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로사와 아키라, 『카게무샤(1980)』에서 어둠 속, 세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행동을 하는 이들은 나란히 앉아 말을 주고받는다. 키도 비슷하고, 얼굴도 비슷하고, 수염마저 비슷하게 쓰다듬는 이들이 모두 다른 사람임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2.
때는 일본 전국 시대, 사형을 기다리던 도둑 하나가 영주 앞으로 끌려 온다. 고후의 영주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가이의 호랑이[甲斐の虎]”로 불리는 그는 주변의 오다, 도쿠가와 집안이 두려워할 정도의 유력 군웅이다. 그리고 도둑을 끌고 온 것은 신겐의 동생, 노부카도[武田信廉]였다.
하잘것 없는 도둑이 영주 앞으로 잡혀온 이유는, 그 도둑이 형 신겐과 놀랄 만큼 닮았다는 것을 노부카도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전장의 적병부터 후방의 암살자에 이르기까지, 신겐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겐과 꼭 닮은 대역, 이른바 카게무샤[影武者]를 이곳 저곳에 두어 암살자를 혼란케 해야 했다. 실제로 노부카도도 신겐의 카게무샤를 여러 번 해봤다. 노부카도가 형 신겐에게 권한다: “저 도둑을 카게무샤로 쓰시지요”
비록 영주 앞으로 끌려 왔지만, 도둑은 별로 당황하거나 겁먹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을 각오를 한 마당에 거칠 것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한갖 도둑이 자신의 연기를 한다는 사실에 신겐이 꺼림직해하자, 도둑은 오히려 그를 비웃는다.
“나와 네가 뭐가 다르냐? 나는 겨우 잔돈푼을 훔친 도둑일 뿐, 수백 명을 죽이고 큰 도둑질을 한 너보다 내가 더 나쁘냐?[1][2]”
하지만 이 대담함이 오히려 신겐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도둑에게 자신이 입는 옷과 갑옷을 내리고, 카게무샤로 쓰기로 결정한다.
얼마 뒤, 전쟁터에 나간 신겐은 적이 쏜 총에 맞고,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둔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 주변의 세력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 신겐은 죽기 전 유언을 남긴다. “앞으로 3년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제 죽은 신겐 대신 신겐을 연기할 사람이 필요했다. 다케다 집안의 중신들은 도둑에게 그 임무를 맡긴다. “앞으로 3년, 3년만 영주님 역할을 하면 된다. 그 날이 지나면 큰 상을 주고 돌려보내 주마.”
3.
얼마 전 쓴 글에서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고전적인 논쟁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 문제는 고대 그리스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도 종종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불교의 답은 상당히 심플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테세우스의 배로 기능하는 한은 판자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든 간에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다.”
모든 것은 마음 속에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걸맞는 대답이지만, 한편으로는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정체성 따위는 사람들이 정하기 나름이라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연기를 하겠노라고 중신들 앞에서 약속하긴 했지만, 이미 죽어서 없는 사람을 흉내내는 것은 얼척이 없는 일이다. 결국 도둑은 신겐의 측실들만이 있는 자리에서 털어놓는다: “나는 사실 신겐이 아니야. 전사한 영주님을 대신해 연기하고 있는 가짜라고.”
하지만 측실들은 농담도 잘하시네 하면서 까르르 웃을 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측실들은 누구보다 개인적으로 신겐과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도둑은 신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이 도둑은 정말 도둑일까? 이미 그는 신겐을 연기하고 있는 도둑이 아니라 신겐 그 자체가 아닐까?
영화 초반, 셋이 모인 자리에서 노부카도는 카게무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카게무샤는 정말 힘든 일이야. 자기 자신을 지우고 남이 된다는 것, 그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지.”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신겐 역할을 천연덕스럽게 해내고 있는 도둑은 과연 누구일까. 이 사람이 정말 가짜가 맞는 것일까?
모두에게 신겐으로 인정받는 속에서, 도둑은 점점 더 신겐이 되어간다. 처음엔 어려웠다. 도둑의 꿈 속에서 무덤에서 걸어나온 진짜 신겐은 도둑을 쫓아오다가,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꿈 속에서 진짜 신겐이 사라짐과 동시에 도둑은 점점 더 능숙하게 신겐 노릇을 한다. 호위 무사들은 그가 가짜라는 것을 알지만, 그가 진짜의 자리에 앉아 수염을 쓰다듬기 시작하자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앉는다. 중신들이 모여앉은 작전 회의에서도 그는 여지없이 신겐 노릇을 한다.
처음 그에게 신겐 연기를 시킬 때만 해도,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은 걱정이 많았다. “제대로 카게무샤 노릇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변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이전과 같이 굴러갔다. 단 하나, 신겐의 어린 손자가 좋아했을 뿐이다: “이전엔 할아버지가 너무 무서웠는데, 요즘은 잘 놀아도 주고 해서 너무 좋아.”
4.
약속된 3년이 흘러갔다. 어느 날, 신겐만이 다룰 수 있던 흑마를 타던 도둑은 말에서 떨어져 다치고, 치료 과정에서 신겐의 몸에 있던 흉터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가짜임이 들통난 이상, 더이상 연기를 계속할 필요는 없었다. 어느 비오는 날, 다시 예전 신분으로 돌아 온 도둑은 다케다 집안에서 쫓겨난다.
“자,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호위무사 한 명이 사례라면서 큰 돈을 그에게 건네지만, 도둑은 잠시 머뭇거린다. “도련님을 한 번만 더 뵙게 해주시오.” “안 돼, 어서 가!” 호위무사는 도둑을 강제로 문 밖으로 밀어 내고, 문을 닫아버린다. 변한 것은 없었다. 신겐의 아들 가츠요리가 자리를 물려받았을 뿐, 모든 것은 이전과 같이 굴러갔다. 단 하나, 신겐의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어디 갔냐며 울부짖었을 뿐이다.
신겐의 죽음이 확인되자,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이 군사를 일으켜 다케다의 영역을 침입한다. 가츠요리는 굳게 지키기만 하라는 신겐의 유언을 무시하고 대군을 동원해 요격에 나선다. 하지만 한때 무용을 자랑했던 다케다의 기마 군단은 오다 가문의 철포부대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3] 부랑자로 떠돌던 도둑 역시 다케다 군의 깃발을 들고 그들의 뒤를 따르다가 철포에 맞아 쓰러진다. 7년 뒤, 다케다 집안은 산기슭의 이슬이 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5.
신겐이었다면, 어느 순간부터 그는 신겐이 되었을까?
아니, 도둑과 신겐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체 무엇일까?
원문: gorekun’s log
*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아래 글들을 참고할 것.
다케다 가츠요리 – 일족, 가신들에게 배신당하여 텐모쿠잔 기슭에서 죽다
- 신겐이 전쟁을 일삼는 군벌이라는 의미에서 한 말일 수도 있고, 신겐이 아버지 노부토라[武田信虎]를 쫓아내고 영주 자리를 차지한 사실을 가리킬 수도 있다. ↩
- 이 대사는 동서고금에 여러 번 사용 예가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있었던 일화로, 잡혀 온 해적이 “당신은 큰 군대를 이끌고 세상을 훔쳤기에 황제가 되었지만, 나는 작은 배 하나밖에 없이 작은 도둑질만 했으므로 이렇게 잡혀 오게 되었소.” 라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일본 전국 시대 3효웅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호죠 쇼운[北条 早雲]도 비슷한 의미의 말을 했는데, 도둑의 대사는 실제로 이 말에 더 가깝다고 한다. ↩
- 역사적 사실과 다소 거리가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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