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제는 전 세계의 스포츠 축제, 올림픽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스포츠 선수나, 경기에 대한 이야기냐고 물으시면 그건 아닙니다. 스포츠보다는 이데올로기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1932년부터 84년까지 이어진 냉전 올림픽(Olympic ColdWar)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분위기를 자아내는 와중에 개최된 올림픽이라는 점. 두 번째는 바로 중국에서 열린 올림픽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선수들에 대한 검열이나 편파판정에 대한 이슈는 냉전시기 과열된 올림픽 양상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였는데, 전 국민을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편파판정이 계속되었죠.
그도 그럴 것이 한 언론 칼럼에서 붙여진 이번 올림픽의 별명은 ‘시진핑의 시진핑에 의한, 시진핑을 위한 올림픽’입니다. 이번의 과열된 올림픽 양상은 올해 하반기에 시진핑 주석의 연임을 결정짓는 20차 당 대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죠. 공산당에서 보통 주석은 2연임까지가 관례고, 3연임 정도의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그만한 명분과 업적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이번 올림픽에서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분쟁을 잠재우면서 겉으로는 포용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중국 선수단이 메달을 많이 따 애국심을 고양시켜 ‘위대한 강대국 중국’이라는 이미지를 중국 인민들에게 과시하려는 의도를 띠고 있다는 겁니다.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핑계로 해외 선수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통제하고, 이해할 수 없는 편파판정을 빈발하기 시작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뿐…’ 등의 극단적인 혐오를 표출할 필요는 없습니다. 올림픽이라는 메가 이벤트는 항상 국가 원수들의 철저한 계산과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도사렸던 장소이기 때문이죠. 지금은 비교적 자유롭지만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일상생활마저 이데올로기 경쟁이라는 국제 정세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스포츠에는 훨씬 정치적 목적이 얽혀 있었고요.
때문에 이번 글에선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처럼 올림픽에 반영되었던 국가들의 계산과 국제 정세 변화의 순간을 연대기 순으로 뽑아봤습니다. 올림픽이 정말로 선수들과 스포츠만을 위한 공간이었는지, 들여다보시죠.
- 연대기의 분류는 엄격히 학문적인 분류가 아닌 글쓴이 개인의 견해가 담겨있습니다.
- 포스터, 로고 등 사료는 모두 IOC 홈페이지가 출처로 별도의 저작권 표기를 생략합니다.
1. 올림픽의 시작, 그 속의 제국주의(1896~1936)
가장 근대적인 올림픽의 시작은 1896년 4월에 열린 아테네 올림픽입니다. 이때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을 중심으로 한 14개국이 참여했고, 유럽에 국한된 경기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해에 아관파천이 발생했습니다. 전 세계 속 제국주의의 열망이 한창 확대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은 그다지 큰 대회가 아니었습니다. 뒤이어 열린 1900년 파리 올림픽만 해도 파리 만국 박람회, 즉 파리 엑스포 부속 행사로 진행되었습니다. 프로 선수와 아마추어 선수가 뒤섞여 경기를 진행했죠.
당시는 한창 제국주의가 유럽에서 활개를 치던 시기였습니다. 엑스포는 자연스레 선진국이 자국 발전을 과시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쟁이 과열되어 발생하는 해프닝 역시 많았습니다. 이러한 면모가 돋보이는 일화가 1937년 파리 엑스포에서 발생한 독일과 소련의 경쟁입니다. 무려 주최자인 프랑스보다도 전시관을 크게 짓겠다며 소련과 독일이 자존심 경쟁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서로 더욱 웅장하게, 더욱 크게 짓겠다고 경쟁한 결과 주최국인 프랑스 전시관보다 2배 큰 규모를 가진 전시관이 지어졌습니다. 이렇게 과열된 경쟁 양상이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면 성급한 결론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4년 뒤인 1941년에 독일이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합니다.
이렇듯 이 시기는 자신들의 체제와 국가가 뛰어나다고 자랑하고 싶어 안달을 내던 시대였습니다. 초기 엑스포 속의 부설 프로그램으로 열린 올림픽 역시 제국주의 시대의 과열된 경쟁심리가 반영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올림픽은 또 다른 체제 선전의 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데올로기 선전의 장으로 쓰였던 대표적인 올림픽은 1936년 독일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입니다. 세계 최초로 TV로 중계한 올림픽이자 히틀러가 선전을 위해 개최했던 올림픽으로도 유명합니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나치는 영화감독을 고용해 올림픽 경기를 예술적으로 촬영하고 아리아인의 신체의 미적 아름다움을 카메라로 담는 동시에, 독일이 금메달을 독점하여 ‘아리아인의 생물학적 우수성을 홍보한다.’는 정치적인 목적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당시의 충격적인 점은,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국가의 선수 입장 시 나치 식 경례를 하면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올림픽 개최 이전의 독일은 공원에 ‘유대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려 있을 정도로 차별이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TV로 방영되는 독일은 정말 평화롭고 잘 발전된 선진국으로 포장되었죠. (이런 독일과 히틀러, 나치가 5년 뒤 소련과 조약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다들 상상조차 못 했을 겁니다) 당시 베를린 올림픽은 전 세계 50개 언어, 3천 개 이상의 프로그램으로 방송되어 효과적으로 나치를 선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2. 냉전의 개막, 그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1948~1984)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우리에게는 가슴 아픈 시대였지만 올림픽은 세계화가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소련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해이기도 합니다. 냉전의 분위기가 과열되고 있던 시대였지만 올림픽 자체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념과 갈등을 뒤로하고 평화를 위해 전 세계가 함께 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모습을 연출했죠.
개최지 선정 또한 의의에 맞게 회원국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습니다. 특징이 있다면 냉전 시대인 만큼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정치 노선에 따라 선수들이 따로 분리되어 수용되었다는 것 정도겠네요.
그러나 이렇게 평화로운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올림픽도 과열되는 양상을 보여준 시기이기도 합니다. 반대 진영 선수의 업적을 폄훼하는 프레이밍과 도를 넘은 비판이 쏟아졌으며, 서로의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사태까지 이어졌죠.
1980년의 올림픽은 모스크바에서, 1984년의 올림픽은 미국 LA에서 열렸습니다. 냉전 시대를 주도한 양측의 우두머리가 주도하는 올림픽이 연속해서 개최된 셈이죠. 결과는 불 보듯 뻔했습니다.
1980년 소비에트 연방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습니다. 무자헤딘-알카에다-탈레반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만든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때문에 80년 올림픽은 이에 반발한 미국과 동맹국인 한국 등 수십 개 나라가 보이콧을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열린 LA올림픽에 소련을 위시한 14개 공산권 국가들이 보이콧을 선언했습니다. 이 시기만 해도 올림픽의 권위가 연달아 실추되는 모습을 보였던 거죠.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민주주의 선전의 장이 되었습니다. 한국이 6.25 전쟁을 딛고 일어나 이렇게나 현대화되고 발전하였다는 것을 전달할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죠. 그 덕분에 당시 공산권 국가였던 쿠바와 에티오피아, 북한 등은 보이콧을 선언했습니다. 그래도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공산권 국가들은 참여했고, 12년 만에 온전히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개최된 성공적인 올림픽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3. 이데올로기에서 이어진 ‘선수 흠집 내기’
이런 보이콧 외에도, 양국의 매스컴은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흠집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지금도 미국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 잡지인 <Sports Illustrated>에선 올림픽에 출전한 소련 선수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인간적인 단어를 선택해 보도했습니다. 소련의 전체주의로 학대당하고 있다며, 부정적인 메시지와 함의를 담았죠.
영양사의 감시 아래 하루 5천 칼로리의 음식을 쑤셔 넣었다.
- Ezra Bowen and George Weller, “The 1956 Winter Olympics,” Sports Illustrated 20(Jan, 1956), p. 27
또한 소련의 여성 운동선수들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유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생물학적 성에 기초한 남녀 차별은 몇 세기에 걸쳐 약화되어가는 추세였지만, 스포츠 분야에서는 영향력이 미미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언론 매체는 뛰어난 기량을 보인 소련 여성 선수들을 여성으로서의 성 정체성을 포기한 집단으로 그렸습니다. 일례로 1970년 7월 2일 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습니다.
미국에서 여성 육상 종목의 발전이 더딘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타마라 프레스와 같은 선수들이 선수로 뛰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성이라기보다는 남성으로서의 특징을 더 많이 갖고 있다. 그녀의 사진을 본 미국의 부모들은 그들의 딸을 수영이나 다른 종목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 Los Angeles Times, 2 July 1970, E2
소련 여성 운동선수들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의심은, 그들이 올림픽에서 보여준 기량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폄훼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육체를 공산주의 체제의 실패의 상징으로 활용하고, 성 질서를 파괴하는 이들처럼 그린 것이죠. 어떻게 보면 체제의 비인간성을 드러낸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소련의 전략은 달랐습니다. 자국의 매체를 통해 자국 선수들의 우월성을 홍보하려 했습니다. 소련의 스포츠 선수들은 단지 운동능력이 뛰어나 뽑힌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해서 국제무대에서 체제의 대표자 역할을 수행하는 일명 ‘운동복의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죠.
정리해서 말하자면 미국은 소련의 선수를 ‘인간 기계, 로봇’으로 묘사했습니다. 반면 소련 매체는 이들을 조국의 영광을 위해 분투하는 전사’라고 표현했죠. (※ Mertin, “Presenting Heroes,” p. 476)
올해 베이징 올림픽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1월 25일 중국 선수단의 출정식이 그런 성격을 반영합니다. 당시 선수단 이런 구호를 외쳤습니다.
영수에게 보답하기 위해 목숨을 걸자. 일등을 다투고 패배는 인정하지 않는다. 총서기와 함께 미래로 가자!
여기에서 영수와 총서기는 모두 시진핑 주석을 의미합니다. 냉전 체제의 소련 스포츠 선수단과 거의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죠.
4. 올림픽이 평화를 위한 공간이 될 수는 없을까?
물론 소련 선수와 개인적으로 조우한 미국 선수들의 반응은 양국의 딱딱한 반응과는 달랐습니다. 1952년 올림픽 선수촌의 소련 대표 팀을 방문한 이들의 반응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결국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소련 선수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죠.
선량한 마음을 가진 귀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감사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이러한 모습에서 미국의 언론매체가 그리는 바와 같이 고립적이고 폐쇄적인 소련 선수들의 이미지믐 찾아볼 수 없었죠. (※ John Bale, “’Oscillating Antagonism:’: Soviet-British Athletics Relations, 1945-1960,” in East Plays West, p. 95)
분명 올림픽에는 정치적 목적과 이데올로기가 짙게 담겨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까지 그 과열된 양상과 분쟁에 동참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올림픽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올림픽을 보는 사람들이 도전과 의지, 평화를 믿는다면 올림픽은 정말로 그런 장소가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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