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카페를 아침 일곱 시에 열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 명의 직원에게 인건비를 주고 나면 마이너스가 났기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마이너스 100–200만 원 정도의 구멍이 몇 달 동안 이어졌다. 밥맛도 떨어졌다. 고민해도 해결점은 찾기가 어려웠다. 다만 막연하게 드는 생각은 가동 시간을 늘리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주 늦은 밤까지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커피에 들어 있는 카페인은 아무래도 아침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잠을 조금 덜 자고 일찍 열어보자 하는 결론에 닿았다. 열두 시까지 혼자서 일을 한다면 나만 피곤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일찍 일어나는 새가 꼭 벌레를 많이 잡는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점심시간이 되도록 한두 테이블의 손님만 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시간은 참으로 적적하고 고요했다.
내가 무엇을 했느냐면, 먼저 아침 식사 대신 미숫가루를 타서 먹었다. 이어서 나를 위한 몇 잔의 커피를 연거푸 마셨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기분이 나아진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마셨다. 그리고는 테이블을 닦고 바닥을 쓸었다. 군대에서 배웠던 대로 오와 열을 맞췄다. 깔끔하게 정돈이 되었는데도 손님은 당연한 듯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럴 때는 노래를 바꿔보기도 했다.
‘루시드폴’이나 ‘오지은’이 너무 우울해서 그런가 싶어서 ‘10cm’를 틀어보기도 하고, 가사가 있어서 그런가 싶어서 〈러브레터〉 OST나 〈냉정과 열정 사이〉 OST를 틀어 보기도 했다. 보급형 스피커에서 나오는 선율을 들으면서 산책로를 바라보았다. 길 건너편 보면서 사람은 보이는데 왜 여기로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러다 혹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예전에 공부했던 『경제 지리학』 책을 다시 꺼내서 읽었다. 그것이 퍽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예전에 보던 책을 다시 읽으니 기분은 나아졌다. 아는 개념을 다시 보니 내가 헛살지는 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형학, 기후학, 인구지리학, 교육철학, 교육사회학, 교육심리학, 이런 책들을 다시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손님을 위한 넓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계속 조용하다가 망한다면, 그렇게 되는 날이 올 때까지 계속 성실하게 공부나 하자는 다짐이 생겼다. 나는 세상에서 거의 완벽한 개인용 독서실을 가진 남자라고 자기암시를 거는 데 성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기야 나의 꿈은 바리스타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상호가 ‘좋아서 하는 카페’라서, 손님들은 내가 커피가 좋아서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보았을 때는 참 팔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름을 정할 때 고려한 것은 프러포즈였다. 앞에 지금 아내의 이름이 숨겨져 있다. ‘(정애) 좋아서 하는 카페’가 숨겨진 정식 명칭이다. 당시의 여자 친구였던 아내가 연거푸 시험에 떨어지기만 하던 나를 믿어줘서 빚을 내었다. 그것으로 짧은 시간 동안 커피 공부를 하고, 카페를 오픈할 수 있었다.
열두 평 작은 집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프러포즈할 때 친구 민호가 기타를 쳐주었고, 나는 그 선율에 맞춰서 평범한 목소리로 ‘다행이다’를 불렀다. 가사는 나의 마음과 똑같았다. 아니, 조금은 더 절박한 마음으로 사랑했다. 아내가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카페를 운영하지 못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나는 집도 차도 없던 신세였다. 거기에 보통의 성실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뛰어넘는 불안을 숨기고 있는 평범한 한국 남자였기 때문이다.
새벽에 울리는 알람에 일어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그럴 때마다 옆에 누워있는 두 딸과 아내를 바라본다. 아침마다 찬물에 머리를 감으면서 드는 생각은 아내가 나에게 가지는 믿음이 나의 튼튼한 동아줄이고, 두 딸이 나의 등에 매달린 사랑스러운 하중이라는 것이다.
한자리에서 카페를 운영한 지도 벌써 10년이 되어간다. 요즘도 여전히 아침으로 미숫가루를 먹는다. 하지만 전공 책이 아니라 소설책을 주로 읽는다. 고맙게도 이른 시간이지만 혼자서 일하기에 바쁜 날이 더 많다. 가끔은 점심시간이 되도록 한 번도 앉지 못하는 날도 있다. 아마도 수년 동안 매일같이 찾아주시는 몇몇 손님들 덕분이다.
혼자서 카페를 지키는 것은 적막한 느낌이지만, 한두 명이라도 오래도록 앉아있어 주기 때문에 다른 길손들도 조금씩 궁금해하게 되었다. 또 그렇게 그분들이 반복해서 찾아주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카페가 유지된다는 생각이 든다.
한 자리에서 이런 마음으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손님으로부터 어떤 형태의 창업 관련 문의가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마다 하는 첫 번째 조언은 견딜 수 있는 자리에서 출발하라는 말이다. 자본이 많다면 크고 화려하게 시작할 수 있고, 오래도록 견디는 것도 가능하겠다. 하지만 되도록 적은 임대료의 자리를 찾으라고 조언한다.
높은 임대료가 많은 유동인구를 보장하는 편이지만, 시내의 카페가 오래가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다. 낮은 객단가를 가진 카페업종 특성상 도심의 높은 지대를 견디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처음부터 높은 매출이 필요하다면 아무래도 초조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걸어 다니는 흐름이 있는 곳을 찾았으면 좋겠다. 걷는 사람이 주변의 풍경을 볼 수 있고, 가끔은 앉고 싶어지기에 들어올 가능성이 생긴다.
요즘은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마케팅도 제법 되는 느낌이지만, 그런 곳은 반복된 방문을 창출하기는 어렵다. 새것은 낡는 것이 이치인데, 계속해서 신선한 이미지를 발굴하는 것이 ‘좋아요’를 많이 받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젊은 연령층이 많은 대도시에서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요를 기대할 수도 있지만, 보통 지방 도시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견딜 수 있는 자리도 중요하지만, 견디는 이유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정지우 작가의 이전 글 「현대 사회에서의 섹스에 관하여」에서 언급된 것처럼 종교와 같은 견고한 이유가 좋을 것 같다. 내가 어려운 상황을 견뎌야 하는 토양이 그처럼 세상에 뿌려진 사랑이 된다면, 어떠한 곳에서도 어느 정도 돈을 벌고 소박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견디는 이유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 아래에서 카페를 운영한다.
원문: 세상의 모든 문화 / 글: 정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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