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수년간 게임 업계 종사자 수도 절반에 가까운 수가 줄어들었다는 점 역시 무시무시한 지표. 여기에 판교의 큰 기업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을 할지도 모른다라든가, 아무튼 요즈음의 게임 업계는 외형 지표와는 달리 안에서부터 기울고 있다.
2.
게임회사에 있을 때, 5년 10년 후 우리의 경쟁자는 다른 대형 게임사가 아니라는 보고를 오너에게 한 적이 있다. 영상 콘텐츠가 인터렉티브를 더해 게임인지 영상인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다가올 거고, 픽사 애니메이션이 AI와 리얼타임을 달고 다가올 거고, 엔터 IP등이 다른 형태로 가상화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요약하자면 타 미디어들이 놀잇감 1위였던 게임의 지위를 위협한다는 것.
또 한국에서 온라인 PC나 모바일 게임이 잘 되었던 건, 그전에 여가라곤 녹색병 소주 먹고 노는 것밖에 없었던 사회였던 탓이 컸다고 봤다. 집에는 마루에 놓인 TV 한 대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콘솔게임이 성장하지도 못했고, 근면 성실하게 살라고 다그치다 보니 여러 즐길 것들이 없었던 게 80~00 년대의 현실이었던 터라 그나마 짬 내서 할 만한 놀잇감이 게임뿐이었던 탓도 크다.
때문에 이전과는 많이 변해 버린 환경 속에서 한국 게임은, 이를테면 10만 원짜리 모바일 게임 쿠폰이랑, 10만 원짜리 콘서트 티켓이랑, 10만 원짜리 액티비티 사용권 셋 중 하나를 고르라고 줬을 때 소비자가 게임 쿠폰을 고를 수 있는 수준까지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당연히 타 선진 사회 속 게임의 여가 시간 분담율(?) 수준까지 그 비중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모든 콘텐츠들이 소비자의 시간을 두고 경쟁하고 있으니까. 국내 여행도, 스타필드도, 골프도.
또 다른 면에서는, 대형화된 게임 산업이 30-40대 소비자를 주 소비층으로 규정하고 집중하는 사이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 <서든어택> <쿠키런> 이후 10대 소비자를 점유하는 타이틀을 줄줄이 해외에 빼앗겼던 것도 크다. 롤, 오버워치, 브롤스타즈까지 3연타로. 이들은 한국 게임 소비자로 자연스럽게 유입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분명히 예전엔 한국 게임은 돈 없고 트렌디한 어린 게이머가 즐기던 콘텐츠였는데, 이제는 아재 게임으로 포지셔닝되곤 한다.
또 하나, 투자 관점에서 게임 투자에 손이 나가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게임 개발사에 대한 골 깊은 불신도 한몫한다. 중국이고 동남아고 판권이 쉽게 팔리던 온라인 대 전성기 시절 이후로, 모바일 확장기인 4-5년 전에 창업하고 투자를 받았던 기업들의 성과가 썩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 대형 게임사들이 시장을 밟아 버렸고, 투자가 위축되어서 업계가 망한다고? 그게 아니다.
당시 재원도 넘치고 기회도 많았던 그 시절을, 나보다 조금 앞 세대의 선배 개발자들이 대체로 시원하게 말아 드셨다. 다들 유명한 타이틀의 개발에 주요 멤버로 참여했다는 커리어를 들고 나와 창업하고 수십 억에서 수백 억씩 투자를 받았지만, 경영도 기획도 개발도 아마추어에 가까웠던 팀이 많았다. 시장 눈높이에 맞는 프로덕트를 만들지 못하니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 그게 전부다. 넥슨의 휘청임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3.
개발자들은 “게임은 콘텐츠만 좋으면 성공한다.”라고 말한다. 때문에 사업 직군도 마케팅도 무시하는 기질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반대로 게임이 실패하고 업계가 망했다면 그냥 한국 게임업계가 만든 콘텐츠가 재미가 없어서이지, 다른 탓을 할 게 없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재미없는 게임을 만들어야만 했던 건 업계 내의 위계질서 상 위에 계신 분들의 시각에 문제가 많은 탓도 크다고 보지만.
업계의 해법은 무엇일까? 그냥 위의 이야기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된다. 적어도 게임 투자에 있어서는 눈에 띄게 일을 못하는 회사만 걸러 내도 실패 확률을 확 줄일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고, 근거를 갖고 설명이 되는 콘텐츠보다는 설명이 안 되는 엉뚱한 콘텐츠에 투자할 때 확률이 높다는 것도 재미있는 점이다. 말이 되는 콘텐츠는 말이 되는 계획과 개발력과 재원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거고 말이다.
로보카폴리를 오늘도 열심히 다듬고 계실 대표님과 투자 논의를 할 때 이 이야기가 심장에 콕 박혔다.
애니메이션 산업은 그동안 한 시대의 큰 기회가 누군가에게 주어질 때마다 큰 실패가 반복되었고,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면 그 후배 세대들은 한동안 어두운 터널을 지나 버티며 다음 기회가 올 때까지 고생하게 되더라.
이번 펀딩을 준비하며, 이제는 그런 선배의 입장에 선 내가 돈을 끌어 오고 실패해서 후배들에게 또 불신에 찬 시선들로 힘든 시기를 겪게 할 것인지, 그래도 성과를 남겨서 그들이 사업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 수 있을지를 정말 오래 고민했다.
그래서 이 분에게 투자를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업이라는 건 엄청난 무게감을 지고 해야 하는 일인 경우가 많다. 나만 아프면 좋은데, 조직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업계를 얼어붙게도 만들 수 있는 영향력을 크든 작든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때문에 사람이 물러날 때도 알아야 하고, 끊임없이 사업의 질적 수준, 각 개개인의 역량 수준을 냉정히 보지 않으면 모두가 정말 많이 아프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 자신이 운 좋게 훌륭한 서비스와 타이틀을 만나 제법 오래 버틸 수는 있었지만 훌륭한 개발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일을 쬐금 잘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크리에이터는 전혀 못 되는 수준이라 생각하니 항상 불안했고, 10여 년 일을 해 봐도 뾰족한 답이 안 나왔다. 그래서 개발 일을 떠나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그걸 스스로 인정하기로 했던 날 밤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나라는 못난 개발자가 하나 ‘꺼져’ 준 탓에, 조금은 업계가 나아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게임 산업은 질적 양적 산업 성장에 발맞추어 더 변해야 한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투자판에 온 이상, 훌륭한 기업이라면 편견을 딛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음은 물론이다. 헴도 셈도 많은 만큼 게임에 대해선 가혹한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는 점이 좀 문제라면 문제지만 말이다.
원문: 강민구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