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체로 나를 들볶으며 사는 편이다. 나는 나를 들볶고 그래서 나는 나에게 들볶인다. 그렇다고 아침부터 밤까지 빽빽한 스케줄을 만드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다. 정반대다. 나는 계속 주저하고 고민하며 뭔가 따지면서 나를 들볶는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우유부단하고 게으른 표면에, 이상하게 늘 지쳐 있는 내면을 가졌다.
내 성격을 알고는 있었지만, 얼마 전 또 나에게 들볶이는 바람에 더없이 행복하던 사람이 단 몇 시간 만에 불행에 처박히는 걸 보고 나서 ‘이것도 참 재능이다’ 싶어졌다(반어법입니다). 그래서 난 여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아주 금방 불행해지는 (바보 같은) 재능.
저녁 7시의 행복이 새벽 1시의 불행이 되기까지
10월에 갑자기 예정에 없던 휴가가 생겼다. 그간 너무 많은 업무에 치이며 살았고, 주말까지 합친 이번 6일의 휴일이 2년 만에 가장 길게 쉬게 된 기간이었다. 이 휴일은 어느 날 점심을 먹다가 갑작스럽게 정해졌는데, 아무래도 연말에 바빠지기 전에 쌓여있는 연차를 소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오고 가면서, 나는 갑자기 급하게 그다음 날부터 연차를 쓰게 된 것이다. 갑자기 내일부터 연차라니! 주말까지 합치니 6일이나 자유! 너무 신나고 들떠서 그날 오후 사무실에서 실실 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일하는 틈틈이 제주도 비행기표를 검색했는데, 주말엔 표가 없었고 오히려 당장 다음 날 떠나야 했다. 못 가게 된 공연을 티켓부터 취소하고 제주도 숙소를 검색했다. 숙소만 있다면 난 당장 떠날 수 있었는데, 정말 숙소가 하나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대체 공휴일이 붙은 황금연휴인데 하루 전날 검색해서 제주도에 무슨 숙소가 있단 말인가. 친구들에게 갑자기 생긴 휴가 얘기를 하니 이런 숙소도 있다며 링크를 보내주었는데 대부분 예약을 걸면 방이 없다며 금방 취소 처리가 되었다.
나는 퇴근하고 집에 7시에 들어와 노트북부터 열었다. ‘저녁을 먼저 차려 먹고 검색을 시작하는 게 좋을까?’ 고민했지만 일단 어디든 맘에 드는 숙소, 여행지를 찾아서 여행 계획을 세워놓고 밥을 먹고 싶었다. 당장 다음날 떠날 계획이었으니 마음이 더 급했다.
결론부터 말해서, 나는 그날 저녁 7시쯤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6시간 가까이 화장실도 안 가고 저녁도 안 먹고 물도 안 먹고 꼼짝없이 앉아서 계속 숙소만 검색했다. 새벽 1시에 마침내 어느 여행지의 숙소를 결정하고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숙소가 없어서 여행은 3일 뒤에 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퇴근할 땐 룰루랄라 아주 행복하게 집에 들어왔던 내가 지금은 아주 불행해졌음을 깨달았다. 너무 피곤했고 힘들었고 이번 여행에 이미 질려버렸다고 느꼈다. 거기에 더해 휴가의 첫 날인 내일 컨디션에도 이미 망조가 들었다.
나는 괴로운 프로고민러다
물건을 살 때 너무 많이 비교하고 따지고 고민 고민해서 사면, 정작 구매 후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히려 대충 알아보고 큰 고민 없이 구매한 물건들에 대해서는 만족하기가 더 쉽다고 한다.
계속 고민하는 사람은 이렇게 해서 내 맘에 더 쏙 드는 것을 찾아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시간과 에너지를 쓴 그 과정 자체가 모두 비용인 것이다. 긴 과정에서 계속 그 물건에 대해 생각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막상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 아주 완벽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오히려 투자한 비용 대비 상대적인 만족감이 뚝뚝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늘 그 이야기를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데 도저히 그렇게 잘 되지가 않는다. 생각건대 갖고 태어난 불안과 강박 기질 때문인 것 같다. 일상생활에 아주 지장을 줄 만큼은 아닌, 약한 수준의 그러나 잔잔하게 늘 존재하는. 그러다 가끔 이런 이벤트가 생길 때 그게 나를 좀 이런 사람으로 만든다. 이런 사람… 물도 밥도 안 먹고 다리도 안 펴고 집요한 검색만 6시간 하는 사람. 그리고 당장 내일의, 휴일 첫날을 망치고 시작하는 사람.
나의 불안, 나의 강박
대체 무얼 했길래 6시간이나 지났는가. ‘그렇게나 방이 한 개도 없었나?’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내가 무얼 했는지 말해보겠다.
- 제주부터 시작해 군산, 전주, 경주, 인천, 파주, 춘천, 강릉, 서울까지 온갖 지역의 온갖 숙소를 검색했고,
- 게스트하우스와 호텔의 남은 룸 종류를 확인하고 리뷰까지 훑으며 과연 이곳이 적당한 숙소일지, 나의 완벽한 휴일을 망치지 않을 곳인지 면밀히 판단했다.
- 그 와중에 교통편도 따져봤고
- 청소 상태가 안 좋다는 리뷰가 있는 곳은 제외했고
- 인테리어가 끔찍한 숙소들도 패스했다.
- 조용히 쉬고 싶었으니 ‘파티’ 같은 소리가 쓰여 있는 게스트하우스도 당연히 제외했다.
물론 대부분 가고 싶은 숙소들은 다 예약이 찼으므로 난 원하는 숙소를 구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교통편도 따졌던 건 내가 버스와 택시를 싫어하고 지하철과 기차 등을 선호하기 때문인데, 그것도 결국 내 예기 불안과 관련이 있다. 돈을 좀 더 써서 호캉스를 할까 하며 호텔도 열심히 검색해보았으나 방이 남은 곳은 너무 비쌌고 가격이 적절하면 방이 없었다. 그렇게 6시간을 집요하게 전국 각지의 여행지 숙소를 알아본 끝에, 맘에 드는 숙소를 골라 (날짜만 어느 정도 타협한 채) 예약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꼼꼼한 사람은 여행을 앞두고 폭풍 검색을 해서 정보를 수집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괴로운 건 ‘다음 페이지, 다음 키워드에는 분명 맘에 드는 숙소가 나타날 거야!’ 하는 생각에 6시간을 화장실도 안 가고 검색 지옥에 빠져있던 나의 집착이다. 심지어 마지막에 결정한 숙소도 훨씬 일찍 찾아낸 곳이었는데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예약을 실행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썼다.
난 대체 왜 이렇게 적당히를 모르고 날 피곤하게 만들까 생각했다. 자정이 넘었지만 배가 고파 밥을 먹었고, 씻고 소화하다 보니 결국 새벽 5시 반에 잠들었다. 다음 날, 숙소에 예약금을 입금하기 위해 9시에 눈을 떴다. 하루 종일 피곤할 것 같아 좀 더 자려고 했지만, 이번 여행지가 처음 가보는 지역이라 괜히 불안하기도 설레기도 해서 이번엔 맛집과 명소를 검색하다 잠이 달아나버렸다. 어젯밤 이미 질릴 대로 질려버린 검색 지옥은 이튿날 오전까지 계속됐다.
오후 늦게 침대에서 빠져나올 땐 더 이상 나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나빴다. 난 좋은 여행도 원했지만 휴가의 첫날을 이렇게 피곤하고 지친 채로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휴가는 내가 망치는 중이었고, 이미 하루의 절반 이상이 날아갔다.
불행한 결과를 만든 단추들
난 왜 이렇게 어리석게 굴었나?
망한 첫 번째 단추
일단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 회사 업무가 과중하여 그동안 길게 쉬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6일 연속 휴무가 너무 소중했다. 진짜 잘 보내고 싶었기에 나의 무의식은 완벽한 휴일을 목표로 삼았다. 이런 목표를 세운 이상 나 자신의 높은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불안한 요소들은 모두 제거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면 숙소의 청결 상태에 대한 리뷰, 비선호 대중교통 동선 등) 그 결과 강박적인 무한 검색 메들리가 시작됐다.
망한 두 번째 단추
피곤해진다. 이게 무슨 휴가인가 현타가 오기 시작한다. 나도 이런 내 성격이 너무 싫다. 후회가 밀려오며 내가 싫어진다.
망한 세 번째 단추
후회와 자책은 다음 날 눈을 떠도 도통 끝날 생각이 없었다. 아침부터 어제의 실수를 자책하며 우울하게 어제 하던 일의 연장선인 검색 지옥에 또 빠진다. 그리고 이것도 다시 내 자책 거리가 되었다! 자책해서 우울해진 나를 내가 다시 자책한다! 자책의 무한루프~!
사실 나는 잘 안다. 나의 가장 큰 적은 나다. 나의 가장 큰 빌런, 내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 나는 나랑 싸우는 게 제일 괴롭다. 나는 대체로 이런 강박이나 집착을 적당한 수준에서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없다(있으면 이렇게 안 살았겠지).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아이패드가 너무 비싸서 사지도 포기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인들의 의견을 구하고, 유튜브의 온갖 리뷰 및 비교 영상 영상을 섭렵하며, 하루에 천 번씩 애플스토어와 당근마켓과 각종 인터넷 쇼핑몰을 들락거리며 잠도 안 자고 기종별 가격 비교를 해대고, 아이패드를 어떻게 활용하면 돈이 안 아까운지 소개해주는 블로그와 유튜브 영상을 찾아다닌다. 한번 시작하면 적당히를 모르는 통에 잠을 못 자고 다음 날을 망치며 기분이 우울해지고 주말이 망가진다. 그러면 또다시 자책의 자책 무한 루프가 시작된다!
이미 망한 거 = 이미 망한 거. 그냥 흘려보내자 쫌
안 망할 수는 없는데, 최악만은 면하자.
이 정도가 나에게 가능한 현실적인 수준의 목표라고 본다.
휴일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어쨌든 연차 첫날은 전날부터 이어진 나의 과오로 망쳐졌다. 피곤하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로 오후가 다 지나가고 있었다. 다만 꼭 바깥에는 나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뒤늦게 지하철을 타고 옆 동네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열고 한참 동안 그날의 일기를 썼다.
자책 중인 그 모든 과정을 두어 시간 일기에 쏟아내고 나니, 그제야 조금은 날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 너도 잘하고 싶었겠지. 하는 생각. 지나간 건 매몰 비용… 그만 냅둬라… 하는 생각. 그리고는 내가 조금 불쌍한 생각이 들었고, 마음이 스스로 너그러워지자 조금은 편안해졌다.
물론 바보 같은 짓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번엔 여행이었고 이번엔 아이패드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음 달엔 또 어떤 이유든 내가 나를 들볶을 것이다. 그래도 요즘은, 어떤 이유로 내가 너무 싫어져 자책이 다시 자책을 불러오고 자책의 눈덩이가 산사태를 일으키려고 할 때, 즉 최후의 순간 나는 그냥 그 모든 걸 매몰 비용으로 묻어버리고 나를 그럭저럭 용서해주려고 한다. 무한루프를 빠져나오는 방법은 손절뿐이기에.
자책하는 내 마음 돌리는 법
자괴감의 구덩이를 파다가 갑자기 나를 용서해주기가 쉽지 않다. 특히 자책의 무한루프로 얼마나 많은 시간 낭비를 했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금 이 시점부터 모든 다 잊어줘야 하는데, 그게 참 말만 쉽지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 모든 게 다 쟤 때문인데 갑자기 뾰로롱 용서라니. 그래서 이런 용서는 어느 정도는 모든 걸 하얗게 불태운 후 녹다운이 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분명 그런 용서가 가능해지는 순간들을 난 기억 한다. 내가 좀 안쓰럽게 느껴질 때. 나도 이런 나라서 참 고생이다 싶을 때. 그럴 때는 그냥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나를 불쌍히 여겨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좀 나아진다. 거기에 더해 내가 왜 이렇게까지 했는지 (예를 들어 이 휴가가 나에게 너무 중요한 휴가였다는 사실 등) 원인을 같이 이해해보면 효과가 더 좋다. “이미 많은 바보 같은 짓을 했지만 어쩌겠냐. 너도 참 고생이다.” 이 정도의 마음이면 되는 것 같다.
요즘 들어서 하게 된 생각인데, 상황에 따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곧 ‘사랑’과 같은 뜻일 때가 있다. 특히 엄마의 엄마, 즉 나의 외할머니가 당신 딸이 고생하는 것을 보며 “불쌍하다”고 아파하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곧 그를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의 ‘불쌍하다’에는 어떤 뜨거움이 들어 있어서, 몹시 괴롭던 마음을 한 번에 풀어지게 하기도, 녹아버리게 하기도 한다.
아니, 그리고 솔직히 바보에겐 이 얼마나 살아가기 팍팍하고 험한 세상인가? 내가 항상 좋은 선택을 하진 못하지만 그런 나를 계속 힐난하는 것도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니 이미 많은 바보 같은 짓을 했지만, 너른 마음으로 나를 이해해주기로 결정한다. 아이구 이 불쌍한 것…
Epilogue
막상 떠난 여행은 그렇게 너무 좋지도, 그렇게 너무 안 좋지도 않았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려는 택시기사를 만나기도 했고, 혼자 돌아다니면서 구경한 여행지 분위기는 예상보다 더 쓸쓸했다. 가게들은 자꾸 문을 닫아서 가고 싶은 곳을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돌아와서 2주 정도가 지난 지금은 대체로 다 괜찮았다고, 그렇게 대략적으로 기억한다.
다음에 또 갑자기 떠날 여행이 생기면, 조금만 더 느슨한 마음으로 가보자고 생각해본다. 여행이 완벽하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면 차라리 일정을 짧게 잡고 휙 다녀오는 게 어떨까 싶다.
원문: 상사를때리면안되는데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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