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의외로 생활 면에서는 의외로 꽉 막혔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편입니다. 정리정돈이나 인간관계, 공부 방식 등등 말이죠.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기존에 해왔던 방식을 고수하기를 선호하는 타입이거든요.
당연히 전자책에도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사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공부할 때도 무조건 책을 펴고, 노트에 연필로 일일이 문제를 풀고 볼펜과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필기를 해가며 공부하는 방식을 선호했고요. 사실 공부는 다 이렇게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 작년, 2학기 수업이 개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저희 형이 아이패드 프로 1세대(9.7인치)를 사 왔습니다. 본인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는 데 쓸 거라고 합니다. 저는 ‘공부는 종이에다가 하는 거지’ 하면서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2주 정도가 흘렀고, 우연히 형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형은 컴퓨터 소프트웨어학부에 재학 중이기에 저랑은 조금 경우가 다르긴 했습니다만, 종이 한 장 없이 아이패드 하나로 공부하는 모습은 꽤 혁신적이게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저 역시 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즉시 바로 아이패드 프로 12.9인치 모델을 구매했습니다. 덕분에 방학 때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돈이 거의 바닥날 지경이었죠.
사실 처음 사고 나니 뭐부터 활용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형에게 앱들을 추천받아서 구매하고, 아이패드는 2세대 이후로 9년 만이다 보니 여러 가지 설정도 하고, 애플 펜슬의 필기감에 익숙해지는 데 일주일 넘는 시간이 걸린 뒤에야 제대로 활용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근 1년이 흘렀고 이제는 아이패드 없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어요.
저희 과에서 한 학기에 배우는 전공 서적은 대략 4–5권 정도입니다. 대부분 짧으면 700페이지, 길면 1,200페이지 정도의 두께를 자랑합니다. 학교 사물함에 책을 두고 다니더라도 책을 몇 권씩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고역이고, 시험 기간이나 과제, 리포트가 있을 경우 책을 집에 가져온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죠.
요즘은 북스캔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들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책을 스캔해주는 곳은 아니고, 시간당으로 돈을 받고 스캔 장비를 대여해주는 업체입니다. 보통 5권 스캔하는 데 2만 5,000원에서 3만 원쯤 나왔던 것 같아요. 책이 아깝기도 했기에 자주 봐야 하는 역학이나 공업수학 서적들은 다시 복원해서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아뒀습니다. 며칠의 수고를 거치고 학생에게는 꽤 뼈아픈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야 집에 있는 전공 서적을 전부 제본할 수 있었어요.
몇 권을 빼먹긴 했지만, 제본을 완료하고 pdf로 만들어서 애플리케이션에 모두 넣은 모습입니다. 북스캔 업체에서 대강 여백을 제거하고 pdf로 합쳐서 파일을 줍니다만, 저같이 정리에 강박증이 있는 사람들은 그 어설프게 남아있는 여백들과 기울어진 페이지들을 참을 수 없죠. 그리고 업체에서 받은 pdf 파일을 그대로 아이패드에 넣으면 용량도 어마어마해서(권당 500메가 넘게도 나와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로딩이 걸려서 흐릿하게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기에 따로 받은 원본 이미지 파일들을 각각 압축시키고 여백을 제거해주고, OCR을 적용하고 합친 후에 북마크를 일일이 입력해주었습니다. 북마크 작업은 정말 귀찮지만 한번 해두면 정말 편리해요. 앱에서 원하는 챕터를 터치 몇 번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요. 아래 사진은 북마크를 적용한 모습입니다.
이 모든 작업은 요령이 생겼다 해도 권당 최소 4시간 이상 걸렸던 것 같아요. 사실 생고생이지요. 하지만 저 책들만 합쳐도 1만 페이지는 거뜬히 넘습니다. 이걸 전부 들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죠. 그러나 이제는 아이패드 하나면 충분합니다.
요즘은 교수님들께서 강의자료를 거의 pdf로 업로드해주십니다. 몇몇 교수님들은 전공교재를 아예 사용하지 않으시고(그런 경우에는 학기 초에 미리 말씀해주셔서 교잿값을 아끼게 해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ㅠㅠ) 한 학기에 500페이지쯤 되는 pdf 강의자료로만 수업하시는 경우도 있어요.
저 같은 경우야 집에 프린터가 있어서 프린트해가면 되는 문제였습니다만, 대부분 가정에는 프린터가 없는 게 현실이고 결국 학교 인쇄소에 수업 시작 전에 미리 방문해서 일일이 돈을 지불하고 프린트해야 하는 수고를 겪어야 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만약 아침 1교시 수업일 경우, 수업 전에 인쇄소에 들르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큰 스트레스죠.
하지만 이 역시 아이패드 하나면 전부 해결됩니다. 강의자료 업로드되었다는 알림이 뜨면 그냥 들어가서 다운로드하고 바로 필기 앱을 열면 끝이에요. 애플 펜슬의 질감에 익숙해지고 나면, 필기도 웬만한 종이 필기보다 깔끔하게 됩니다.
요즘은 거의 없는 경우지만, 때로는 강의자료 없이 오로지 칠판 판서만으로 모든 수업을 진행하시는 교수님도 계시죠… 그런 경우에는 노트에 일일이 받아 적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역시도 아이패드에서 가능하죠.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비대면 원격 수업이 진행되면서, 모든 과제와 리포트 또한 전부 온라인으로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제와 리포트를 종이에 수기로 작성해서 스캔해서 업로드하라는(!) 조금은 너무한 요구를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교수님들이 생각보다 많으세요.
사실 전공 특성상 공학 문제를 풀어야 해서, 컴퓨터로 작성이 불가능한 과제들이 대부분이긴 한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요. 여하튼 그런 경우에는 교수님께 미리 메일로 태블릿 PC 필기의 제출 가능 여부를 허락받은 뒤, 작성한 노트를 pdf로 내보내서 업로드하면 귀찮은 스캔 없이 바로 해결이죠.
저는 공부하는 데 notability, flexcil 이렇게 두 앱을 주로 활용합니다. notability는 주로 노트필기와 강의자료 필기가 목적이고, flexcil은 전공 서적을 보며 밑줄을 긋고, 약간의 메모를 곁들이는 용도예요.
- notability는 음성 녹음이 가능해서 강의 도중 녹음 기능을 켜 두고 필기를 한 뒤에 나중에 필기 부분을 터치하면 당시의 음성이 재생된다는 기막힌 장점이 있습니다. 복습할 때 정말 정말 유용해요.
- flexcil은 가로모드에서 두 페이지 모드가 지원이 되는데, 이게 두 페이지가 동시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 페이지씩 넘어갑니다. 종이책에서는 앞뒤 페이지를 동시에 봐야 할 상황이 있을 경우에는 앞뒤 페이지를 계속 넘겨가며 봐야 하는데, 이 앱에서는 한 화면에 앞뒤 페이지가 동시에 떠서 그런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 외에 OCR이 적용되어 있는 pdf에는 애플 펜슬로 글씨를 터치하기만 해도 알아서 밑줄이 그어지는 기능도 있고요.
보통 공부할 때는 책과 강의자료 또는 필기를 동시에 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럴 경우엔 화면을 분할해 한쪽 화면에는 필기용으로 notability를, 한쪽 화면에는 전공 서적 보는 용도로 flexcil을 띄워 두면 해결입니다. 제 경우에는 아이패드 프로 12.9인치 모델을 쓰다 보니 글씨가 작아진다는 느낌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게 뭐 별다른 작업도 필요 없이, 앱 아이콘만 끌어다가 화면 끝으로 당기면 알아서 분할되는 엄청 편리한 제스처가 있어요.
그 외에는 공학용 계산기 앱과 WolframAlpha, Notion 등의 앱도 사용합니다. 공대생들은 공학용 계산기도 필수로 들고 다녀야 하는데, 사실 아이패드 앱을 깔아 두면 완전히 대체가 가능해요. 뭐 그래도 시험대비를 위해서는 실제 계산기도 손에 제대로 익혀두는 게 필수긴 하지만요.
최근에는 Shapr3D라는 앱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전공에서는 캐드가 필수인데, CATIA 등의 프로그램들은 사실 다루기도 버겁고 엄청 무거운 프로그램이에요. 그런데 이 앱은 그런 캐드에서 쓸 수 있는 거의 기능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더라고요. 캡스톤 디자인이나 팀 프로젝트 때, 밖에서 만나서 아이패드로 간단한 모델링은 이 앱으로도 충분히 설계가 가능할 것 같아요. 학생 인증을 하니 1년 무료 이용하게 해 주어서, 최근에는 이 앱을 만지면서 기능들을 익혀나가고 있습니다.
마치며
아이패드에 책과 강의자료 넣고 패드 하나만 가지고 학교를 다니게 된 이후로 동기들이 본인들의 무거운 책과 두꺼운 강의자료 들고 다니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곤 합니다. 처음에는 어렵고 귀찮은 것 천지지만 적응하고 나면 이만한 게 없는 것 같아요. 물론 기대처럼 모든 걸 완전히 아이패드로 대체하고 종이 없는 공부를 실현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최소한 저희 전공에서는 수학, 공학 문제를 푸는 일이 많은데, 그건 역시 종이 노트에 휘갈기면서 푸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시험 대비에도 좋거든요.
그래도 아이패드는 강의 자료와 전공 서적, 필기에 대한 스트레스는 거의 완벽히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패드로 공부한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는데, 전역하고 1년 쉬다가 복학하고 나니 은근 아이패드로 공부하는 친구들이 보여서 신기했었어요.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바뀌었는데, 앞으로는 점점 더 이런 활용을 하는 학생들이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구매할 땐 부담이었는데, 작년에 한 학기 사용하고 나니 바로 ‘사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아이패드 덕분인지, 아니면 제 마음가짐이 달라진 건지 휴학 전과 비교했을 때 학점도 1점 넘게 올랐어요. 심지어 이번 학기에는 전공과목 세 개에서 A+을 받는 쾌거도 이루었고요^^
보통 대학교 입학하는 자녀분들을 둔 부모님들께서는 입학 선물로 공부할 때 쓰라고 노트북을 선물해주시는 경우가 흔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노트북보다도 아이패드가 공부하는 데는 훨씬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가격은 사실 아이패드 프로가 웬만한 노트북보다 더 비싸지만요ㅜㅜ).
최근에는 아이패드에도 그림, 영상 편집, 캐드 등이 가능한 앱이 많이 나와서 웬만한 노트북이 할 수 있는 작업을 거의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혹시나 곧 대학 입학을 앞두고 계시는 자녀가 있으신 분이라면, 아니면 노트 필기와 수많은 전공 서적, 프린트에 고통받는 대학생이라면 아이패드 구매도 고려해볼 만하지 않을까요.
원문: 범수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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