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사람 손이 좀 부끄러워서 그렇지, 받는 사람은 좋아한다?
나의 친애하는 빌런, 상사 B가 이렇게 말했을 때 B는 직원들에게 회사 대표를 위한 크리스마스카드를 쓸 것을 강요하는 중이었다. 나는 저 말을 듣고 속으로 감탄했다. ‘오, 이것이야말로 아부의 본질 아닌가’
주는 사람은 민망함에 눈 딱 감고 줘야 하는 것, 그런데 받은 사람은 알면서도 결국 다 좋아하는 것. 나는 B의 말이 정말 아부의 본질을 꿰뚫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아부쟁이가 내뱉은, 아부에 대한 아주 적확한 정의.
천하제일 카드 대회
B가 카드 쓰기를 시킨 건 약 1년 전 이맘때였다. 우리는 그의 강요로 롤링 페이퍼처럼 대표에게 보내는 새해 덕담 몇 마디씩을 돌려 적고 있었다. 그는 먼저 이런 말을 맨 위에 썼다.
이사님! 사랑합니다!!!!
그리고는 직원들에게 카드를 넘겼다. 자신의 훌륭한 아이디어에 몹시 흥분한 그가 한 사람에게서 다음 사람으로 카드가 넘어갈 때마다 성마르고 집요하게 물어댔다. “뭐라고 썼어? ‘사랑합니다’ 썼어?” (아니 도대체 우리가 왜 회사 대표를 사랑해야 하는가)
결국 B가 원한 그 말은 아무도 쓰지 않았고, 결과물을 확인한 B는 우리가 아부 프로젝트에 형식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마지막 순간 푸슈슉 김이 새어버렸다. 카드를 직접 들고 대표실로 쳐들어갈 기세였던 B는 급격히 흥미를 잃었고, 다른 직원에게 시켜 대표실에 보내며 소동은 끝이 났다.
우리 회사가 원래 이런 문화가 있는 조직이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예전에도 대표에게 이딴 걸 보낸 적이 있는지 선배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이런 ‘아무도 안 하는 이상한 짓’을 하며 딸랑딸랑 소리를 바삐 내는 B는, 그런 면에선 이 조직에 없던 별종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외계인적 존재가 나타났다고 하기엔, ‘윗선’에서 시키기만 하면 열 일 제쳐두고 당장 대령하고 마는 이들이 이미 많았으므로 B의 출현은 그저 업그레이드 버전의 등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배달을 한 선배 말에 따르면 대표는 그 자리에서 카드를 열어봤지만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는 후문인데, 관심도 없어서였는지 부끄러워서였는지 형식적인 인사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의 아부가 발설하는 것
나는 1년 전, B의 명대사를 듣고 그것이야말로 아부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1년이 지났다. 나는 회사에서 듣는 말들은 결국 말하는 자의 욕망을 발설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B가 내려준 아부의 정의도 조금은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주는 사람 손이 좀 부끄러워서 그렇지, 받는 사람은 좋아한다?
B는 남들의 행동양식에 대해 말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기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다. 그러니 저 대사는 ‘아부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 아니라, ‘B의 본질’을 꿰뚫는다.
‘아부는 모두에게 다 먹히는 전략이다’라는 B의 생각은 아부가 모두에게 먹히길 바라는 B의 소망을 반영할 뿐이다. 더 나아가 누군가 자신에게 아부해주는 것을 좋아하는 B의 취향도 반영한다. B의 명대사는 결국 B가 어떤 사람인지를 발설하고 만다.
정말 모든 인간이 아부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한 B의 전제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면서도 완전히 동의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흔치는 않아도 어딘가엔 있는 거 아닐까, 아부를 혐오하는 사람이 이 지구에 몇 명 정도는? 한두 명이라도? (이것은 나의 욕망이겠지)
난 그러니 ‘사람은 아부를 받으면 결국 다 좋아한다’는 명제를, 사실이 관측되기 전까지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라고 우겨본다. 이것은 슈뢰딩거의 아부다. 그렇다고 굳이 다 확인해서 사실을 확정 짓지는 말자. 모두에게 아부를 뿌려서 굳이 결과를 확인하지 말고 우리 모두의 아부는 상자 속에 넣어두자. 그냥 지구 어딘가엔 아부를 극혐 하는 누군가가 살고 있다고 믿고 싶다. 나에겐 희망이 필요해.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당신의 아부는 거꾸로 이 한 가지만을 말해줍니다. 당신이 아부의 효용을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는 것을. 당신은 누가 아부를 해주면 겁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제발 당신의 아부는 혼자 알아서 해결해주세요.
원문: 상사를때리면안되는데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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