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은 몇 가지의 아주 중요한 결정이 좌우한다. 매일 많은 일을 하고, 의사결정을 하고, 바쁘게 살고 있지만 결국 삶 전체를 흔드는 건 몇 가지의 아주 중요한 의사 결정이다.
나의 경우라면 전공을 택한 것, ROTC를 그만두고 게임회사를 간 것, 졸업하고도 다니기로 한 것, 개발을 접고 투자 일을 하기로 한 것, 여의도로 이직한 것, 집을 산 것. 뭐 이런 3년에 한 번 정도 있을 선택들이 삶을 바꿔 놓은 결정들일 거다.
중요한 선택엔 당연히 무거운 고민이 따라온다. 무거운 고민 중 좋은 선택을 위해서는 유의미한 백데이터와 선택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우발적인 게 아니라면 선택의 기로에서 오래 고민을 하지 않을수록 좋다. 그러려면 그 문제를 평소에 고민하고 있어야 하고, 선택에 필요한 리서치를 미리 하고 있어야 가까워진다. 받아들게 된 선택지는 예상하고 준비한 것 안에 있을 때 결정하기 쉬우니까.
비 엔지니어링 커리어 트랙의 친구들 중에선 다소 인위적으로 커리어를 그리는 경우도 많다. 내실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스토리가 있는 트랙 레코드를 장착하면, ‘숨은 재능’을 갖고 있지만 검증할 길이 없는 사람보다 유리할 수밖에 없다. 전략적 설계, 리서치, 노력, 그리고 중요한 선택의 조합이 다소 인위적·기술적이더라도, 없는 것보단 나을 수 있단 이야기다.
여기서 정리하면 작은 것보단 굵직한 선택을 잘해야 하고, 그러려면 몇 년에 한 번 주어지는 질문에 답할 준비를 해 두는 게 중요하다. 심지어 그게 순리에 따르지 않는 다소 인위적인 색채더라도, 순수하고 역량 넘치는데 장기적인 그림이 없는 쪽보다는 나을 가능성이 크다- 정도가 될 것 같다. 여기서 더 중요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2.
그럼 하루에도 수십 번의 커뮤니케이션, 의사결정, 아이디어, 설득과 논쟁, 보고, 전략, 페이퍼워크가 가득한 일상은 필요 없고 나가서 네트워킹이나 하고 커리어를 모색하고, 내 명함 뿌리면서 나를 꾸미고 다니면 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절대 아니다. 큰 선택이 중요하다고 해서 작은 오늘이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다. 큰 선택을 뒷받침하기 위해 작은 오늘의 일상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맞다.
일이 재미 없고 의욕 없고 하기 싫고 무의미하다면 그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큰 틀에서 중요한 선택의 설계를 안 해서 오늘이 의미 없게 느껴지거나, 꿈은 저만치 가 있는데 지금 내가 하는 게 직접적으로 상관없어 보여서 하기 싫거나. 실상은 둘 다 지금의 일을 하기로 선택한 게 잘못되었거나 일상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인데, 전자는 어쩔 수 없으니 후자가 중요하다.
직무 개발은 언제든 가능하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다면 오늘의 일 중 더 중요한 것과 아닌 것이 나뉜다. 그럼 중요한 일을 더 열심히 하면 되고, 덜 중요한 일은 적당히 대충하면 된다. 내가 키워야 하는 역량이나 다가가고 싶은 일에 95점만큼 집중하고, 그 시간을 벌기 위해 다른 일은 85점 정도로만 고민하고 빠르게 지우거나 수월하게 일하는 쪽을 택한다. 시스템이 필요하다면 룰을 만들고, IT 툴을 동원하고, 자동화하는 것도 좋다.
첨언해서 이걸 가능하게 해주는 조직이 개인을 발전할 수 있게 하는 조직이다. 중요하지 않은 걸 95, 중요한 걸 85 혹은 그 이하로 집중하게 하는 조직은 당연히 오래 머무르면 위험한 조직에 가깝다. 좋은 직장을 떠나는 사람들은 사람 사이의 문제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 이유로 떠난다. 제법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다. 발표 자료의 내용을 고민하게 해야지 포맷을 고민하게 하면 안 된다.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내가 진짜로 해야 하는 일이라면, 공문 보내고 양식 채우고 ERP 치는 시간은 자동화를 통해 줄여야 하는 거다. 유의미한 코드를 짜는 시간이 최고로 중요하다면, 빌드 누르고 난 뒤의 대기 시간을 줄이고 불명확한 요구 사항을 확인하느라 드는 시간도 시스템으로 줄여야 한다. 이건 기술적으로는 업무의 생산성 문제로 귀결된다. 내가 잘하고 바꾸다 보면 조직 생산성도 늘어난다.
근데 큰 그림의 설계가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매일 바쁘고 작은 것에 힘을 빼고, 중요한 결정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 결정 앞에선 우유부단하고, 덜 중요한 것에 집착하고 큰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객관적으로 감당 불가능한 일이 장기적 수준에서 계속 주어지는 안타까운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니(그럼 퇴사해야 한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상사가 어떻고 회사가 어떻고 하겠지만, 그게 일 못하는 거다(…)
왜냐하면, 실제로 나도 일을 못 하고 상사도 못 하고 회사도 못 하면 헬조선 파티가 벌어진다. 의외로 일 못 하는 조직은 비는 구석이 많아서(다들 못하니까) 눈에 띄기도 쉽고, 탱탱 놀아도 티 안 나는 자리가 꽤 많다. 여기서조차 빛나지 않는다면 내 능력이 부족한 탓이고, 비효율을 즐기지 못하면 눈치가 없는 거고, 주인의식 책임감에 묶여 있다면 매우 비합리적인 사람이란 게 된다.
3.
요는 그렇다. 큰 그림이 있다면 일상을 즐길 수도, 유리하게 활용할 수도 있다. 오늘을 최적화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럼 나 자신뿐 아니라 회사의 생산성을 높일 수도 있다. 그걸 바탕으로 앞서 이야기한 ‘중요한 선택을 잘하는 일’에 다시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인생길이 조금은 그려진다.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알 법한 이야기인데, 단순히 생각하자. 중요한 선택지에 대해 실제로 시간을 얼마나 썼고 고민했나, 왜 덜 중요한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썼나, 일상이 행복하려면 어떡해야 하나, 그러기 위해 필요한 일에 실제로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나- 이런 질문를 양치질할 때나 출퇴근길이나 화장실 갈 때마다 던져보기만 해도 삶은 변하더라.
사족
팀 내 조직 내 회사가 효율적으로 일하지 못하는 이유도 단순하다. 시작은 리더인 내가 위의 방식으로 생산성 있게 일하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 스타트업이야 원래 빨리 크느라 빡세니까 정신머리 없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머리 있는 리더가 숙제를 빨리 정리해주는 조직이 덜 부산하고 빠르게 큰다. 못 크는데 어수선하기만 하면 어딘가 잘못된 거고.
원문: 강민구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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