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ale Climate Connections에 피터 글릭(Peter Gleick)이 게재한 「Book review: Bad science and bad arguments abound in ‘Apocalypse Never’ by Michael Shellenberger」를 번역한 글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몬테규 집안과 캐퓰릿 집안을 생각하면 됩니다. 아니면 1863년에서 1891년 사이, 서로 원수지간이던 웨스트 버지니아와 켄터키주의 햇필드와 맥코이 가문을 생각해도 됩니다. 환경 과학, 인구 증가, 자원 부족, 생태학 분야에서 맬서스주의자와 기술만능주의자(Cornucopian) 사이의 지난 수십 년 간의 갈등이 이와 비슷합니다.
맬서스주의자들은 영국의 경제학자인 토마스 맬서스가 이야기했던, 지구 자원의 한계는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를 뒷받침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동의하는 이들입니다. 반대로 기술만능주의자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풍요의 뿔(Cornucopia)”처럼 기술의 발전이 사회적 필요를 메꾸어줄 뿐 아니라 무한한 경제성장과 인구 증가가 더 새로운 기술의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맬서스주의자와 기술만능주의자 사이의 학술적 논쟁과 충돌은 200년이 넘도록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인간에 의한 기후 변화, 탈삼림화(deforestation), 종의 멸종, 인구 압박, 그리고 점점 심각해지는 공중보건의 위기를 중심으로 점점 더 극단적으로, 또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했습니다. 이는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위의 문제들이 가진 복잡성과 연관 관계가 더 명확해졌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지역적, 국가적, 전지구적 행동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셀렌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또한 이 논쟁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셀렌버거는 이 책을 쓴 이유를 서문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곧 비이성적이고 과장된 맬서스주의자의 재난에 대한 경고를 반박하기 위해, 우리가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 그리고 더 많은 자연 자원의 활용에 주력한다면 이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술만능주의를 강조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입장의 허먼 칸, 줄리안 사이먼, 비외른 롬보르의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도가 지나친 기후변화 담론(?)
셀렌버거는 자신을 환경주의 행동주의자이자 “긍정적, 인간적, 이성적 환경주의의 적인 과장과 경고를 일삼는 극단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사실과 과학을 세상에 전달하는 이로 소개합니다. 그는 “지난 몇 년 사이에 기후변화에 대한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이 도를 지나치기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지구가 처한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는 논쟁적 주제에 이성적 목소리와 명확한 분석을 추가하는 것은 늘 환영할 일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은 심각한 오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선 이 책에는 수많은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가 등장합니다. 셀렌버거는 과학자, 교육받은 엘리트, 언론인 활동가, 저명한 환경주의 행동가들이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틀린 사실을 믿을 뿐 아니라, 그러면서도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응책인 원자력 에너지와 끝없는 경제발전을 거부한다고 주장합니다.
설사 그가 지금 지구가 처한 위기의 본질과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물론 그렇지 않지만) 제대로 된 과학적 결과를 제시한다고 하더라도(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논리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기술만능주의자가 가진 과도한 단순화, 곧 경제 성장과 이에 따라 등장할 만능의 기술에 모든 것을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언론인이자 작가였던 H. L. 멩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에는 잘 알려진 해결책이 늘 존재한다. 바로 멋지고, 그럴듯한, 그러나 틀린 해결책이다.
멩켄은 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확하게 안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는 기후 위기나 팬데믹, 환경 변화와 같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문제에 대해 정확히 필요한 충고일 것입니다.
잘못된 과학의 적용, 허수아비 때리기, 사실의 체리 피킹, 인신공격
하지만 이 책의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저자는 여러 주제를 어지럽게 오가며 자신의 경험과 논증, 그리고 자신의 관점을 지지하는 자료만을 골라 제시하는 방식으로 독자가 그의 주장을 따라가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올바른 과학적 자세인, 데이터와 사실을 바탕으로 이론을 검증하고 주장을 확인하는 방식이 아니라 입장을 먼저 정한 다음 그 입장에 맞는 데이터와 사실만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책에는 논리적 오류와 감정적, 이데올로기적 논증, 허수아비 때리기, 사실의 잘못된 사용과 선택적 체리 피킹, 그리고 과학적 오류와 실수가 곳곳에 존재합니다. 게다가 이 책은 과학자들과 환경주의자들, 언론에 대한 볼썽사나운 인신공격으로 점철된, 분노로 가득 찬 책이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 이 책의 오류 중 몇 가지만 지적하려 합니다. 아마 모든 오류를 지적하려면 책을 한 권 새로 써야 할 것입니다. 짧게 말해, 이 책에서 새로운 내용은 틀렸고, 옳은 내용은 이 책이 처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의 핵심에는 기술만능주의의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장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환경의 문제는 가난의 결과일 뿐 모든 이가 부유해지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많은 이가 이미 논파한 바 있습니다. 여기 여러 예가 있습니다.
- The Bankruptcy of Economics: Ecology, Economics and the Sustainability of the Earth
- Resource Insights: Why It’s Hard to Debate a Cornucopian
- No Middle Way on the Environment
원자력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주장
두 번째 주장은 셀렌버거가 예전부터 해오던 것으로, 기후 및 에너지 문제는 원자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태양광이나 풍력이 아닌 원자력만이 값싸고 안정적인, 풍부한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하며 “원자력만이 인간의 환경 발자국을 줄이면서 고에너지 문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원자력에 대한 경제적, 환경적, 정치적, 사회적 반론을 그는 들을 가치가 없다고 단순하게 무시합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 폐기물은 전기 발전에 따른 폐기물 중 가장 안전한 최선의 폐기물에 해당한다. 이 폐기물은 아직 누구도 해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원자력만이 (어쩌면 아프리카 콩고강에 건설을 주장하는 초대형 댐까지) 기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이라 주장하며, 이는 (그가 “신뢰할 수 없는”이라 부르는) 재생 에너지가 규모도 작고 간헐적이며, 경제적, 환경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있다는 주장으로 뒷받침됩니다.
가난과 환경 문제가 서로 엮여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이는 국제 개발의 기본 상식으로, 초기 UN밀레니엄개발목표(United Nation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와 지금의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에도 다음과 같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지속가능발전목표는 모든 이들이 더 나은, 더 지속 가능한 미래를 가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난, 불평등, 기후 변화, 환경 파괴, 평화와 정의라는 전지구적 위기의 고려가 필요하다. 이 17개의 목표는 모두 서로 엮여 있다.
주류 환경과학과 환경경제학은 다양한 에너지원에 복잡한 환경적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고려했습니다. 에너지 위기평가, 통합환경시스템분석, 생태경제학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문제를 다루어왔습니다.
수많은 허수아비 때리기
셀렌버거는 다른 문제에도 계속 허수아비 때리기 논법을 사용합니다. 허수아비 때리기란 상대의 진짜 주장이 아닌 다른 주장을 만들어놓고는 이를 논파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기후 변화 논쟁에서 가장 흔한 허수아비 주장은 과학자들이 기후변화가 최근 극단적인 기상 사태의 “원인”이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후과학자들은 “원인”과 “영향”의 차이를 철저하게 구분합니다. 이는 “귀인 과학(attribution science)”이라는, 오늘날 기후 연구의 가장 활발한 분야입니다.
셀렌버거는 사람들이 최근의 극단적인 기상 사태(산불, 홍수, 폭염, 가뭄)의 원인을 기후변화로 돌린다는 허수아비 주장을 세운 뒤, 이 주장을 반박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이가 캘리포니아 산불의 원인으로 기후 변화를 지목한다”고 한 뒤 “호주의 산불은 호주의 기온이 오르지 않았더라도 발생했을 것이다”라는 식입니다.
그가 2019년 아마존 산불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인용하며 언론이 화재를 어떻게 보도하는지에 관해 쓴 내용에도 오류가 있습니다. “아마존 산불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산불은 기후 변화 때문이 아니다’라고 제대로 보도했다”. 하지만 셀렌버거는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을 고른 것입니다. 실제 기사를 찾아보면 바로 두 문장 뒤에 “영향”이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이 산불들은 기후 변화 때문이 아니다. 크게 보면 인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기후 변화가 산불을 더 크게 만들었을 수 있다. 높은 기온과 건조한 공기는 산불을 더 뜨겁게, 그리고 더 빨리 퍼지게 만들 수 있다.
셀렌버거는 기후 변화와 극단적 기상 사태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연구 또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의 “기후 변화는 아직 이런 다양한 극단적인 사건들의 빈도를 증가시키지 않았다”는 주장은 15년 전 발표된 연구로 이후 많은 연구가 추가되었습니다. 실제로 허리케인, 폭염, 홍수, 빙하 소멸 등의 극단적인 사건과 기후 변화 사이의 강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들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예를 들어 2019년 미국기상학회(AMS)는 13개 국가의 과학자 121명의 연구를 포함한, 2018년의 극단적인 기상 사태 분석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미국 서부의 극심한 가뭄과 이베리아반도와 북동아시아의 폭염, 미국 중부 대서양 주의 폭우, 베링해의 기록적으로 낮은 빙하의 크기 등이 극단적인 기상 사태의 예였으며, “이들은 인간에 의한 기후 변화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AMS의 편집장인 제프 로젠펠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100건 이상의 귀인 연구를 게재했고, 이 분야의 과학적 정당성을 보였다. 귀인 연구는 실제 세상의 복잡성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점점 더 유용해지고 있다. […]
이 연구들은 기후 변화에 인간의 영향이 있음을 다른 무엇보다도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셀렌버거는 생물종의 멸종에 관해서도 심각한 개념적 오류를 보입니다. 이를 다룬 장에는 멸종률, 생태계와 생물학적 기능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지질학적 시간 척도 개념, 그리고 데이터의 오용이 한데 뒤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셀렌버거는 종 부유도(richness)와 종 다양성(biodiversity)을 혼동하고 황당한 주장을 펼칩니다. “외래종(invasive species)은 실제로 세계의 섬 지역 종 다양성을 평균적으로 두 배가 증가시켰다. 새로 도입된 식물종의 수는 멸종된 식물의 수의 100배가 넘는다.”
이 논리에 따르면 10종의 고유종 조류가 살던 섬에 이들이 모두 멸종하고 20종의 외래종 조류가 들어왔을 때 그 섬의 ‘종 다양성’은 두 배로 증가한 것입니다. 이런 모순은 그 자신이 인용한 연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숫자만을, 종 다양성이 아닌 종 부유도만을 보았기 때문이며, 외래종이 고유종을 멸종시키고 생태계 안전성을 약화하며 동식물을 균질화하는 등의 종 다양성에 미치는 악영향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근거들을 취사선택하거나 오해, 남용한 고전적인 오류들도 있습니다. 셀렌버거는 자기 자신을 감정적 논증이 난무하는 분야에서 과학과 사실을 전달하는 백기사로 그립니다. “이 책의 모든 사실, 주장, 논증은 최신 과학 연구 결과에 기반해 있다. […]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이를 무시하는 정치적 우파와 좌파로부터 주류 과학을 보호한다.” 하지만 그의 논증에는 근거의 부적절한 사용과 이제는 유효기간이 지난 연구 결과, 자신에게 유리한 연구 결과만의 선택적 사용, 오해, 명백한 실수 등이 가득합니다.
가장 흔히 나타나는 잘못된 용어 사용의 예 중에는 “할 수 있다(can)”, “할 수 있었다(could)”, “할 것이다(will)”, “하게 될 것이다(will likely)” 등이 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고전적인 기술만능주의의 낙관주의를 드러내며 진짜 근거에 의한 주장이 아닌 긍정적으로 윤색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식량 생산의 경우,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는 다양한 기후변화 시나리오 하에서도 식량 생산은 현격히 증가할(will)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모든 가능한 기후변화 시나리오 하에서 정말로 식량 생산이 확실히 늘어난다면 이는 참으로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다음의 2018년 FAO의 보고서를 잘못 옮긴 것입니다.
기후변화는 이미 농축수산물의 생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며, 그 영향은 저소득 및 중소득 국가에 더 심각하다. 이러한 효과는 21세기 내내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
기후변화는 특히 지속 가능하지 않은 농업 방식에 있어 더 많은 농지와 물을 사용하게 할 것이며,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특히 불공평하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는 식량 가용성과 접근성에 모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책에는 그가 과학적 근거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단순히 “할 것이다(will)”를 이용해 자신의 낙관주의로 대체한 수많은 예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학자의 말을 잘못 옮긴 예들
셀렌버거가 든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주장의 근거도 잘못 인용한 것입니다. 그는 “맬서스주의자들은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폭탄을 뒤섞는 전략을 애용한다”고 말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주장으로 폴 에를리히와 앤 에를리히, 존 홀드런이 1977년 출판한 『에코사이언스(Ecoscience)』를 이야기합니다. 셀렌버거는 이 책에 서술된 다음과 같은 확실한 사실을 인용합니다.
대형 원자력 발전소의 장수명 방사능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1,000배에 달한다.
하지만 이 문장이 발전소를 폭탄에 비유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그 비유는 틀렸다. 발전소는 폭탄처럼 폭발하지 않는다.” 셀렌버거는 이를 통해 ‘맬서스주의 환경론자’들은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폭탄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는 허수아비를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인용한 문장의 바로 앞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경수로나 열중성자로가 원자폭탄처럼 폭발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는 그가 에를리히와 홀드런의 저작을 오해한 예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몇 문단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홀드런과 에를리히들은 가난한 나라들의 비료 사용 확대와 공업화된 농업에 반대하기 위해, 그리고 기근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화석 연료가 부족해질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는 이들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내용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홀드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환경주의자들은 에너지가 바닥날 것이라 주장한 것이 아니라 환경이 바닥날 것이라 주장한 것이다. 이는 사용 가능한 공기, 물, 흙,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생물군이” 화석 연료가 환경, 사회, 건강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바닥나리라는 뜻입니다.
“그린피스가 아니라 탐욕이 고래를 구했다”는 셀렌버거의 주장에도 오류가 있습니다. 그는 펜실베니아에서 발견된 값싼 석유가 고래를 멸종으로부터 구했다고 주장합니다. “드레이크 웰의 석유 발견은 등유 생산으로 이어져 […] 고래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 페이지 뒤, 그는 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고래 사냥은 다시 훨씬 더 큰 규모로 재개되었다. 1904년에서 1978년, 고래잡이들은 100만 마리의 고래를 사냥했고 이는 과거의 세 배에 달하는 수이다.” 그는 값싼 식용유(아이러니하게도 콩고의 삼림을 벌채하고 만들어지는 것도 같은 팜유입니다)가 고래를 구했다고 말하고서는, 이후에도 고래가 더 많이 사냥당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고래사냥이 오늘날 거의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시장의 힘도, 에너지원의 발견도, 그가 주장한 것처럼 “탐욕”이나 경제 성장 때문도 아닙니다. 바로 환경 운동가들과 대중의 운동에 의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특이하게도 그는 마지막 장에서 이를 인정합니다. “더 나은 대안을 선택함으로써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있어 대중의 태도와 정치적 행동은 의미가 있다.” 이는 정확히 그린피스와 같은 환경 운동 집단이 해온 일입니다.
과학적 불확실성과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다르다
셀렌버거는 과학에서 말하는 “불확실성” 개념 또한 잘못 이해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단어를 “우리는 모른다”가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의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그는 빙상과 삼림의 손실, 아마존의 생물종 멸종, 해류의 변화와 같은 파국적인 재해의 임계값을 두고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들 재해가 가진 높은 불확실성과, 이들이 동시에 일어나므로 인해 생기는 복잡성은 이들 시나리오가 말하는 임계값에 대한 논의 자체를 비과학적으로 만든다. […] 소행성의 충돌이나 초대형 화산의 폭발, 극도로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의한 팬데믹과 같은 여러 가능한 재해 중 어느 하나가 발생할 가능성이 다른 것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틀렸을 뿐 아니라 별로 위로도 되지 않는 말입니다.
첫째, 불확실성이 크다는 것은 ‘비과학적’인 것과 다릅니다. 둘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와 다른 이들은 이러한 전지구적 재해의 위험도를 평가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이를 제외하지도 않습니다. 특히 우리의 대응이 너무 늦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을 떠난 기후학자인 스티븐 슈나이더는 다른 기술만능주의자의 이런 주장에, ‘두꺼운 꼬리’를 가진 확률분포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위기가 일어날 확률을 대비하는 일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학계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제안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높은 수준의 가능성을 가진 재해를 과학계가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즉 과학자들이 기후 위기와 같은 재해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들이 “종말론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책임감을 가지고 과학, 경제학, 공공정책, 공공보건의 맥락에서 논의돼야 하는 위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논리 오류 중에는 상대의 논증을 반박하기 위해 상대방 개인이나 그의 동기를 공격하는 인신공격의 오류가 있습니다. 이 책에 수없이 등장하는 인신공격의 오류는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신뢰를 떨어뜨릴 정도입니다. 셀렌버거는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은 가난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심지어 아예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며 콩고강의 거대한 댐에 반대한다고 공격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브라우어같은 환경주의 지도자나 주요 환경주의 단체의 재정을 공격하며, 이들이 화석연료 회사로부터 돈을 받아 “원자력 발전소의 폐쇄가 친환경적인 것처럼” 꾸민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또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수많은 환경주의자와 지구물리학 과학자들의 동기와 평판을 공격합니다.
정말 언론과 환경 과학자들이 ‘인류애’에 반대할까?
셀렌버거의 언론에 대한 반감은 특별합니다.
뉴스 미디어, 편집장, 언론인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환경 문제에 대한 공포감 조성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자신의 신념과 정의, 진실에 대한 직업적 책임감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환경운동가들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언론인으로 위장해 이러한 보도 방식을 유지하려 노력할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나는 소셜미디어와 같은 전통적 언론의 외부에서 이런 환경 문제를 보도하는 방식에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이들에 대항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인류에 혐오감을 가진 이들이라 공격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에너지 사용량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것과 같은 즉각적이고 급진적인 기후변화 대책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종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기후변화 활동가, 언론인, IPCC 과학자 등의 주장을 접하면 그들이 진정한 인류애를 가졌거나,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되는 무언가를 가진 게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문명과 인류 그 자체를 위해 맬서스주의자와 종말론적 환경주의자와 싸워야 한다.
그는 결론에서 환경적 재해를 걱정하는 이들은 “인간의 문명을 싫어하는 이들이 가지는 일종의 잠재의식이 낳은 판타지” 놀이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선호하는 대안에 반대하는 이들 또한 문명의 파괴를 바란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의 동기를 공격하는 매우 고약한 수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단순한 오류가 매우 많습니다. 물론 숫자와 인용, 주장이 많은 책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도를 넘어섭니다. 모든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일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에너지 생산에 필요한 물의 양을 나타낸 숫자가 틀렸습니다. “천연가스는 석탄보다 25–50배 가까이 물을 적게 사용한다.” 그러나 그가 인용한 문서에 나오듯, 그 숫자는 25–50이 아니라 2보다 좀 작은 값입니다.
게다가 그는 풍력이나 태양광에 모든 화석연료나 원자력보다 물이 덜 든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습니다. 기후변화와 극단적인 기상 사건에 대한 논의에서는 지구의 기온 상승과 강우량 변화가 산불이 나는 기간을 늘리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수많은 근거를 무시합니다. 그는 이어 원자력 발전은 “공해가 전혀 없다(zero pollution)”는 사실도 아니고 필요하지도 않은 과장된 주장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더 나은 미래’라는 공동의 목표
셀렌버거가 더 나은 미래를 목표로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는 환경과학자나 환경주의 운동가뿐 아니라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모두 마찬가지일 겁니다. 의견의 차이는 현재 위기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세상을 더 나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의 차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사고, 과학에 대한 오해, 그리고 전문가들을 향한 분노에 찬 인신공격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물론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지구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릴 수 있으며 어쩌면 심각한 환경적, 사회적 붕괴가 올지 모른다는 근거를 믿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종말론적 미래가 반드시 예정되어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이를 피할 수 있는 행동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는 기술만능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또한 무제한적인 경제 발전과 기술의 혁신이 비극적인 미래를 반드시 피할 수 있게 만들어주리라는 점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두 관점이 가진 불균형에 문제의 답이 있습니다. 만약 맬서스주의자가 틀렸다 하더라도 이들의 시도는 어쨌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기술만능주의자가 틀렸다면 미래는 거의 분명하게 종말론적 세상이 될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래의 환경적, 사회적 재해를 파악하고, 알리고, 이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기후변화, 담수 자원, 환경 분쟁과 같은 과학과 정책이 교차되는 분야에 40년 이상을 종사했고, 여기에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해법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아직 깨끗한 물과 공중 위생 설비가 없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를 공급할지 압니다. 우리는 기후변화를 늦추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을 낮추는 동시에 기후변화의 영향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누구도 배를 곯지 않고 모두에게 충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 농업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지 압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어떤 해결책을 우선시할 것인지, 정부와 각종 기구의 실패를 어떻게 고칠 것인지, 정책결정자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그리고 안타깝게도, 더 효과적으로 빠르게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지 두고 어떻게 서로 이성적으로 대화할 것인지를 위한 적절한 노력입니다. 이 책은 이런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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