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 취재 차 국내 1호 제로웨이스트숍 ‘더피커’를 찾았다. 위치는 성수동. 우리 집에서 거리는 약 23km 떨어져 있다. 평소라면 건강과 탄소발자국을 고려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이동하지만 그날은 자동차를 갖고 갔다. 이유는 들고 갈 짐이 많아서다.
잘 씻어서 말린 우유갑, 젤이 든 아이스팩, 깨끗이 닦은 빈 유리병, 쇼핑백, 개인 정보가 적힌 송장을 뜯어낸 택배용 박스, 종이로 만든 친환경 완충재 등을 잘 분류해 차 트렁크에 실었다. 한 번이라도 더 사용되거나 재활용될 수 있도록 틈틈이 모아 두었던 물건들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파트에 분리배출 수거 차량이 오지만 위의 품목들을 따로 모아두었던 이유는 의구심이 들어서다. 우유갑을 깨끗이 씻어 말려도 종이 마대에 한데 섞이기 때문에 제대로 재활용될까 싶었다.
유리병도 마찬가지다. 유리의 재활용률을 높이려면 흰색, 갈색, 녹색 등 색깔별로 분리배출돼야 하지만 그냥 한꺼번에 마대 자루에 담아간다. 1996년 내가 처음 독일 베를린에 거주했을 때 이미 그곳엔 색깔별로 병을 분리배출해 버릴 수 있는 대형 수거함이 주택가나 슈퍼마켓 곳곳에 있었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린 왜 대단지 아파트에서조차 그런 시스템을 갖춰 놓지 않은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열심히 말린 우유갑이 100% 재생 화장지로 거듭나려면 한살림 같은 생협 매장이나 알맹상점, 더피커와 같은 제로웨이스트숍을 찾아가야 한다. 아이스팩은 지자체가 마련한 수거함에 넣으면 재사용될 수 있는데 내 손안의 분리배출 앱을 통해 설치 장소를 확인해 보니 가장 가까운 곳이 집에서 무려 3km나 떨어져 있다. 그나마 SAP 아이스팩 수거함을 설치한 자치구는 강동구, 강북구, 영등포구, 도봉구, 중구, 성동구로 전체 25개 자치구 중 단 6개뿐이다.
내가 잘 씻어 말려 기부한 유리병은 더피커에서 살균 소독을 거쳐 고객들이 깜박했거나 잘 몰라 적당한 용기를 가져오지 않았을 때 포장 용기로 재사용될 것이다. 택배용 박스와 종이 완충재는 온라인 판매 때 포장재로 재사용된다고 한다.
더피커나 알맹상점처럼 친환경 제품을 판매하고 포장재를 거부하는 제로웨이스트숍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다. 요즘 MZ 세대에서는 의미 있는 소비라는 뜻에서 친환경 제품에 지갑을 여는 미닝아웃(Meaning Out)이 새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친환경 소재로 만든 물건을 구매하고 포장재를 거부해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것이 제로웨이스트 삶의 종착역이라고 봐도 좋을까. 그렇지 않다. 소비는 그 행위 자체가 환경에 이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송경호 더피커 대표는 그보다 먼저 실행돼야 할 일을 이렇게 말했다.
친환경 제품이든 아니든 내가 갖고 있는 물건들이 그 수명을 다할 때까지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낡은 것들을 고쳐 쓰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제로웨이스트숍에서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단지 호기심에서 구입한 뒤 쉽게 버린다면 그게 무슨 소용 있겠어요? 이보다는 닳아 없어질 때까지 쓰는 것이 진짜 친환경이죠.
지속 가능한 온라인 라이프 스타일 잡지 《페블(pebble)》의 창립자 겸 편집장인 조지나 윌슨 파월(Georgina Wilson-Powell)은 『그러니까, 친환경이 뭔가요?』란 책에서 “다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은 금물”이라면서 “가진 것을 끝까지 사용하라”고 권장했다.
일회용 플라스틱에 대한 반발은 좋은 동기로 촉발됐지만 우리는 그것을 더 많은 물건을 사기 위한 변명으로 여겨선 안 됩니다. 구매하는 물건의 수를 줄이고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가능한 한 오래 쓰는 것이 가장 친환경적인 생활방식이죠. 예를 들어 쓸만한 플라스틱 식품 용기가 집에 있다면 멋들어진 ‘제로 웨이스트’ 도시락통을 사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를 만들고 싶다고 해서 자신에게 ‘운동가’라는 거창한 딱지를 붙일 필요는 없는 듯하다. 환경운동가가 아닐지라도 단순히 돈을 아끼려는 목적일지라도 절약하고 재사용하고 재활용하는 삶은 결국 지구를 보호하는 것이니까.
원문: 이로운넷 / 글: 백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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