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토크나 강연을 할 때, 종종 아이와 함께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인상적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이번에도 강연하는데 아이 소리가 들려서 아이를 불러보았다. 아내는 내가 독자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니 아이와 함께 자리를 피해 있었는데, 나로서는 아내와 아이 모두에게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왜 굳이 아이와 아내를 배제해야 하나, 아이란 있으면 안 되는 것인가, 모두가 엄숙하게 서로를 바라봐야만 하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내가 부르니 아이는 쪼르르 달려와 내게 안겼다. 마이크 줄이 잠깐 떨어져서 진행을 도와주는 분께 미안했지만 금방 고마운 배려를 받았다.
세상에 아무리 대단한 이야기를 한다 할지라도, 잠시 아이를 안아주지 못할 만큼의 여유가 없어야 하는 시간이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게 강연이든, 연설이든, 방송이든 말이다. 그 나름의 엄격한 흐름과 진행 과정이 필요한 장르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만드는 시간의 자연스러움 안에서 아이란 배제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 듯하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랑 함께 그런 자리에 갈 때면, 나는 종종 아이를 부르곤 했다. 아이를 안고 이야기하거나, 아이가 자연스레 그 공간 어디쯤 섞여 있는다고 해서, 시간이 더 나빠지기란 쉽지 않다고 느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좋아해 주기도 했고,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섞여 있기도 하면서 만들어나가는 어떤 시간에 대한 상상을 종종 한다. 다 같이 모여 앉아서도 좋은 시간을 만들 수 있다는 상상을 해야 한다고 믿곤 한다. 이것은 나의 취향이기도 하지만, 신념의 측면도 있다. 아이들을 너무 쉽게 배제하기 전에, 함께 할 수 있다면 함께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독서 모임이나 글쓰기 모임을 할 때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줌을 켜게 된다. 사실 아이가 집안에서 너무 시끄럽게 놀면 진행에 어려움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아이가 너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방과 방을 오가면서 내가 하는 일을 구경도 하고, 노트북 속 화면에 조금 등장하는 일도 가능하도록 시도해본다.
내 서재, 나의 일, 내가 만드는 시공간이라면, 아이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하는 경우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수험공부도 아이를 곁에 끼고 했는데, 무엇이든 하지 못할까 싶다. 그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나의 삶도, 또 세상도 아이들을 너무 쉽게, 먼저 배제하는 것만을 상상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아이라는 존재는 다루기 힘들거나, 귀찮거나, 짜증 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취향의 문제를 둘째 치더라도 어느 삶에서는 물론이고, 이 사회에서 아이도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이다. 아이들이 너무 천덕꾸러기 취급받으며 먼저 차단되어야 할 존재로 취급되지 않으면 좋겠다. 할 수 있다면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상상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런 삶을,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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