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외국 같아.
국내의 여러 산 정상에서 흔하게 듣는 말이다. 그 말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SNS의 산 소개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강원도 철원군 스위스동
완전 유럽의 어디 어디 같아요!
엄연히 여긴 한국이고, 우리의 자연환경이다. 왜 우리의 것을 소개하는데 다른 나라의 것을 예시를 들어야 할까. 게다가 우리는 고유의 언어, 한글을 쓰는데 우리말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을까.
기자, 콘텐츠 마케터 등 우리의 말과 글을 주물럭대는 직업을 해서일까. 꼭 외국의 추상적인 이미지를 빌려 묘사하는 게 자존심 상한다. 나는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스위스 같다고 말하면 잘 이해할 수 없다. 문득 미국과 유럽인들도 아름다운 산세를 보면서 남프랑스의 알프스 산악지대 같아, 라고 말할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나를 처음 지리산으로 이끈 건 미국인 친구였다. 춥고 힘든데 대피소에서 새우잠을 자면서까지 등산하고 싶지 않아서 마다하는데도,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보고 싶다면 지리산을 가야 한다고 우겼다. 5시간 만에 도착한 대피소에서도 백기를 들었는데, ‘일몰을 안 보면 평생 후회할 거야’라며 재촉했다.
영하 10도, 미국인 친구들 10명과 산 중턱에서 펭귄처럼 온기를 나누며 쪼로록 섰다. 이윽고 우주의 향연이 시작됐다. 밤하늘이 초록색이기도 하고 분홍색이기도 하다가 무지개 셔벗 색이 된다는 걸 그날 알았다. 우주의 장대함이 느껴졌다. 내가 은하계에 속해있는 한 마리 동물 같았다. 우주의 기운을 느끼려면 아이슬란드의 오로라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리산 장터목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미국인 친구들은 지리산의 첩첩산중이 잘 구워진 크로와상의 레이어 같다고 표현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산 구석구석을 채운 희뿌연 구름은 잘 발라놓은 생크림 같아서 감탄스러웠다. 나는 물었다.
미국에는 더 좋은 데 많지 않아?
친구들은 갸우뚱했다. 그들은 지리산의 일출과 일몰에 매료돼 미국 여행 때 일출을 봤는데, 지리산에서만큼의 감동은 아니라 부모님이 허무해했다고 깔깔거렸다. 남프랑스에 사는 피에르는 북한산 운해에 빠져 한국에서 자주 새벽 산행을 하고 출근을 했다. 지금은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가끔 연락이 온다. 그때마다 꼭 북한산 운해 타령을 한다.
그치, 이건 저스트 코리아 온리원이지!
그렇게 산에 오르면서 우리나라를 발견하고, 새로운 표현과 단어를 배우고 있다. 장엄하고 천혜의 자연을 보고도 ‘와’, ‘대박’, ‘헐‘이라는 일차원적 표현을 쓰는 건 글쟁이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속상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우리의 것을 감탄사 몇 개로 단순하게 치환해 버리다니.
산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뭍에 내려와서 ‘대박이야’라고만 표현하면, 산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다. 사진도 한계가 있어서 장대한 아름다움을 잘 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뒤져보고, 김훈의 책 『자전거 여행 』이나 월간 잡지 「산」을 읽게 됐다. 덕분에 알게 된 건데, 우리나라는 지형의 80%가 산이다. 그래서 산과 관련된 순우리말이 많다.
- 산그리메/산너울 중첩되는 산 능선이 만들어내는 너울 같은 풍경
- 들머리/날머리 등산 시작/종료점
- 낙조 저녁에 지는 햇빛
- 돋을볕 해돋이에 처음 나타난 햇빛
- 너덜길 돌이 많이 깔린 비탈길
이렇게 아름다운 단어들이 많다. 그래서 손쉽게 ‘외국 같다’는 표현을 빌리는 대신, 어떻게 해야 우리말로 아름다운 산을 묘사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서툴지만 나만의 언어로 산을 표현해 보기도 한다.
브로콜리가 산 등마다 콕콕 박혀 있는 듯한 여름의 소백산, 용하기로 소문난 터지만 실제로 보면 감사함이 넘치는 금산의 보리암, 하얀 설탕 가루가 뽀얗게 오른 곶감 같은 태백산의 겨울 눈꽃길, 슈퍼 마리오 게임에서 뛰어다니던 구름들이 몽실몽실 피어오른 듯한 덕유산 운해까지.
우리의 아름다움이 다른 국가의 추상적인 이미지로 단순하게 치환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가진 것이 다채롭고 고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새로운 단어와 표현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등산 일기를 쓰면서 우리의 산을 기록한다. 우리의 산은 한국인인 내가 제일 잘 알려주고 싶으니까.
원문: 배추도사의 브런치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