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능력의 저하, ‘한자 교육 중단’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지난 11월 중순에 인터넷에서 《조선일보》 기사 「‘무운을 빈다’… 이게 뭔 소리? 검색창이 난리 났다」를 읽었다. 부제는 “국어사전 명사 80%가 한자어… 한자 의무교육 중단 20년이 부른 풍경”이다. ‘한자어’니, ‘의무교육’이니 뻔한 레퍼토리여서 어떤 기사인지를 단박에 눈치챘다.
기사는 ‘한자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점차 늘면서 벌어지는 일’ 몇을 소개하면서 그게 다 ‘한글 전용’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젊은이들이 ‘무운(武運)’을 ‘운이 없음[무운(無運)]’으로 이해하고, 도쿄올림픽 여자 양궁 ‘9연패(連霸)’ 기사를 두고 댓글에 ‘우승했는데 연승이 아니고, 연패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이어갔다는 얘기다.
원인은 정말 ‘한자’를 안 배워서일까
문제가 심상치 않은 것은 맞다. 그러나 원인을 ‘한자 교육 중단’에서 찾는 건 ‘역시나’고, 아직도 제호를 한자로 늠름하게 쓰고 있는 ‘1등 신문’다운 처방이다. 잊을 만하면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논란, ‘한자 교육론’ 말이다.
‘한글전용에관한법률’이 제정된 건 1948년이었지만, 1963년에서 1971년까지는 교과서에 국한문을 섞어 썼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라는 단서 규정에 따라서다. 2005년 ‘국어기본법’이 제정되며 ‘한글전용에관한법률’은 폐지되고, 해당 규정은 국어기본법으로 이전되며 약간 보완되었다.
국어기본법은 완전한 한글전용이라기보다는 보조어 병기를 일정 부분 허용한다. 또 이 법은 사적 문서의 한글전용을 강제하지는 않는다. 한글전용이 정착하면서 일간지에서 한자를 쓰지 않게 된 것은 1988년 창간된 《한겨레》부터였다. 어느덧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한글전용 《한겨레》에서 기사 읽기가 불편하다는 독자는 없다.
그런데도 잊을 만하면 국어 능력의 저하가 한자 교육 중단에 따른 문제라고 강변하는 이들이 있다. 적지 않은 학자와 국회의원들이 이러한 민원을 받아들여 한자 교육론을 부르댄다. 2011년에는 ‘한자교육기본법’을 제정하려고 국어기본법의 일부 개정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되는 일까지 있었다.
국어기본법의 “국어란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국어를 말한다”는 조항을 “국어란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글과 한자로 표기되는 한국어를 말한다”로 바꾸자는 개정안이었다. 국어를 정의하는데 난데없이 중국 문자를 들먹인 까닭은 그래야 한자를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국어’ 개념을 정의하는 데 다른 나라 글자를 불러온, 이 법안에 서명한 이는 22명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현재 현역 국회의원도 적지 않다. 물론 그 ‘다른 나라 글자’는 1천 년 넘게 국자를 대신한 문자이긴 했다. 그러나 한글만으로도 완벽한 문자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지금, 다시 ‘한자의 보조’를 국어의 정의에 명시하자는 제안은 얼마나 몰 주체적인가.
40년째 교과서 한자 병기 주장
초등교과서에 한자를 함께 적자는 주장은 무려 40년째 해묵은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 제안은 한글학회를 비롯한 한글 관련 단체, 한글전용에 찬성하는 시민과 교사 등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좌절되었다. 한자 병기 주장이 ‘한글전용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글로만 써서 “올바른 이해와 표현에 어려움이 있었나. 문장력과 사고력이 저하되었나. 세대 간 의식 차이가 심화되었냐”라고 하는 한글학회의 반문에 이들은 아무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
2012년 학부모와 대학교수, 한자·한문 강사 등이 “공문서의 한글전용 작성을 규정한 국어기본법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으나, 2016년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이 법 규정을 합헌으로 결정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기사가 전하는 내용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 기사가 전하는 현상의 원인이 《조선일보》가 단언하는 바와 같이 한자 교육의 중단이라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자를 알면 어휘가 늘고 문해력이 높아질까?
대체로 한자 교육의 효과를 굳게 믿는 이들은 한자를 알면 낱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어휘가 늘고 문해력도 높아진다고 믿는다. 이는 교육 종사자는 물론 일반 학부모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울까?
《조선일보》 기사는 ‘팩트’부터 틀렸다. “국어사전 명사 80%가 한자어”라고 했는데, 묵은 정보다. 국립국어원이 2010년 발간한 「숫자로 살펴보는 우리말」에서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표제어 약 51만 개 가운데 한자어의 비율은 58.5%다. 고유어는 25.5%로 한자어의 절반 이하다.
물론 고유어보다 한자어가 많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한자를 배워야 하는 근거가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이미 귀화어가 되어 한자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한자어도 적지 않다.
훈(訓)으로 뜻을 새길 수 있는 한자어도 제한적이다. 비근한 예로 ‘선생(先生)’과 ‘제자(弟子)’는 각각 ‘먼저 태어난 사람’, ‘아우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치매(癡呆)’도 ‘어리석다’라는 뜻 두 개가 겹치는 구조다. 개별 글자의 훈을 묶어서 낱말의 의미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한자 공부가 도움이 된다고 믿는 이들은 낱말 의미의 인식에서 한자 뜻을 새기는 과정이 ‘선행’하는 것으로 상정한다. 이를테면 ‘학교’라는 낱말은 ‘배울 학, 집 교’를 묶어서 뜻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낱말의 뜻을 그렇게 분절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개별 글자의 훈보다는 낱말 덩어리 채로 기억 속에 이를 저장한다. 낯선 어휘는 글과 대화의 맥락을 살펴서 그 뜻을 새긴다. 정작 한자 뜻을 새기는 것은 부수적인 확인 과정일 뿐이다. 나는 교과서에 국한문을 섞어 쓴 1963년에서 1971년까지 초중학교를 다녀 한자가 낯설지 않다. 한자어의 훈으로 낱말의 뜻을 살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성인이 된 뒤였다.
빛깔을 가리키는 ‘연두’나 ‘고동’은 한자로 ‘연두(軟豆: 완두콩처럼 연한 콩)’, ‘고동(古銅: 헌 구리)’으로 쓴다. 우리는 대체로 이들 낱말의 뜻을 한자와 상관 없이 기억하고 인식한다. ‘연두’나 ‘고동’의 뜻을 일러주면 사람들은 그게 한자였냐고 반문한다. 한자를 몰라도 연두나 고동의 빛깔을 분명하게 알듯, 한자와 상관없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낱말을 알고 있는가!
국어 능력 저하의 원인은 따로 있다
우리는 새로운 낱말을 만나면 사전을 뒤져 그 뜻을 새기는 게 아니라, 그 낱말이 쓰인 맥락을 살펴서 그 내밀한 뜻을 새긴다.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선험적 지식도 그 뜻의 이해를 돕는다. 형식적 표지에 불과한 한자의 훈에 의존한 낱말 뜻의 파악이 일면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자에 익숙한 50대 이후의 기성세대에게는 한자가 친숙한 문자 체계고 그 함의를 통해 어휘력을 늘려온 경험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전혀 다른 문자관(文字觀)을 익히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강요할 일은 아니다.
이제 아이들에게 한자는 영어나 프랑스어처럼 외국어가 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자 쓰기는 우리말로 풀이하는 번역과정을 하나 더 늘리는 일일 뿐이다. 이미 머릿속에 ‘학교’의 의미를 새겼는데, 새삼스레 ‘배울 학, 집 교’를 덧붙이는 것은 사족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무운(武運)’을 ‘무운(無運)’으로 잘못 읽거나, ‘갹출(醵出)’ 앞에 얼어붙는 이유는 한자를 배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언어생활이나 독서 경험 등으로 그 낱말을 겪고 써보지 못해서로 보는 게 훨씬 사실에 가깝다. ‘N빵’이나 ‘가부시키(株式, 일본어로 ’나눠 내기‘)’를 알아듣는 것은 그게 생활 속에서 습득한 낱말이기 때문이다. 낱말은 말과 글로 씀으로써 온전히 화자의 것이 된다.
국립국어원의 2013년 ‘국어 능력’ 평가에서 과반수(54.7%)가 ‘기초 이하’로 나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언어생활에서 제대로 활용함으로써 국어 능력은 심화·확장한다. 문해력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쓰는 능력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언어를 알맞게 활용하고 그 의미를 새길 수 있는 능력이다. 국어 능력의 저하가 한자를 몰라서라고 부르대는 일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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