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조직을 이루어 폭력으로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무리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야인시대’의 몰락과 군웅할거
해방 직후 주먹 세계의 명분은 항일에서 반공으로 바뀌었고, 자연스럽게 좌우익으로 나뉘게 되었죠. 좌익의 대표주자는 조선청년전위대의 정진용으로 YMCA 권투부 출신이라는 이력을 가지고 좌익인사의 경호를 주로 맡았어요. 우익의 대표주자는 조선민주청년동맹의 김두한과 서북청년단의 선우기성으로 이들은 주로 파업현장 난입, 좌익인사 납치 및 테러 등의 일을 했죠.
이들은 1947년 4월 대대적으로 충돌하는데요. 당시 시공관에서 좌익세력이 주관한 〈제 3전선〉이라는 공연이 열리고 있었고, 경비는 조선청년전위대의 정진용이 맡고 있었죠.
그런데 김두한의 조선민주청년동맹 세력이 공연 중반에 좌익인사 3명을 납치해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투옥되고 조선민주청년동맹 세력도 약화되었죠. 이를 계기로 서울의 주먹 세계는 다음과 같이 군웅할거 상태가 됩니다.
- 종로: ‘아오마쓰’ 심종현, ‘아라이’ 박원선
- 명동: ‘시라소니’ 이성순, ‘검은신사’ 이화룡
- 동대문: 이정재
- 광화문: 장영빈
- 충무로: 정팔
- 소공동: 홍성철
- 남대문시장: 한수완
2. 자유당을 등에 업은 동대문파 이정재
50년대 중반부터는 서대문과 광화문, 소공동의 주먹이 이정재 수하의 유지광과 손을 잡으면서 종로, 명동, 동대문 3파전의 시대가 열립니다. 특히, 동대문의 이정재는 자유당 정권의 유력 인사였던 이기붕 민의원(이후 부통령)과 손을 잡고 정치깡패가 되는데요. 부산 정치파동(1951), 대구 매일신문사 테러 사건(1955) 등이 이들의 작품이었죠.
이정재는 자유당을 등에 업고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합니다. 1957년 장충단에서 야당 시국강연회가 열리고 있었는데요. 당시 경비책임자는 김두한이었는데 이정재 휘하의 유지광이 50여 명의 폭력배와 난입합니다. 이를 계기로 유지광은 징역 1년에 처했고, 자유당 정권은 1958년 ‘폭력배 소탕령’을 내려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을 제외한 다른 모든 주먹 세력을 와해시켰죠. 이렇게 이정재가 주먹세계를 통일했어요.
하지만 이들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는데요. 이정재가 동대문 조직에서 물러나고 이기붕은 선거를 위해 1959년 새로운 주먹조직인 반공청년단을 조직합니다. 이 반공청년단은 1960년 4월 18일,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평화 행진을 습격하는데요.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4·19 혁명이 일어나고 제1공화국이 종말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죠.
물론 민주당 정권은 주먹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했고, 이정재를 비롯한 간부급 20명을 특수감시죄와 공갈죄로 구속기소합니다.
3. 호남파가 꿈꾸는 ‘신세계’
민주당 정권은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금세 무너졌지만, 폭력배 소탕령은 이어졌어요. 특히 이 당시 이정재, 임화수 등 자유당 시절의 정치폭력배들이 사형을 당합니다.
동대문파가 몰락하자 명동의 ‘검은신사’ 이화룡의 계보를 잇는 신상현이 서울을 제패하는데요. 그는 육군 상사 출신이라 ‘신상사파’라고 불렸죠. 한편으로는 1965년경부터 광주, 전주, 목포, 여수, 순천 등지에서 호남 주먹들이 상경하면서 서울에서 호남파의 입지가 커집니다. 이들은 주로 무교동에서 활동했죠.
신상사파와 호남파는 여러 차례 부딪쳤는데, 1975년 결판이 납니다. 주류공급권을 둘러싸고 의견이 충돌하자 호남파가 신상사파를 기습한 것이었는데요. (사보이호텔 습격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호남파가 서울을 제패하게 돼요.
호남파는 초기 양은이파가 득세하고 있었는데요. 김태촌의 서방파가 양은이파를 치게 됩니다. 여기에 김태촌을 견제하기 위해 불러들인 이동재(OB파)가 끼어들면서 호남파는 양은이파, 서방파, OB파로 분화되었죠. 1977년 10월 서방파의 김태촌이 구속되고, 1978년 11월 양은이파가 공식 결성되면서 서울은 양은이파가 통일하는 듯했죠.
하지만 1980년 신군부는 ‘사회악 일소 특별 조치’와 계엄포고령 제19호를 발령하고 대대적인 폭력배 소탕에 나서는데요. 이때 그 유명한 삼청교육대가 등장하죠. 이로 인해 1980년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도 구속되어 호남파의 시대도 저물게 됩니다.
4. ‘범죄와의 전쟁’으로 막을 내린 정치권과의 공생?
5공화국 초기를 지나면서 지방의 폭력조직이 서울로 진출해 맘보파, 목포파, 진석파등 신흥조직들을 형성했어요. 당시 3S 정책으로 향락산업이 발전하고, 특히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카지노 등의 도박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요. 도박산업의 발전에 힘입어 검은돈을 축적한 폭력조직은 점차 기업화되기 시작했어요.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과 폭력조직의 유착관계가 형성되었는데요. 정부 기관에서 조폭들을 우익단체화해서 선거운동 등에 동원하는 경우였죠. 대표적인 예로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이 있었어요. 이외에도 인천의 ‘폭력배 선방 탄원 사건’, 대전의 ‘판검사 조폭 술자리 합석 사건’ 등이 정치권과 폭력 조직 간의 유착관계를 보여주었죠.
당시의 정치권과 조폭의 유착관계는 이전과는 달랐는데요. 이전까지의 폭력조직은 정치권의 하수인이었다면, 이때부터는 막강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정치권과의 동등한 위상의 공생관계가 된 것이죠. 이러한 정치권과 조폭의 유착관계에는 5, 6공화국의 핵심 실세였던 전경환과 박철언 전 의원이 핵심 역할을 했어요.
하지만 선거 결과는 이들의 의도와는 달리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노태우 정부는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어요. 이를 계기로 보스급 조폭들이 장기 실형을 받으면서 대부분의 대형조직이 무너졌죠.
5. 한때는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범죄와의 전쟁’으로 대부분의 정치조직이 와해되었지만 이들의 배후 거물이었던 정 패밀리는 건재했어요. 정 패밀리의 정덕진은 슬롯머신 업계의 대부인데요. 엄삼탁 전 안기부 기획조정실장이 조직폭력의 우익세력화를 명분으로 슬롯머신 업계를 압박하자 1989년 정덕진은 엄삼탁과 접선합니다. 또 한편으로 정덕진은 호남의 서방파 김태촌을 만나면서 폭력조직과도 공생관계를 맺는 등 카지노 – 조폭- 정치 권력의 삼각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었죠.
이 슬롯머신 사건을 1993년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홍준표가 맡게 되는데요. 홍준표는 정덕진에게 탈세 혐의를 씌워서 정덕진을 구속하고 관계자들을 수사했죠. 이 과정에서 엄삼탁은 물론 박철언을 구속기소하는 성과를 내는데요. 박철언은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고 1년 4개월을 구형받습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문헌
- 구영식. (2001) 「권력과 조직폭력배의 ‘검은유착’ 55년의 역사」 월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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