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방영을 시작한 지 2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이코닉한 드라마가 있습니다.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민낯의 뉴요커의 멋을 제대로 보여줬던, 바로 〈섹스 앤 더 시티〉입니다. 뉴요커중 상뉴요커인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는 어디에 살았을까요? 그녀의 꿈 같은 뉴욕 집은 지금도 그곳에 잘 있을까요?
드라마에서 캐리는 어퍼이스트(Upper East Side)의 245 East 73th street에 사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실제 촬영을 하고 모델이 된 집은 웨스트 빌리지(West Village)의 페리가 64번지(64 Perry St.)에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시즌부터는 페리가 66번지(66 Perry St.)으로 배경을 살짝 옮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동네를 기웃거리며 캐리가 앉았던 계단을 찾아 인증샷을 찍곤 하지요.
64 Perry St.
캐리의 집으로 나왔던 이 건물은 실제로는 전 층을 한 가구가 쓰는 ‘타운하우스’였습니다. 수백억 대의 고급 매물들만 취급하는 소더비 부동산 웹사이트에도 올라온 매물이었는데요. 마지막으로 거래된 가격은 2013년에 1,325만 달러, 현재 환율 기준 약 147억 원이었습니다. 저는 숫자를 잘못 셌나 두 눈을 잠시 비비는 시간을 가졌고요.
이렇게 비싸게 팔린 이유는 단순한 TV 출연에 따른 유명세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1899년에 지어진 이 매물은 침실 5개, 욕실 3개짜리 브라운스톤 건물로, 거의 300년이 된 밤나무가 있는 프라이빗 정원까지 포함돼 있습니다.
고급 아파트들이 아무리 많아도 정원만큼은 맨하탄 한복판에서는 누리기 어려운 호사죠. 그래서인지 기록에 따르면 2013년 매각 전까지 약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집을 소유했던 가족들은 단 3가구뿐이었다고 하네요. 팔기 싫은 매물!
66 Perry St.
그렇다면 그 후의 아파트를 볼까요? 다행히 이 집은 타운하우스가 아닌, 여러 가구가 나눠 사는 서민(?)들의 아파트였습니다. 역시 아주 고릿적인 1966년 지어졌으며 3층짜리, 3개 가구가 사는 곳입니다.
이 아파트는 2019년 기준으로 스튜디오(10.5평)는 3300달러, 즉 367만 원 정도에 렌트가 나갔습니다. 현재 페리가의 주변 비슷한 크기 집들의 한 달 평균 월세는 3,100달러, 한화로 약 345만 원입니다. 캐리는 현재 기준 월세 350만 원정도 하는 집에 살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어디 한번 집 안의 모양새를 볼까요? 혹시나 캐리네 아파트를 기대했다면 그것은 경기도 오산입니다. 촬영된 캐리의 집은 세트장이었고 지금은 해체돼 없어졌다는데요. 아쉽지만 늘 알고 보면 진짜가 더 재밌는 법. 진짜 스튜디오 아파트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방이 먼저 나오고 부엌→화장실이라… 되는대로 만든 느낌이 들지요? 하지만 막상 나쁘지 않습니다.
고풍스러운 난로도 있고, 구조는 이상하지만 욕실도 부엌도 나름 깔끔하게 잘 설비가 돼 있습니다. 화장실이 급하게 집에 들어왔을 때 달려가야 할 거리가 심하게 멀어 보인다는 점 외에는 앞의 우거진 나무도 큼지막한 옷장도 마음에 듭니다. 평면도상 비어 있는 왼쪽 아래 공간은 건물의 계단이 있어 활용하기 어려운 공간일 겁니다. 보통 브라운스톤 건물의 중간층 호수는 저렇게 계단이 지나가는 빈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드라마 속 캐리의 아파트
드라마 속 캐리의 집은 이렇습니다. 척 봐도 상당한 크기의 아파트로 보이는데요. 침대 크기로 미루어 보았을 때 25에서 27평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역시 넓어서 그런지 공간에도 여유가 있고 참 오밀조밀하고 귀엽네요. 여기서는 화장실이 급하게 귀가했을 때 걱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렇다면 캐리는 얼마를 내고 살았을까요? 겨우 700달러였다고 합니다. 20년전 가격임을 감안해도 시세에 비해 턱없이 낮은 가격이죠. 하지만 이 집은 ‘렌트 스테블라이즈(rent stabilized)’ 대상인 아파트였다는 설정입니다. 프리랜서 작가가 어떻게 그렇게 좋은 동네에 살면서 마음껏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사고 심심하면 멋진 바에서 코스모폴리탄을 시원하게 때릴 수 있었는지 약간은 설명이 되는 부분입니다.
임대차 보호법
렌트 스테블라이즈란 뉴욕시의 임차인 보호법 중 하나입니다. 뉴욕에 있는 건물 중 1974년 이전에 지어진 집에 한해서 임대료를 정부가 정한 비율의 상한선 이상으로 올리지 못하도록 합니다. 월 렌트 2,700달러 이하인 집들만 대상이지만, 뉴욕시 전체 아파트의 절반 정도가 이 대상이라고 하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렴한 월세를 누리고 사는 것이네요. 왜 부동산 사이트엔 보이지 않을까요? 미스터리입니다.
더 강력한 임차인 보호법으로는 렌트 컨트롤(Rent Control)이란 것이 있습니다. 1947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 중 6호 이상 가구가 있는 아파트가 대상입니다. 해당하는 곳에 사는 사람 중 1971년 이전에 렌트를 시작한 거주민에게는 최초 입주 당시 가격으로 임대해서 언제까지나 살 수 있도록 한 제도입니다. 세입자에게 엄청난 혜택인 이 제도는 전체 뉴욕 아파트 중 단 1% 정도가 해당하는데요. 같이 사는 가족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다는 엄격한 규제가 있습니다.
둘 다 뉴욕의 살인적인 집값 상승에 원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라고 할 수도 있죠. 그래서 뉴욕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중에는 등장인물이 이런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설정이 많습니다. 비싼 동네에 살면서 렌트 걱정은 전혀 없는 듯 낮에는 친구들과 모여 수다를 떨고 매일 나잇 아웃을 즐기는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하는 미드 주인공에게 꼭 필요한 설정인 것이죠. 조금 더 현실감을 더하려면 주인공이 부유하게 은퇴한 어르신이거나 워커홀릭 억대 연봉자여야 계산이 맞을 겁니다.
캐리네 집이 유명한 관광지가 된 이후 아직까지도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추억을 되새기며 이곳을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주택가. 자기네 집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 인파들이 주민에겐 고통일 수 있겠죠. 한 주민 단체는 여행사들이 더 이상 대형 관광 버스를 동네에 세워두지 말 것을 요청 하기도 했다네요. 주민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며 조용히 살짝 추억을 되새기며 거닌다면 참 좋을 페리가였습니다.
원문: 뉴욕월매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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