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습니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은 ‘검은 호랑이’ 띠의 해인데요.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움츠러드렀던 각종 활동들이 다시 재개될 수 있을 듯한 설렘과 더불어, 대선도 목전에 두고있는만큼 여러모로 기대가 되는 해입니다. 임인년은 60년마다 찾아온다고 하는데요. 과연 N년전 임인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희망찬 2022년을 기대하며, 이번 기사에서는 1902년과 1962년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02년 3월, 최초 공중전화 개설
한국 첫 전화 통신의 역사는 궁에서 시작했습니다. 전화를 활용한 통신이라는 것이 민간에 닿지는 못했던 것이죠. 그렇게 궁에 전화가 설치된 지 6년이 지난 후, 1902년 3월 20일에 최초의 공중전화가 개설되었습니다. 기존 관용 전화와는 다르게 일반 국민들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교환시설을 갖춘 관소인 전화소는 1902년 한성(서울)전화소와 인천전화소에서 시작해 개성전화소의 개설로 이어졌습니다.
이듬해에는 평양과 수원, 한성전화소 산하인 서울 경교, 도동, 마포, 시흥 등 9개소로 늘었습니다. 전화소 개설이 증가함에 따라 개인전화 가입자 수도 80여 명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05년 4월 ‘한일 통신협정’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조선은 통신 사업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맙니다. 이로 인해 민간 전화사용의 80% 이상은 일본인이 차지하게 되는데요. 게다가 나머지 전화는 정부 부처와 신문사, 극장 등에서 관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전화 사용은 매우 제한적인 환경에 처해있었다고 합니다.
1902년 5월, 중명전(수옥헌) 중건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보면 중명전이라는 건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중명전의 원래 이름은 수옥헌인데요. 이곳의 본래 목적은 1899년에 지어진 황실 도서관이었습니다. 귀한 서책이 숱하게 있었다는 수옥헌은 지은 지 2년 후인 1901년에 화재로 전소되었습니다. 이에 1902년 5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구성된 서양식 벽돌건물로 새롭게 지어졌습니다. 지금 볼 수 있는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이 바로 이 시기에 완성된 것입니다.
수옥헌은 단순 황실 도서관의 역할만 수행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의 운명이 바뀌게 된 어두운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1904년 경운궁에 대화재가 발생한 후, 경운궁에 머물던 고종은 수옥헌을 임시 거처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수옥헌의 이름을 중명전으로 다시 짓게 됩니다. 이름이 바뀐 중명전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되는데요. 외교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시작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돌담길을 걷다 마주하는 이 건물을 보며 누군가는 암울한 역사의 현장으로 볼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엔틱한 건물로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격동의 시기를 동여맨 고군분투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건물이 주고 있는 묘한 분위기가 21세기의 시선에서는 또 다른 역사를 덧입혀주는 느낌이 드는데요.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과는 달리, 경운궁 주위의 분위기는 대한제국만의 색깔을 볼 수 있는 듯 합니다.
1962년 1월, 단기에서 서기로 변경
새해가 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달력이나 다이어리를 펼치는 일일 텐데요. 지금의 우리가 2022년으로 부르고 있는 ‘2022’ 라는 숫자는, 해의 차례를 나타내기 위해 붙은 ‘연호’라는 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연호는 바로 ‘서기’입니다. 우리나라가 서기를 공식적인 연호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1962년 1월 1일부터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이 해방이 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같은 해 9월 25일 공포된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는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고 하여 단군기원(檀君紀元)이 국가적인 공용연호로 채택되었습니다. 하지만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때를 1년으로 하는 단기는 외국과의 교류 등에서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국내 문서에서는 단기를 쓰다가도, 외국 문서에서는 서기를 쓰기도 하였고, 또 어떤 국내문서에서는 단기와 서기를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1961년 정부는 국제적인 공통 연호를 사용한다는 취지로 연호를 서력기원으로 바꾸는 법을 통과시켰고, 1962년부터 공식적으로 단기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서기로 해를 세는 방법은 빠르게 정착하여 현재 2022년에 이르고 있는데요. 만약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단기를 사용하고 있었다면, 올해는 4355년이었겠네요!
1962년 6월, 화폐개혁
박정희 정부시기에는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장이 눈에 띄는 시기입니다. 급진적인 개혁에는 항상 혼란과 불안이 함께 동반되기도 하죠. 그 중 1962년의 ‘화폐개혁’은 대한민국의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야기시킨 군사문화의 전형적인 정책과정이었다는 평을 받고있습니다. 우선 화폐개혁이란, 정책적 혹은 경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존 화폐 유통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화폐로 교환하는 조치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인위적으로 화폐의 가치를 조절할 수 있게되는데요. 1962년의 화폐개혁은 자립경제확립이 필요했던 시기에 적극적인 자금 조달책이 필요했고, 침체되어있던 경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원’이라는 화폐단위를 사용하고 있죠? ‘원’ 이전에는 ‘환’이라는 단위가 존재했습니다. 1962년의 화폐개혁을 통해 10환을 1원으로 조정하였고, 환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했습니다. 또한 금융기관의 신규예금과 기존예금 모두 봉쇄계정으로 동결시킵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걸까요? 바로, 구권을 신권으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숨어 있는 돈이 드러나게 되면 경제 활성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숨어 있던 돈은 정부가 예상했던 금액보다 터무니 없이 부족했을 뿐더러 예금동결로 돈이 은행이 묶이게 되자, 산업활동이 위축되어 결국 시행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철회되고맙니다. 이렇게 1962년의 화폐개혁을 철저한 실패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은 수출 중심인 외생적 경제정책으로 방향을 잡게되었고, 현재의 원화표시 화폐경제의 출발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1902년과 1962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짧게 살펴보았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돌아보는 과거의 임인년은 단어 몇 자, 문장 몇 줄로 설명이 되지만 그때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글로는 설명못할 각종 희로애락의 순간들로 가득했겠죠? 과연 2022년 올해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우리는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 시대를 3년째 견뎌내면서도, 이제는 꽤나 묵묵하고 씩씩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롭게 맞이하게 된 2022년 임인년에는 각자의 소망에 한 걸음 더 정진하는 날들이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원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브런치 / 글·기획 | 한걸음기자단 8기 정민경
참고 자료
- 국가기록원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문화재청, 「100년 전 역사를 열어 중명전(重明殿)을 다시 보다.」
- 한국은행, 『1950년 한국은행 창립이후 대한민국의 화폐』
이 필자의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