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가수 아담을 기억한다면 최소 30대 이상일 가능성이 크다. 아담은 1997년생이고 1998년 1월 첫 앨범을 냈다.
키 178센티미터, 몸무게는 68kg. 혈액형은 O형이고 김치찌개를 좋아한다는 등의 그럴듯한 설정까지 갖췄다. 생선 요리를 싫어하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파리넬리>고 등등.
아담의 얼굴은 동양과 서양인중에서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이상적인 형태로 합성됐습니다. 아담의 음성만은 실제 사람의 목소리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영원히 공개되지 않습니다. 실제 가수와 똑같이 영상 속에서 활동할 이 가상인물 아담에 대해 한 의류업체에서는 벌써 의상 협찬까지 나섰습니다.
당시 아담의 등장을 소개한 KBS 뉴스에서는 아담을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서 컴퓨터로 대변되는 이른바 사이버 세계에서만 활동하는 가상의 가수”라고 소개했다. “스캔들을 일으킬 염려도 출연 약속을 어길 염려도 없는 사이버 스타,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무너지는 순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담은 인공 지능이나 첨단 기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박성철이라는 무명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3D 그래픽 애니메이션을 입힌 정도였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결국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에 캐릭터를 부여하는 데 그쳤다.
최초의 사이버모델이라 꽤나 화제를 불러 모았고 광고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급격히 관심이 줄어 2집은 흥행에 참패했다. 일단 TV 출연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한두 번 보면 신기하지만 인터랙션이 없는 캐릭터의 한계였다.
아담 이후 25년, 메타버스 바람을 타고 아뽀키가 등장했다.
아뽀키도 3D 버추얼 캐릭터지만 일단 생산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아담이 앨범 두 장 내고 사라진 것과 달리 아뽀키는 지난해 9월 등장해 1년 남짓한 사이에 100건 이상의 영상을 쏟아냈다. 패션 잡지 바자는 아뽀키의 데뷔 영상을 이렇게 평가했다.
‘넌 충격 좀 받겠지’라는 가사처럼, ‘GET IT OUT’의 뮤직비디오 댓글에는 아뽀키의 개성 있는 목소리와 뛰어난 노래 실력, 자연스러운 춤 동작 등에 충격받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실제 사람 밴드가 공연을 하는 현실의 공연장에 아뽀키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다. 노래와 함께 춤을 시작하는데 본 사람들은 안다. 이건 춤을 추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그냥 아뽀키가 춤을 추는 것이다. 아뽀키가 현실의 누군가를 대신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메타버스로 확장된 우주에서 아뽀키는 그 자체로 독립된 캐릭터가 된다.
아담이 ‘순수한’ 그래픽 작업이었던 것과 달리 아뽀키는 리얼타임 렌더링과 모션 캡쳐 기술로 구동된다. 실제 모델의 움직임을 읽어 들여 그래픽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심지어 댓글을 보면서 웃고 떠드는 라이브 방송도 가능하다.
대중문화 평론가 이승한은 한겨레 칼럼에서 “고도로 설계된 콘셉트를 연기하고 가상의 세계관을 제공하는 것이 아이돌 산업의 본질이 된다면, 이 싸움은 궁극적으로는 더 통제가 잘되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 될 것”이고 “어쩌면 지금이, 가수의 본질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할 타이밍인지도 모른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아뽀키가 사람을 흉내내는 게 아니라 의도된 콘셉트와 세계관을 가장 잘 반영하는 K-팝의 최정점에 아뽀키가 있다는 이야기다. 아뽀키는 아이돌 산업의 정체성을 흔드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음악평론가 차우진은 “코어 팬들은 ‘1일 9뽀끼’한다”면서 “가상 캐릭터와 소속사가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사실상 일말의 위화감도 없었다”고 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뽀키가 가상의 캐릭터라는 사실을 크게 개의치 않을 정도로 현실적이거나 애초에 가상 캐릭터라는 게 큰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아뽀키의 유튜브 구독자는 30만명, 틱톡은 250만명에 이른다. 지난달에 아뽀키가 판매한 NFT(대체불가능토큰)은 2만5000개가 2초만에 완판되는 기록을 세운데 이어 10배 이상의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최근에는 CJE&M 등에서 100억원의 펀딩을 받기도 했다.
로봇 공학에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이론이라는 게 있다. 로봇이 사람과 닮으면 호감이 높아지지만, 어느 정도 이상으로 닮게 되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는 이론이다. 불쾌감을 넘어 강한 공포와 거부감을 이어질 수도 있다.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 스토리>가 사람 대신에 장난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이런 불쾌한 골짜기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뒷이야기도 있었다.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에 따르면 이 ‘언캐니 밸리’를 지나게 되면 오히려 호감이 늘어나게 된다.
아뽀키는 이미 ‘언캐니 밸리’를 지난 것일까. “태어나자마자 2년째 자취 중”이라는 아뽀키의 랜선 집들이 영상을 보고 나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아뽀키가 2021 경기 뉴미디어 콘퍼런스 개막 공연을 맡게 됐다. 인사말과 함께 개막 선언도 하게 된다. “플랫폼의 확장, 크리에이터의 기회”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콘퍼런스의 사전 등록은 이 링크에서. 참가비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