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의 계절이다. 요즘 파스타에 꽂혀 1일 1 파스타 중이다. 별별 모양과 길이의 파스타면, 각종 소스와 향신료를 사들이느라 바쁘다. 거기에 애호박이나 가지 같은 제철 채소와 새우, 베이컨처럼 부재료 다르게 조합해 매일 다른 파스타를 먹는다.
늦은 아침과 이른 점심 사이, 오늘의 아점 역시 파스타였다. 일단 파스타면을 삶을 물을 담은 냄비를 올리고 물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욕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 비누 거품으로 손 구석구석을 비비며 냉장고 속에서 대기 중인 채소의 목록을 떠올려 봤다. 오늘의 선택은 보라색 가지, 새송이버섯, 빨간 파프리카 그리고 양파!
정확한 메뉴명은 ‘여름 채소 왕창 오일 파스타’로 정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냉장고 문을 여는 나를 향해 엄마가 말했다.
나도 먹을래. 넉넉하게 만들어.
엄마는 일찌감치 아침을 드셨고, 아직 다 소화되긴 이른 시간이었다. 당연히 내 몫의 1인분을 생각했던 내게 날아든 엄마의 주문에 살짝 놀랐다.
완벽한 1인분의 파스타를 목표로 요리를 시작했지만 결국 늘 그렇듯 여유(?) 있게 만든 파스타를 엄마가 도와주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별도의 주문을 하시는 걸 보면 지난번 ‘새우 머리 왕창 오일 파스타’의 여운이 길었나 보다.
차례를 지내지 않은 추석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미리 햇 흰다리 새우를 주문했었다. 오동통한 새우를 찜 쪄 먹고, 머리만 곱게 따서 놔뒀다가 오일 파스타를 만들었다. 파스타 면만큼이나 새우 머리가 가득했던 오일 파스타의 감칠맛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맛이었다. 그래서 일흔 넘은 엄마가 파스타의 세계로 입성한 걸까? 아니면 대기업의 석학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끝에 만든 토마토소스, 투움바 소스, 바질 크림소스, 로제 소스, 콰트로 치즈 크림소스 덕분일까?
주먹만큼 남았던 꽈배기 모양의 푸실리를 봉지째 털어 넣고, 새로 산 튜브 모양의 리가토니도 한주먹 넣었다. 8분 동안 삶은 푸실리를 건져내고, 좀 더 두꺼운 리가토니는 6분 후에 건졌다.
올리브 오일을 두른 팬에 편으로 썬 마늘을 볶다가 한입 크기로 자른 채소들, 삶은 면 순으로 넣고 볶는다. 뻑뻑한 감이 있어 미리 받아 뒀던 면수를 한 국자 넣으니 촉촉해졌다. 까만 후추와 빨간 페퍼론치노 가루와 초록 파슬리 가루를 뿌린 후 뒤적여 맛을 봤다.
파스타를 삶을 때 물에 소금을 넣었으니 간이 있긴 했지만 뭔가 부족했다. 냉장고에서 잠자고 있던 참치액을 팬 안쪽으로 한 바퀴 휙 두르며 생각했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 강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파스타에 참치액을 넣는 한국인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피클 대신 엄마가 며칠 전에 만든 양파장아찌만 꺼내 상을 차렸다. 늦은 아침이자 이른 점심 식사. 엄마와 나란히 앉아 파스타를 먹다가 내 특기가 또 발동했다. 칭찬받고 싶을 때는 옆구리 찔러 생색내기.
엄마, 딸 참 잘 뒀네. 집안에 편히 앉아 이탈리아 음식을 다 먹고.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파스타 면에 이탈리아산 올리브 오일까지 들어갔으니 여기가 이탈리아지 뭐.
그러네. 여기가 이탈리아네.
근데 엄마 파스타 좋아했어?
옛날에는 맨 밀가루 덩어린 줄 알았어. 파스타를 뭐 먹어 봤어야지. 근데 먹어 보니 맛있네.
아빠가 파스타 사준 적 없어?
아빠는 파스타가 뭔지도 모를걸?
그럼 엄마는 무슨 파스타가 좋아? 오일? 크림? 토마토?
(엄마는 고민 중)
쉽게 답을 말하지 못하는 엄마를 기다리다 못해 엉뚱한 말로 재촉했다.
나중에 엄마 제사상에 파스타 올릴게. 어떤 파스타?
며칠 전 들었던 팟캐스트의 한 대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행자는 기일이나 명절 즈음, 수년 전 돌아가신 아빠를 뵈러 묘소에 갈 때면 꼭 챙겨가는 게 있다고 했다. 살아생전 술, 담배도 안 하신 아빠가 좋아하셨다는 노란 맥심 커피 믹스.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챙겨가 술 대신 달달한 커피를 올린다고 했다.
연세가 있으시니, 엄마가 저세상에 가실 때가 언제 와도 이상하지 않다. 돌아가신 후에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 차리는 것보다 살아생전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게 더 가치 있는 일이라 믿는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우리 집 한정 ‘제사 간소화 추진 위원회’ 회장을 자청했으니 엄마의 제사도 아마 옛날 방식으로는 안 할 거다. 어렴풋이 그때를 생각해 보면 파스타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좋아. 딸이 한 건 뭐든.
본인의 입맛보다는 남편과 자식들의 취향이 먼저였던 엄마. 딸이 만든 파스타 한 접시를 다 비울 때까지도 엄마는 끝내 한 종류의 파스타를 정하진 못하셨다. 살아 계시는 동안 다양한 종류의 파스타를 자주 드시다 보면 엄마의 선명한 파스타 취향이 생기지 않을까? 일흔 넘어 파스타 맛에 눈을 뜨셨으니 발전할 날만 남았다.
먹은 그릇을 치우며 딸의 정성과 애정이 듬뿍 들어간 홈메이드 파스타도 좋지만, 종종 엄마의 파스타 세계를 넓혀줄 전문적인 셰프의 손길 듬뿍 담긴 파스타를 만나러 가야겠다 다짐했다. 엄마와 내가 함께 파스타를 먹을 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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