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작은 언니의 생일을 앞두고 케이크 담당을 자청했다.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살까? 고민하다가 뜨는 동네 케이크점이 있나 궁금해 SNS 피드를 훑었다. 검색 설정을 최근으로 누르고 위부터 차례로 둘러보다가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집에서 1분 거리. 그야말로 코앞에 있는 가게였다.
번화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유동 인구가 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만 바라보고 장사를 하기에는 어정쩡한 위치였다. 꽝이 나오지 않길 바라며, 제비 뽑기를 하는 어린이처럼 설렘과 기대를 안고 가게가 오픈하기를 기다렸다. 오며 가며 보니 동네에 흔하게 있는 배달 음식점이나 인터넷 쇼핑몰이 아니었다. 그런 집들과 달리 창이 훤하게 드러나 있고, 티끌 하나 없는 전부 크림색 인테리어였다.
카페가 아닐까 기대했던 곳은 수제 케이크 전문점이 됐다. 메뉴판에 커피가 있긴 했지만 테이블을 두고 본격적으로 커피를 파는 건 아니었다. 케이크를 픽업해 가는 손님들을 위한 서비스 개념의 커피일 뿐이었다. 카페 마니아로서 조금 서운했지만 언젠가 이곳의 케이크를 맛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개업을 했지만 딱히 바빠 보이지는 않았다. 사장님 혼자 운영하는 가게는 늘 한가했다. 아빠와 엄마는 저래가지고 어디 장사 되는 거냐고, 곧 망할 거 같다고 걱정했다. 요즘은 예전처럼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 기다리느라 주야장천 문 여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미리 주문받은 거만 팔고 문 닫는 거니까 재고 쌓일 일도 없고, 신선한 재료로 만드니 손님도 은근히 있다고 대변인이라도 되는 듯 변명을 했다. 한참 동생뻘 어린 여성 혼자 가게를 꾸려가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식의 응원뿐이었다.
얼마 후 엄마는 손바닥만큼 크고 두툼한 쿠키 몇 개를 내밀었다. 앞집 케이크 가게 사장님이 맛보라며 준거라고 했다. 딱히 쿠키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사장님의 손맛이 궁금해 쿠키를 덥석 베어 먹었다.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넣고 정성스럽게 만든 맛이었다. 쿠키를 다 먹고 나서 다음번 케이크는 이곳에서 주문해야겠다 다짐했다.
언니의 생일 덕분에 그 다짐은 현실이 됐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전, 케이크 집 문을 열고 빼꼼 고개부터 들이밀었다. 편하게 SNS 디렉트 메시지로도 주문이 가능했지만 왜인지 얼굴을 보고 주문하고 싶었다. 이번 토요일 저녁 전에 생크림 케이크를 주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리 봐뒀던 SNS 계정 속 시안 사진을 하나 캡처 사진을 사장님께 보여드렸다. 그리고 앞집 사람이고 지난번 주신 쿠키도 맛있게 먹었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내가 앞집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니 그제야 평소 손님을 대하던 평범한 텐션의 사장님은 3단계쯤 올라간 텐션으로 나를 다시 응대했다. 한층 가까워진 기분이다. 집 앞에 이런 예쁜 케이크 집이 생겨서 골목이 환해졌다고, 손님이 많은 걸 보면 사장님 솜씨 좋으신 거 같다 칭찬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오래오래 해 주세요.
이 말을 들은 사장님의 얼굴이 한여름 능소화처럼 활짝 피었다.
며칠 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내가 그 말을 건넨 사람은 집 근처 5분 거리의 빵집 사장님께였다. 그곳은 올해 초 문을 연 곳이다. 향초 공방이 나간 자리에 며칠 뚝딱뚝딱 공사를 하더니 빵집이 생겼다.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처럼 이것저것 파는 곳은 아니었다. 주력 메뉴는 소금빵과 스콘, 휘낭시에뿐. 단호박, 사과 등 제철 재료를 얹어 변화를 주는 스타일이었다. 동네 빵집이니까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소금빵을 사 먹어봤는데 가격, 맛, 크기, 접근성까지 완벽했다. 다음에는 단호박 스콘과 바질 식빵을 그다음에는 휘낭시에까지 섭렵했다.
세상이 좋아져 맛만 있으면 동네 구석까지 찾아온다. 이곳 역시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입소문이 난 덕에 지금은 오후 5시에 가도 완판된 제품이 많을 정도다. 공식 영업 마감 시간은 7시 30분이지만 그때 가면 남아 있는 빵이 없다. 단팥빵을 제외하면 단 빵을 좋아하지 않는 아빠의 입에도, 군더더기 없는 심심한 빵을 좋아하는 엄마의 입에도 잘 맞았다. 종종 집에 빵을 사 가고, 기회가 되면 동네에 괜찮은 빵집이 있다고 주변에도 소문을 내던 차였다. 이번에는 먹짱 꿈나무, 조카들에게 보내기 위해 쟁반 가득 빵을 담고 계산하며 말했다.
사장님, 오래오래 해 주세요. 빵 너무 맛있어요.
빵집 사장님의 얼굴도 여름 아침 나팔꽃처럼 활짝 피었다. 갈 때마다 휘낭시에를 서비스로 받아서 건네는 빈말이 아니다. 진짜 빵이 맛있어서 오래 맛보고 싶은 먹보 손님의 순수한 응원일 뿐이다. 아마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야리야리한 여성 사장님 두 분이 혹독한 자영업의 세계에 뛰어들기까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저 좋은 재료를 아끼지 않고 정성스럽게 만든다는 사실뿐이다. 빵과 케이크를 만드는 육체적 피로와 들쑥날쑥한 매출 및 손님을 대하는 정신적 피로에 찌들어 있던 초보 사장님들. 순수한 먹보의 말 한마디에 두 분의 얼굴에 미소가 물에 떨어진 잉크 방울처럼 퍼지던 순간, 내가 출발선에 섰을 때가 떠올랐다.
치고 빠지기 선수 같은 약삭빠름이 없는 사람 이어서일까?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면 길게 본다. 오래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어렵게 첫발을 떼며 먼 곳에 있는 결과를 향해 나아간다. 설렘보다 불안, 성공보다 실패, 전진보다 후퇴를 먼저 떠올리는 순두부 멘털 인간에게 시작은 늘 어렵다. 그래서 바닥난 용기를 끄집어내 출발선에 섰을 때가 가장 두렵다. 포기는 가깝고, 성과는 멀리 있으니까 일단 눈을 감고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
무섭지만 단념하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확신도 중요하지만, 바깥에서 누군가가 건네는 응원 한마디가 큰 힘을 발휘한다. 믿고 기대는 사람에게 으레 받는 응원 말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에게 받는 응원의 효과는 그래서 더 강력하다.
두 사장님께 나는 어쩌면 무수한 손님 중 1인일 거다. 내가 보내는 응원 안에는 많은 게 담겨 있다. 빵세권을 잃고 싶지 않은 동네 주민의 욕심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1인 사업자를 향한 동지애 그리고 삶의 2막을 연 인생 후배를 향한 격려가 가득하다.
오래오래 해 주세요.
짧지만 진심 가득 담은 이 응원의 한마디가 두 초보 사장님들이 힘들 때마다기억 속에서 꺼내 먹는 자양강장제가 되길 바란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