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움은 갖고 싶지만 지금 나에게 없는 것과 관련 있는 반면, 질투는 갖고 있지만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것과 관련 있다.
심리치료사인 에스터 페렐이 내린 정의다. 우리나라의 최근 문화는 부러움과 질투라는 거대한 두 축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SNS는 그야말로 부러움이 넘쳐나는 현장이다. 내가 갖지 못한 외모, 환경, 집, 명품, 여행, 저녁 등이 범람하고, 누구나 즉각적으로 그런 ‘부러움의 이미지’에 닿는다.
TV만 틀면 나오는 연예인들 또한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다. 혼자 사는 연예인은 싱글의 화려함을, 아이를 키우는 연예인은 부유한 육아를 과시한다. 부러워할 대상이 시시각각으로 눈앞에 놓이면서, 일종의 부러움을 강요당하는 사회가 이미 만들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페렐이 말하는 질투는 대개 연인이나 반려자의 외도나 한눈 파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질투는 나의 연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서 발생한다는 것인데, 사실 더 근원적으로는 ‘나 자신’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반려자의 외도는 내가 헌신한 시간, 서로 사랑한다는 믿음에 뿌리내린 자아 정체성, 함께 만들어가는 삶에 부여했던 가치 전체를 잃게 만든다는 점에서 상대방의 자아를 살해하는 일과 같다. 다시 말해 질투가 심층적으로는 일종의 자아 살해 공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고, 이 또한 최근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단순히 무언가 부럽다면, 사람은 먼저 그것에 자신도 도달하고 싶어한다. 인스타그램 속 호캉스의 이미지가 부럽다면, 당장 이번 주말 자신도 그런 호캉스를 떠나고자 한다. 자기가 가지지 못한 명품이 부럽다면, 20개월 할부를 통해서라도 자신도 명품을 가지고자 한다. 실제로 명품 가방이나 고급 외제차 등에 대한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은 그런 ‘부러움의 문화’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강렬하게 지배하는지 보여준다.
나아가 온갖 성공한 분야의 사람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각종 브이로그 등 유튜버들도 크게 인기를 끈다. 사람들은 그들을 닮고 싶어 하고, 그들이 입은 옷, 그들이 장착한 아이템, 그들이 사는 라이프스타일을 모방하며 소비한다.
그러나 부러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도 있다. 바로 그러한 셀럽이나 인플루언서 대한 저격과 비난, 악성 댓글 등의 적개심이다. 매일 셀럽이 태어나고 몰락한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사람들은 그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만큼이나, 그 누군가의 몰락을 바란다.
이 잡듯이 한 사람의 발언을 찾아내어 매도하거나 폄하하기도 하고, 악마라 규정 짓는 놀이를 즐기면서, 그들의 몰락에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는 때로 사람들이 바로 자신이 부러움을 느끼는 그 대상에 대해 일종의 사회적 살해 욕구를 느낀다는 의미가 된다.
그 이유는 어느 대상에게 부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박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초라해지고, 주류의 세상에서 쫓겨난 기분이 들며, 자신의 자아가 점점 작아져서 결국 자기가 살해당할 것 같은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던 어느 존재는, 그 순간 내가 가진 것조차 앗아갈 것 같은 존재가 된다.
내가 지켜왔던 나라는 존재,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자 애쓰며 존중받길 바랐던 나의 삶, 인정받고 성취하길 원했던 나의 자아가 그들 앞에서 왜소해지고, 작아지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 박탈감 또는 소외감이야말로 자아에 대한 살해 위협이며, 근원적인 공포심인 것이다.
결국 최근의 문화는 부러움과 질투라는 두 가지 감정에 지배당하면서, 일종의 순환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모방하고, 그러다 좌절하며 질투하고, 그 과정에서 감정의 대상이나 소비의 주체 모두 상승과 몰락을 겪고 있는 것이다.
부러움과 질투의 문화란 사실 수많은 사람이 매일같이 사회적이고 감정적인 상승과 몰락을 겪는 진폭이 커지고, 그런 반복이 빈번해지는 문화인 것이다. 이런 문화 안에서는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을 지켜나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부러움과 질투로 서로가 더 견디기 어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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