러나거나, 화자였던 주인공이 범인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영화에 제목을 통해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것처럼 1부 사오리의 이야기를 볼 때만 해도 관객은 자연스럽게 ‘괴물이 누구인가’에 주목하게 된다. 더불어 사오리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는 없는 것이, 어린 자녀가 대상이 되는 따돌림이나 교사와 관련된 폭력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배경이 되는 학교라는 시스템 혹은 권력의 무책임함 등은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아주 가까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부에서 일종의 범인으로 지목되는 호리 선생님의 시점이 등장하는 2부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면, 사오리의 시점에서 확신했던 많은 것들이 오해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보통의 스릴러 영화였다면 ‘그럼 진짜 범인(괴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올 테지만, 이 영화는 누가 괴물인지를 찾아내는 게임 같은 장르영화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리 선생님의 이야기를 알게 되는 순간 ‘그렇다면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교장 선생님이 괴물인가?’ ‘아니면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요리가 괴물일까?’라고 의심하기보다는, 이제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그 어떤 확신도 오해일 수 있다는) 상태에 이른다. 너무 쉽게 확신했던 오해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짧지만 강렬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가 쉽게 오해라고 치부하는 것들의 잔인함을 깨닫게 만든 뒤, 영화는 미나토와 요리가 겪은 진실을 들려준다. 수많은 괴물들 속에서 상처받고 괴로워했지만, 미나토와 요리는 사회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위로받고 미래로 나아가게 된다.
괴물 같은 세상 속에서 아직 그 사회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이 구원의 존재로 그려지는 것은 재난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구성이지만(이 영화에서 현재 사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재난으로 묘사된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 매번 화재나 태풍 등의 재난을 배치해 놓은 것은 직접적인 비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그런 쉬운 결말에 기대어 고민과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나는 미나토나 요리가 아니라 사오리이자 호리이자 또 다른(괴물 같은) 어른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희망이 작은 불씨 같은 건 그래서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사오리와 호리, 그리고 학교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통해 ‘괴물이 되어서는 안 돼’라는 강력하지만 다시 외면되기 쉬운 메시지보다,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자체를 깊이 깨닫게 해 줬기 때문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일들, 누군가가 더 잘되었으면 하는 진심에서 했던 일들과 말들이 과연 모두 옳았는가에 대해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눈에 보이는 커다란 구멍을 메우기 위해 쉽게 지나쳤던 관계의 작은 빈틈들을 어떤 방법으로 채울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현재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 ‘괴물’의 여운은 더 오래 나를 괴롭힌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이미 괴물이 되었을까? 어쩌면 쉽게 외면했던 많은 질문들을 되뇌며 삶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거대한 질문이자 대답 같은 영화였다.
원문: 아쉬타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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