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가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
디지털이 세상을 집어삼킨다. 2000년대의 ‘디지털’이 그저 가전/컴퓨터 카테고리 중 하나에 불과했다면, 모바일 시대인 2010년대의 “디지털”은 세상 모든 것들의 길목에 위치하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제품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포노사피엔스와 자신들의 제품을 연결하려 힘썼고, 그 결과 쿠팡 같은 매머드급 이커머스와 카카오택시나 배달의민족처럼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연결하는 O2O(Offline to Online) 서비스가 전성기를 맞았다.
2020년대의 “디지털”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많은 사람이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며 ‘다가오는 2020년대는 ART(AI & Robotics Tech)의 시대가 될 것’이라 예측한다. 하지만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지 벌써 5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사람을 능가하는 인공지능(AI)을 찾기란 요원한 상태이다. 특히 산업현장에선 여전히 인공지능이 아닌 사람이 모든 일을 처리하고, 고객들 역시 인공지능에 가치를 느껴 돈을 쓴다기보단 여전히 명품 같은 제품과 오프라인 서비스에 돈을 쓰는 모습이다.
왜 아직도 사람들의 일상에서 인공지능을 찾아보기 힘든 것일까? 그 이유는 아직 세상의 많은 부분이 ‘디지털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업 자체가 디지털화하지 않으니 디지털을 통해 쌓이는 데이터가 없고, 데이터가 없으니 데이터를 먹고 사는, 즉 다량의 학습데이터를 필요로 하는 인공지능이 발전할 기회도 없었다.
비록 이커머스와 O2O 서비스가 디지털과의 접점을 손쉽게 만들어 준다고는 하지만, 네이버와 카카오의 플랫폼 안에서 활약하는 기업이 되지 않으려면 결국 자체적으로 디지털로 거듭나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이 바로 당신의 기업에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 DX)이 필요한 시점이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왜 해야 할까?
많은 기업이 ‘트렌드가 그렇다니까’ ‘일류 기업들이 그렇게 하니까’ ‘기술이 중요하다니까’라며 맹목적으로 디지털 기술을 도입한다. 기업의 오너가 어느 조찬 강연에서 DX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지시를 내렸을 수도 있고, 어떤 임원이 자신을 책임질 미래 화두는 디지털이라며 무대포로 아래 직원들에게 밀어붙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목적 없이 시작한 DX 프로젝트는 단발성 외주 프로젝트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DX는 매우 큰 인내심과 끈기를 필요로 하는 장기적인 프로세스 재정립 과정이다. 따라서 DX의 지난한 과정을 끝까지 버티려면 DX를 해야 하는 목표 의식과 이를 추진하려는 의지가 경영진부터 말단 직원까지 충만해야 한다.
따라서 ‘왜 DX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고 전사적 합의 과정이 없는 DX는 대부분 실패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Why DX?”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DX를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고객이 원하기 때문’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탈레스 테이셰이라 교수는 책 『디커플링(Decoupling)』에서 시장 파괴(Market disruption)의 주범이 기술도, 데이터도 아닌 바로 ‘고객’에 있음을 밝혔다.
카카오택시를 예로 들어보면 택시업계의 혁신이 스마트폰의 출현과 배차 기술(Ride scheduling technology)의 발달로 촉발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 때문이 아니라 ‘고객이 승차 거부 없이 간편하게 택시를 잡고 싶었기 때문에’ 혁신이 촉발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고객의 니즈가 없었다면 아무리 뛰어난 기술로 제품을 만든다 한들 지금처럼 폭발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숙박업계의 DX도 마찬가지이다. 편리한 객실 관리 시스템이 나왔다거나 데이터 기반의 예약관리시스템이 객실 효율을 높여주기 때문에 DX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숙박업계의 DX가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원래부터 고객은 전화로 빈방 여부를 확인하는 시스템을 불편해했고, 때로는 프런트데스크에서 직원을 만나 객실 열쇠를 받는 과정이 민망했으며, 더 좋은 숙박업소을 예약하기 위해 검색과 비교, 리뷰 확인의 니즈가 있었기 때문이다.
‘디지털’이 이 니즈를 충족해주기에 고객들은 자연스럽게 디지털을 선택하고 이에 빠르게 적응했으며, 이런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한 에어비앤비나 야놀자가 DX로 기존 강자였던 호텔 체인을 제치고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참고로 대기업을 이길 수 있는 스타트업의 기회는 DX에 대한 적응속도 차이에서 발생한다. 디지털 기술은 매우 빠르게 발전하는 한편, 대기업이 일하는 방식은 빠르게 변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편리함을 쫓는 속성을 가진 소비자는 빠르게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에 쉽게 적응한다.
이때 적정기술을 채용한 스타트업이 편리함을 무기로 소비자의 선택을 바꾸면 시장 파괴가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 기업이 스타트업에 의해 고객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필연적으로 디지털로 대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DX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이유이다.
DX가 필요한 이유는 “고객이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DX의 첫 출발은 ‘우리 고객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어야 하며, 이를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디지털이 도입되어야 DX가 단발성 프로젝트가 아닌 장기적 생존의 핵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산업에 따라 어쩌면 고객이 원하는 것의 핵심이 디지털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쥐고 태어난 세대일수록 디지털이 지배하는 고객의 시간의 양이 절대적이며, 따라서 빠르게 성장하는 디지털 시장을 거부하는 것은 기업으로선 현명한 판단은 아닐 것이다.
디지털로 전환해야 한다. 그것이 소멸하는 시장이 아닌 성장하는 시장에 올라탈 수 있는 길이다. 디지털을 입은 테슬라의 기업가치가 나머지 모든 자동차 회사의 기업가치를 합친 것보다 크고, BTS의 소속사 하이브 또한 디지털을 입은 기업가치가 SM, YG, JYP의 기업가치를 합친 것보다 크며, 최근 상장한 디지털 팬덤서비스 디어유의 기업가치가 모회사인 SM과 맞먹는 것은 기업이 꼭 DX에 성공해야 할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다.
내부 고객도 디지털을 원한다
고객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부에도 있다. 공장식 제품을 찍어내던 기존의 기업들은 직원들을 공장 속 부품처럼 여기며 이들을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있다. 직원들 대부분이 어느 정도의 교육만 받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을 반복하고, 따라서 ‘대체 가능재’인 직원들에게 굳이 특별한 복지를 제공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값싼 노동력을 오래 일하게 만들어 가성비 좋은 노동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전통 기업에서의 경영이자 조직 운영의 철학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인재 경영’이란 피상적 구호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엔 뛰어난 디지털 인재의 확보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날로그 제품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고객에게 가치를 주었다면, 디지털 제품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객에게 가치를 전달할 수 있다.
쿠팡이 주는 편리함의 가치가 화려한 건물들을 보유한 롯데백화점 기업가치의 수십 배가 되는 건 그만큼 디지털의 확장성(scalability)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디지털 시장에선 그 작은 편리함의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디지털 인재의 가치가 무한히 중요하다. 인재를 공장 속 부품이 아닌 가장 중요하게 모셔야 할 “내부 고객”으로 여겨야 할 이유이다.
필자가 속한 ART Lab은 최근 서울산업진흥원(SBA)과 함께 중소기업 5곳의 DX를 돕는 컨설팅을 진행했다. 5개월의 컨설팅 후 기업들이 가장 큰 갈증을 느끼는 부분은 기술도, 데이터도 아닌, 바로 “디지털 인재 채용”이었다.
DX를 진행하려면 우선 이를 이해하고 실행할 디지털 인재가 있어야 한다. 기존 방식에 익숙한 직원들을 디지털 인재가 되도록 재교육하는 것도, 멋지고 팬시한 조직문화를 선호하는 신규 디지털 인재를 채용하는 것도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카오뱅크와 토스의 질주로 DX에 사활이 걸린 시중은행의 개발자 채용에 ‘0명’이 지원했다는 소식은 디지털 인재 확보가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해준다.
디지털 인재도 귀중하게 모셔야 할 내부 고객이다. 편리한 디지털 시스템이 있어야 외부 고객도 자연스럽게 찾아오듯, 편리한 디지털 시스템과 이에 걸맞는 조직문화가 갖춰져야 디지털 인재도 내부로 영입할 수 있다. 많은 기업이 내부적인 업무 프로세스나 조직문화는 혁신하지 않으면서 ‘개발자 뽑기가 어렵다’며 발만 동동 구르는 경우를 자주 본다. 제품을 바꾸지 않고 고객이 찾아오길 바라면 안 되는 것처럼, 내부를 DX 하지 않으면서 디지털 인재가 찾아오길 바라는 것 역시 어불성설일 것이다.
외부 고객을 위해 DX를 하려면 디지털 인재를 확보해야 하고, 디지털 인재를 확보하려면 내부에 대한 DX가 우선되어야 한다. 많은 DX 전문가가 ‘조직문화의 변화’를 DX의 핵심으로 꼽는 이유이다.
DX는 원래 오래 걸리고 어려운 일이다
사실 DX에 성공한 기업들은 그리 많지 않다. 차라리 새롭게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 기존 조직과 비즈니스를 전환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대기업이 한계를 인정하고 사내 벤처를 활성화하거나 외부 스타트업에 투자해 포트폴리오를 넓히는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오픈 이노베이션을 할 정도의 대기업이 아니라면 스스로 혁신하는 방법밖에 없다. ‘혁신 아니면 죽음(Disrupt or Die)’인 상태이다.
이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DX에 대한 경영자의 이해와 실행 의지이다. 그리고 DX를 하기로 결정했다면 사활을 걸어야 한다. DX는 내부 인원들의 혁신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회사가 되었든, 조인트 벤처가 되었든, 스타트업 M&A가 되었든, 아니면 스타트업과의 협업이나 자문/컨설팅이 되었든, 꼭 외부와 협력하며 진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혁신의 모멘텀을 잃고 다시 기존 방식으로 돌아가 DX에 투자한 자원만 낭비하는 꼴이 될 것이다.
당신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에 건투를 빈다. 외부 고객과 내부 고객의 목소리에 집중한다면 당신도 DX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