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고파서 연기했는데 남들은 극찬하더라. 그래서 예술은 잔인하다. 배우는 돈이 필요할 때 연기를 가장 잘한다.
- 배우 윤여정
살다 보면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여지없이 그 상황과 장소는 ‘돈’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삶은 돈과 얽히고설켜 있다. 그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돈이 지긋지긋하다 하여 그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돈은 단지 지폐와 동전을 이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라는 단어를 냄비에 넣은 뒤 끓이고 또 끓이면 남는 본질은 따로 있다. 바로 생존이다. 우리가 말하는 ‘먹고사니즘’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생존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먹으려면 음식이 있어야 한다. 음식은 구해야 한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선 그것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돈이다.
돈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을 해야 한다. 대다수가 해당하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는 예외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그래도 석연치 않다면, 나보다 일 덜하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에 대한 질투심을 잠시 내려놓으면 된다.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이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윤여정 배우 또한 먹을 걸 구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배고팠다고 했다. 배가 고프다는 건 가난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말이지만, 이는 정말 우리 몸에 여실히 경험되는 절망이다. 배고프면 살아야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우리가 죽도록 돈을 버는 이유다.
가난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윤여정 배우의 말을 보고 나는 장발장을 떠올렸다. 그가 빵을 훔친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프랑스 라브리 지방의 노동자는 가난했다. 가엾은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쳐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한 그는 결국 19년의 징역형을 살았다. 죄수 번호 24601호는 그가 가난으로 부여받은 상징적인 숫자다.
그가 훔친 건 빵만이 아니었다. 출소 후 숙식을 제공한 미리엘 주교의 집에서 그는 값비싼 은 촛대를 훔치다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미리엘은 장발장에게 은촛대까지 덤으로 주며 그를 용서한다. 장발장이 새로운 삶을 살자고 각성한 때가 이즈음이다. 결국 장발장은 이름을 마들렌으로 바꾸고 공장 주인을 거쳐 시장에까지 이른다.
장발장이란 대작의 서사는 이렇게 가난으로 시작한다. 후일, 선행을 베푸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도 가난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빵을 훔치고, 은촛대를 훔치고. 지금의 세상이라면 청문회를 통해 질타받고, 시장의 자리엔 오르지도 못할 일이다.
나의 가난도 돌아본다. 가난 앞에서 주눅 들기도 했지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난다. 그 고군분투는 나름 의미가 있던 발악이었다. 그러하지 않았더라면 안주하며 퍼질러졌을 나를 기어이 일으켜 세운 것이 가난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든다. 확실히 그렇다. 가난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가난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의 원동력을 ‘열등감’으로 봤다. 인간은 누구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열등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보상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더 성장하거나 인격의 왜곡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즉, 개개인에 주어진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사람은 고군분투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공감한다. ‘결핍’이란 단어로 볼 때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모자람이 있던 나였으므로 그것을 조금씩이라도 채우고 노력했고, 그 덕분에 이전보다는 나은 내가 되었다고 믿는다. 물론 그 과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도 나는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이것저것을 했고, 무언가를 하지 못하면 마음이라도 불편했으니 말이다.
가난은 결핍이다. 결핍은 열등감이다. 가난했기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고자 했던 수많은 아르바이트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곤 했다. 내성적이었던 내가 여러 사람 앞에 서야 할 때도 있었고,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던 학생 시절엔 50–60대 아저씨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며 공사장을 누볐다. 나는 그 경험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돈이 많았다면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으나, 경험하고 나니 나는 그 값어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더불어 먹고살기 위해 결국 직장인이란 길을 걷는다. 한 달 한 달 주어지는 월급은 결핍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지만, 나 자신은 월급 이상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일할 수 있는 무대가 주어지고, 크고 작은 인정을 얻고. 더불어 크고 작은 질책과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결핍이 생길수록 나는 강해지고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근 20년 동안 월급을 한 번도 빠짐 없이 받아왔다는 것도 내겐 기적이다. 꾸준하지 못한 내가.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온 것이다. 즉, 월급이 꼬박꼬박한 게 아니라 내가 꼬박꼬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압박과 삶의 결핍이 나를 계속 숨 쉬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움직이게 하고 살아내게 만드는 건 칭찬과 설렘만이 다가 아니다. 가난이, 모자람이, 열등감이 그리고 결핍이 오늘도 나를 숨 쉬게 하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눈을 뜨게 한다. 그러한 것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었을 거란 생각마저 든다.
나는 윤여정 배우의 말과 그 마음을 몸소 이해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배고프거나, 배고픔이 올까 두려워 무언가를 대비하는 것들과 연관되어 있다. 배고파 본 적이 있는 자들은 배가 불러도 그에 안주하지 않고 더 움직인다. 배고픔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잊히지 않는 강렬한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계속 춤을 추며 살지 않을까 한다. 칭찬에, 가난에.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삶에서도 배고팠던 그 시절을 기억하며 말이다.
어차피 사람은 안절부절 못하는 존재다. 없어도 있어도. 배고파도 배불러도. 모자라도 넘쳐나도. 나는 이제 그게 개개인의 춤사위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게 있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그 사이에서 어차피 안절부절못할 것이라면 좀 더 멋지고 우아하게 안절부절못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는 사이, 결핍은 채워지고 나는 한 뼘 더 자랄 거니까. 가난은 고래도 춤추게 하니까.
원문: 스테르담의 브런치
함께 보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